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74961


탈북 사실 숨기는 현실, 독일 닮아선 안된다

[동독인의 독일통일 이야기 ⑦] 동독인들, 과거청산에 힘썼지만... 체제와 개인 동일시하며 문제되기도

19.10.03 20:23 l 최종 업데이트 19.10.03 20:23 l 강구섭(kanggusup)


 라이프치히 동독 국가보위부(슈타지) 분원이 있던 건물의 2005년 풍경.

▲  라이프치히 동독 국가보위부(슈타지) 분원이 있던 건물의 2005년 풍경.ⓒ 강구섭

 

1989년 11월 라이프치히 한 건물.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동독의 개혁을 요구하는 월요기도회가 열렸던 동독의 라이프치히. 2000년대 초반, 친분이 있는 라이프치히에 거주했던 동독 출신 노부부의 초대로 도시를 자세히 여행한 적이 있다. 함께 곳곳을 둘러보던 길에 노부부가 우리를 안내했던 곳은 둥근 모퉁이(Runden Ecke)라고 불리던 동독의 국가보위부(슈타지) 분원이 있던 건물.


베를린 장벽 붕괴 후인 1989년 12월, 동독의 '체제 붕괴'가 기정사실화 되면서 슈타지는 자신의 반민주적 행적을 은폐하기 위해 자료 파기를 시도했고, 이를 알게 된 동독 시위대는 필사적으로 이를 막았다. 동독 주민의 노력에 힘입어 슈타지 자료가 보존될 수 있었고 오늘날 그곳은 구동독 시절, 주민을 감시하고 억압했던 슈타지 활동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렇게 동독주민들은 동독의 과거가 시간에 묻히지 않도록 분투했고, 동독 과거 청산은 통일 후 독일 사회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통일 30주년이 되어가는 오늘날, 동독 과거의 청산은 동독주민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동독의 과거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과거청산, 새로운 시대를 향한 발걸음

 

 통일 전 구동독 국가보위부(슈타지)가 파기한 자료의 복원작업 모습

▲  통일 전 구동독 국가보위부(슈타지)가 파기한 자료의 복원작업 모습 ⓒ 화면캡쳐


독일 통일 후 동독 역사 청산은 붐을 이루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전체 사회의 적극적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정치 분야에서 구동독 사회주의 독재 체제의 원인, 결과, 독재 정권의 반인권적 범죄(국경탈주자 사살 등)에 대한 사법적 평가가 이뤄졌다.


특히 동독 정권의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동독 국가안전부(일명 슈타지)의 행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슈타지가 수집한, A4를 일렬로 쌓아 올릴 경우 180Km에 달한다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가 공개되었다. 슈타지 문서에는 동독시절 슈타지와 협력했던 정치인 등 유명인뿐 아니라 동독 주민 개인을 감시하고 밀고했던 동료, 가족에 대한 정보까지 수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동독 출신 정치인, 공직자 등의 주요 인력에 대한 검증이 이뤄졌고, 통일 이후 구동독 출신 인력의 재임용을 판단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정치권에서도 동독 과거 청산 과제를 수행할 위원회가 구성되어 동독 사회의 각 영역에 대한 장기간의 연구가 이뤄졌다. 동독체제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동독정권에 의해 희생 당한 개인 피해자에 대한 규명도 주요하게 다뤄졌다. 이러한 광범위한 동독 과거 청산을 통해 불법 행위가 드러난 행위자의 일부는 처벌을 받았고, 특히 20여만 명에 달하는 정치범의 복권, 부당한 피해를 당한 동독 주민에 대한 물적 보상이 이뤄졌다.


전체 불법 행위 혐의자 10만여 명 중에 극소수만 최종적으로 처벌을 받았지만 독재 정권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내린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동독 역사 청산은 동독의 독재 체제뿐 아니라 체제에 의해 각 개인에게 가해진 반민주적, 반인권적 불법 행위에 대한 평가를 통해 동독 사회가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는 데 기여했다.


과거청산 추진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통일 초반, 동독 역사 청산은 서독에 의한 동독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승자에 의한 정의, 재판이라는 비판이 줄곧 있었다. 특히 슈타지 자료 공개 후 나를 밀고하고 감시했던 직장 동료나 상사, 심지어 연인, 가족의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갈등이 커졌고, 이것이 동독 지역의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도 계속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동독의 독재 과거에 대한 규명은 시대적 과제였고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가치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에, 일부 동독 측 인사의 저항 속에서도 동독 역사 청산은 지속적으로 수행되었다. 동독역사청산 재단의 사무총장 카민스키 박사는 "2차 대전 후 서독 사회에서 미진하게 이뤄졌던 나치 역사 청산에 견주어 동독 독재정권 및 슈타지 역사 청산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라고 구동독 역사청산 과정을 평가하였다. 나치의 역사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반면 동독 역사 청산은 통일 후부터 적극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진통

 

 라이프치히 동독 국가보위부(슈타지) 분원자리에 만들어진 박물관에서 통일 전 슈타지 행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 .

▲  라이프치히 동독 국가보위부(슈타지) 분원자리에 만들어진 박물관에서 통일 전 슈타지 행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 . ⓒ 강구섭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라이프치히에서 슈타지 자료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것처럼 구동독 주민들은 동독 역사청산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급격하게 이뤄지는 역사 청산 과정에 대해 때로는 혼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 위해 불가피한 과정으로 인식했다.


"우리는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에 동참하려고 여기에 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역사를 규명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려고 한다".


슈타지 문서 파기를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한 여성은 자신의 행동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평가했다. 동독의 독재 과거 청산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통해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동독주민들은 구동독의 최고 권력자가 법의 심판대에 서고,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반민주적 행위를 자행했던 정치권력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독재 체제가 개인에게 자행한 반인권적, 반민주적 행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슈타지의 개인 관련 문서에 대한 열람이 가능해진 1992년 첫 해, 34만 3000건의 열람 신청이 이뤄졌다.


1960년대 초, 서독으로 먼저 탈주한 후 가족을 데려가려고 시도하다가 발각된 아버지가 사형을 당했던 동독 여성 프란츠는 3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야, 공개된 슈타지 문서 열람을 통해 아버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아버지에게 불법적으로 사형판결을 내렸던 판사를 재판정에 세웠다. 비록 수십 년이 지났지만 정권에 의해 부당하게 피해를 당했던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 것이다.


동독 주민들이 느꼈던 수치심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 속에서 과거 청산이 이뤄졌지만 그것이 동독 주민에게 긍정적으로만 인식되지는 않았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동독 역사 청산 과정에서 나타난, 동독 체제와 개인을 동일시하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역사학자 패터 밴디는 "동독 역사 청산이 동독의 독재체제와 비밀경찰(슈타지) 행위 측면에서 주로 이뤄지면서 동독 주민의 삶을 슈타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동독체제에 대한 평가가 동독에서 살았던 개인에 대한 평가와 동일시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동독주민들은 이에 대한 강한 반감을 나타낸 것이다.


동독 주민의 입장에서, 동독체제에서 삶을 영위하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의 삶을 도매금으로 획일화시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동독 체제에 적극 동조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또한 공적 영역에서는 순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적 영역에서는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개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를 적극적인 체제수호자라고 단정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독재 체제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그 속에서 살았던 개인들의 개인의 삶까지도 도매금으로 평가절하된 것에 대한 깊은 반감을 나타낸 것이다.


동독 과거의 청산 방식에 대해서도 동독주민들은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동독 과거 청산이 서독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1990년 통일과 함께 동독이 과거 청산의 대상이 된 이후, 동독 재야운동가의 일부가 역사 청산 과정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서독 측의 주도로 역사 청산이 이뤄졌다. 동독출신의 신학자이자 연방의회 의원이었던 슈뢰더 박사는 서독 측 인사나 전문가들은 동독 사회의 실제 상황이나 그 체제 속에서 살았던 동독인 개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동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서독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대상으로 취급받고, 그들의 잣대로 자신들의 삶이 평가절하되는 상황에서 동독 주민들은 큰 수치심을 경험했다. 과거 청산 과정에서 서독 측의 "당신들 스스로 나라를 만들지 않았냐"는 지적은 동독 주민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이었다. 이에 동독 주민은 "그것은 독재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라고 항변했다. 살아본 사람만이 동독의 과거와 생활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청산은 현재 진행 중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전 동독의 개혁을 요구하는 월요기도회가 열렸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앞 풍경.

▲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전 동독의 개혁을 요구하는 월요기도회가 열렸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앞 풍경. ⓒ 강구섭

 

통일 30년이 지난 현재도 새롭게 드러나는 동독 출신 인사의 불법적인 과거 행적이 언론에서 심도 있게 다뤄지는 등 동독 과거 청산 문제는 여전히 현재형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종전 7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나치역사 청산이 여전히 독일 사회에서 주요한 주제로 다뤄지는 것처럼.


30년을 뒤로한, 지난한 역사 청산 과정에 대해서도 일부 동독 주민들은 "동독 시절에 권력을 누렸던 자들이 지금도 여전히 좋은 위치에서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의견이나, "제대로 된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채 과거 청산이 악용되고 있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고, 심지어 여전히 체제의 불법을 간과하거나 미화하려는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꾸준히 제기되는 것은 "독재 정권, 슈타지의 관점에서 다뤄졌던 것에서 벗어나 동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정치 체제나 권력 기구가 국가를 구성하는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동독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동독을 악마의 국가로 만들지 않는 동시에 미화하지 않으면서 새롭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


베를린에서 열렸던 동독 역사 청산 주제의 세미나에서 한 발제자는 역사를 사람의 그림자에 비유하며 "그림자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표현했다. 사람의 그림자가 몸에서 분리될 수 없듯, 역사 또한 개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독 주민들이 오래 전 통일된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동독에서 살았던 과거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멀리 독일로 향했던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보면, 우리의 경우도 거시적 환경의 변화, 즉 언젠가 직면할 통일이 저 너머의 주민들을 그들의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특히, 과거의 그림자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지금 우리 안에 있다는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북한체제, 정권과 끝없이 동일시되는 상황에서 탈북이라는 이력을 숨기든지, 필연적으로 북한에 대해 극단적인 비판적 관점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북한이탈주민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통일 독일에서 동독주민이 겪고 있는 문제는, 먼 미래가 아닌 이미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미래에 그 문제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가 미래를 만들기 때문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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