출처 : http://h2.khan.co.kr/view.html?id=201912160700001
[정리뉴스] 주한 미국 대사 해리 해리스라는 '문제'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입력2019-12-16 07:00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의 ‘입’이 하루가 멀다하고 화제를 낳고 있다. 2018년 7월 부임한 이후부터 직설적인 언행으로 외교가에서 ‘예외적’ 대사라는 평을 받아온 그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방위비 분담금 압박이나 ‘종북좌파’ 발언 등으로 설화에 휘말리는 일이 잦아졌다. 반미 성향 단체들이 해리스 대사를 겨냥해 시위를 조직하는 일은 차치하더라도, 상당수 국민 여론이 해리스 대사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국 사회 ‘문제적 인물’로 등극한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의 실체와 이면을 들여다봤다.
■정쟁의 한복판에 들어온 미국 대사
한국 근현대사에서 미국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특수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하나뿐인 동맹국으로서 안보와 더불어 산업화 시기 고도성장의 실탄을 제공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 독재 정권들과도 긴장 속에 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자연히 본국의 훈령을 받아 움직이는 주한 미 대사들도 한국 사회와 정치에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해리스 대사처럼 존재감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역대 미 대사들의 실력 행사는 대개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이뤄졌다. 수십년이 흐른 후 기밀 외교문서들이 해제되고 나서야 그들의 행적이 수면 위로 드러난 까닭이기도 하다.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데이비드 스틸웰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오른쪽)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예방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반면 해리스 대사는 언론 보도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발언들이 공개되고 있다. 지난 한 달 사이에만 문재인 정부를 ‘종북좌파’에 빗댄 언급, 야당 의원과의 면담에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압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분을 샀다.
문제의 ‘종북좌파’ 발언은 해리스 대사가 지난 9월23일 미 대사관저에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 소속 여야 의원 9명을 초청한 자리에서 나왔다. 해리스 대사가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 좌파에 둘러싸여 있다는 보도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는 참석 의원들의 전언이 있었다. 미대사관 측은 비공개 외교 활동에서 오간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나간 것에 대해선 코멘트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해리스 대사가 이념적 편향이 짙게 밴 단어를 사용한 것이 과연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적어도 주재국 상황을 본국에 균형 있게 전달해야 하는 대사 본연의 의무와는 거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방위비 압박 속 타깃이 된 해리스
여야를 막론하고 해리스 대사가 ‘해도 너무한다’는 말을 낳은 에피소드도 있다. 바로 해리스 대사가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바른미래당)을 따로 만나 방위비 증액을 압박한 사건이다. 지난달초 해리스 대사의 초청을 받고 관저에 갔던 이혜훈 위원장은 언론들에 해리스 대사가 ‘방위비 50억달러’를 20회 이상 집요하게 언급했다고 전했다.
해리스 대사가 이혜훈 위원장을 만난 사실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국의 핵심 정책을 주재국 유력 인사에 널리 알리는 정상적인 대사 업무 범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호소할 정도라면, 당시 해리스 대사의 태도나 발언 수위를 짐작할 만하다.
특히 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체결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인데다, SMA 타결 후에도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 미국이 올해 한국이 내는 분담금의 5배인 50억달러(약 6조원)를 요구한 것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이를 잘 아는 해리스 대사가 야당 의원을 공략해 모종의 압력을 행사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 18일 서울 중구 미국 대사관저 내 옛 미국공사관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기습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페이스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위시한 미 정부 당국자들이 방위비 대폭 증액을 연일 압박하는 가운데, 해리스 대사를 타깃으로 한 비난과 공격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한 단체가 광화문 미대사관 본관 앞에서 ‘해리스 대사 참수 경연대회’를 열겠다고까지 선언했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 “주한 외교사절에 대한 위협이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자제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지난 10월에는 대학생들이 미국의 방위비 인상 압박을 비판하며 해리스 대사가 기거하는 정동 미대사관저(하비브하우스) 담을 넘는 사건도 일어났다. 미대사관저에 시위대가 진입한 것은 30년만에 처음이었다. 이례적인 월담 시위의 근본 원인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무리하게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를 벌인 대학생 단체 역시 과거에도 눈길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시위 수법을 동원한 바 있다.
하지만 해리스 대사 자신도 방위비 분담금 인상 반대 여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해리스 대사는 방위비 분담금 규모와 관련 “미국의 5배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하지만,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현재 한국이 전체 비용의 5분의 1만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충분하지 않다”(동아일보 10월9일 인터뷰)고 밝혔다. 미국 내에서조차 ‘50억달러’는 과도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5배 증액’ 요구를 정당화한 것이다. 정부 인사들이나 전문가들도 해리스 대사의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며 언급을 피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 전 대사, 캐슬린 스티븐스 전 대사(왼쪽부터). 경향신문 자료사진
■해리스를 위한 항변?
해리스 대사는 군인 출신이다.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의 해군 4성 장군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해군 참모차장, 합참의장 보좌관을 거쳐 태평양사령관을 지냈다.
군인 이력은 직업 외교관들과는 사뭇 다른 해리스 대사의 ‘거침없는’ 스타일을 설명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외교관이라면 상대를 의식해 빙빙 돌려 말했을 만한 사안에 대해서도 해리스 대사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리스 특유의 ‘직설’은 공개 석상은 물론 언론 앞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때로는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스타일 탓에 불필요한 논란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미외교 경험이 많은 한 정부 당국자는 “캐슬린 스티븐스, 마크 리퍼트 전 대사들과 비교하면 해리스 대사의 스타일이 도드라지는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해리스 대사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낄 만한 일들도 여럿 있다. 단적인 예가 지난 8월29일 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 ‘쉐이크쉑’ 개점식에 참석했을 때다. 공교롭게도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해리스 대사를 불러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에 미국 정부가 유감을 표명하는 일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해리스 대사가 안보 관련 행사에는 불참하면서 햄버거집을 찾은 것을 두고,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미 대사관측이 쉐이크쉑 개점식은 원래부터 계획한 일정이었다고 밝혔지만,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한미동맹 파열이 본격화됐다는 관측은 한 동안 이어졌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어쩌다 보니 해리스 대사가 가장 미움받는 대사가 되었지만, 당사자는 본의가 왜곡되어 전달된다고 느낄만한 면도 있을 것”이라며 “한미동맹에 대한 생각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인물”이라고 전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오른쪽)가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 ‘쉐이크쉑’ 개점식에 참석해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해리 해리스 미 대사 트위터
■대사 개인의 ‘돌출’보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본색’
해리스 대사는 트위터 등 SNS(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문난 위스키 애호가인 그는 한국 술에 대해서도 예찬을 아끼지 않는다. 직접 막걸리와 소주, 복분자주를 혼합한 ‘한미동맹 칵테일’을 제조하는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또 한국 음식도 가리지 않고 즐겨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해리스 대사가 주재국 문화에 보이는 관심에 비해, 주재국 정부와 국민을 배려하는 자세는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연달아 불거진 논란을 단지 해리스 대사 특유의 직설적인 언행으로 인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관한 그의 인식이 실망스럽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과거 반미시위가 고조됐을 때도 미국 대사들은 빠짐없이 동맹의 중요성과 가치를 언급했다”며 “이번 월담 시위 때 해리스 대사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에 없다”고 꼬집었다.
근본적으로는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 노선에서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다. 해리스 대사의 ‘말’들도 결국 국제 규범이나 원칙보다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아메리카 퍼스트’, 동맹을 거래와 손익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동맹 경시’ 풍조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에서 ‘동맹파’ 당국자들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대중 강경파이면서도 한미동맹을 중시해온 랜들 슈라이버 국방부 인도·태평양 안보 담당 차관보도 최근 사임했다. 해리스 대사 논란 역시 ‘트럼프의 미국’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하게 본색을 나타내고 있는 흐름과 무관치 않은 셈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0일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와 함께 오산 공군기지로 향하는 미군 블랙호크 헬기에 탑승하고 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트위터.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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