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22490001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요동 동부도위
한(漢)이 요동지역의 이민족 주민을 관리하기 위해 요동군 안에 만든 세 개의 부도위(部都尉) 중 하나
한(漢)이 요동지역의 이민족 주민을 관리하기 위해 요동군 안에 만든 동부(東部)․중부(中部)․서부도위(西部都尉)의 세 개 부도위(部都尉) 중 하나이다.
전문정보
문헌에서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는 『사기(史記)』 조선전과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전의 내용에 의하면, 한 무제는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던 섭하(涉何)라는 인물을 요동군의 동부도위에 임명하였고, 이후 조선이 동부도위인 섭하를 기습 살해하자 조선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요동동부도위는 조선이 기습을 단행할 정도로 조선과 거리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부도위의 위치에 대하여,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서는 그 치소(治所)가 무차현(武次縣)인 것으로 기술하였다. 무차현의 현재 위치는 단동(丹東)에서 심양(沈陽) 방면으로 40여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봉성현(鳳城縣) 봉산향(鳳山鄕) 유가보(劉家堡)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王綿厚, 1985)
한(漢) 군현제도(郡縣制度)의 조직을 살펴보면 군(郡)에는 군수(郡守)와 승(丞), 도위(都尉)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중앙정부(中央政府)에 의하여 임명·파견되었다. 한의 지방군(地方軍)은 각 군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각 군에서 병사(兵事)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 질(秩) 2천석(千石)의 도위(都尉)였다. 도위는 각 군의 군사 요충지에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도위가 그 군의 병력을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위는 군의 최고책임자인 태수(太守)의 규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병력을 동원할 때는 중앙에서 일종의 할부(割符)였던 동호부(銅虎符)를 가진 사자(使者)가 태수에게 파견되고, 태수가 가지고 있던 좌반부(左半部)와 합치되면 태수는 도위에게 명령을 내려 병력을 동원하였다.
한(漢)은 요동지역의 이민족 주민을 관리하기 위해 요동군 안에 부도위(部都尉)라는 특별한 관부(官府)를 개설해야 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전한(前漢) 시대의 요동군에는 동부(東部)․중부(中部)․서부도위(西部都尉)라는 세 부도위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의 군에 부도위를 세 곳에나 설치해야 할 정도로 요동군의 주민구성은 복잡했던 것이다.
행정단위로서의 부도위는 군의 하급 관부이지만 부도위에는 군처럼 소속된 현이 있어 군과 유사한 기구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군과 부도위의 유사성은 군에서 부도위로 전환되었거나, 반대로 부도위에서 군으로 전환된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부도위제(部都尉制)는 무제가 이민족의 거주지를 변군(邊郡, 內屬郡)으로 개발하면서 만든 제도로서, 이 제도는 출발부터 변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도위의 장관인 도위(都尉)는 그 지위가 질비이천석(秩比二千石)으로 군태수(郡太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나, 부도위의 관할구역은 군에 비하여 협소하다.
요동군(遼東郡)의 동부도위(東部都尉)는 기원전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한(漢)에 내속(內屬)함을 계기로 설치한 창해군(滄海郡)의 후신으로 개설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부도위제(部都尉制)의 주된 성격은 군사적인 관부(官府)가 아니라, 내속(內屬)한 이민족을 관리하는 제도라는 점에서는 내속군(內屬郡)과 같으나, 조세(租稅)나 요역(徭役) 등 주민에 대한 부담이 내속군보다 한층 완화된 체제라고 한다. 곧, 요동동부도위의 기능은 창해군에 비해 축소되고 완화된 체제로, 내속한 예족(濊族)을 관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권오중, 2000)
요동동부도위는 위만조선의 멸망 후인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30)에 전국적으로 모든 군국(郡國)의 도위관(都尉官)을 폐지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王綿厚, 1985, 「兩漢時期遼寧建置述論」『東北地方史硏究』 1985-1.
권오중, 2000, 「滄海郡과 遼東東部都尉」『歷史學報』 168.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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