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00491
노무현의 "미련한 짓"은 되풀이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검찰실록 12] 공수처법 통과가 이 시대에 주는 교훈
20.01.01 18:29 l 최종 업데이트 20.01.01 18:29 l 김종성(qqqkim2000)
▲ "공수처법 가결" 선포하는 문희상 의장 문희상 국회의장이 3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공수처법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4+1 협의체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공수처법은 이날 국회에서 재석 177인 중 찬성 160인, 반대 14인, 기권 3인으로 통과됐다. ⓒ 남소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공수처법)이 지난해 12월 30일 저녁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퇴장하고 4+1로 통칭되는 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 및 대안신당 의원들 177명이 참석한 가운데 160명의 찬성으로 의결됐다. 재적의원(전체 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면 통과될 수 있는데, 재적의원 과반수가 찬성했으니 그간의 우여곡절을 감안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법안이 통과됐다고 볼 수 있다.
형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이 검찰에만 있다 보니 그간 검찰은 기소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재량권을 과도하게 남용해 국민 불신을 초래했다. 거기다가 검사를 비롯한 검찰청 직원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기소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아 '제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불신과 비판을 받으면서도 검찰이 잘못을 고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을 견제할 법적 수단이 마땅치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수처법 통과는 이같은 부조리한 양상에 철퇴를 가한 사건이다. 고위공직자 범죄에 한해 공수처에 수사권 및 기소권을 부여함으로써, 검찰의 기소독점을 깨는 동시에 검찰 대항마를 띄우는 일이다.
검찰이 그간 공정하게 기소권을 행사해왔다면, 공수처가 별도로 거론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겸손하고 공정하게 행사했다면, 국민들이 공수처라는 대항마를 굳이 띄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국민들은 검찰이 권한을 무기로 정치권력이나 금권과 결탁해온 역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검찰에 줬던 권한을 12월 30일 저녁 결국 분산시켰다. 국민이 준 기회를 검찰이 바르게 쓰지 못해서 생긴, 검찰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23년 만에 결실 맺은 공수처법
이번 공수처법 통과는 참으로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피어난 결과물이다. 싱가포르 부패행위조사국을 모델로 국내에서 논의가 본격화된 1996년 이래, 무려 23년 만에 결실을 본 일이다. 2017년에 <형사정책연구> 제28권 제1호에 수록된 장영수 고려대 교수의 논문 '검찰개혁과 독립수사기관의 설치에 관한 검토'는 그간의 경과 과정을 이렇게 정리한다.
독립수사기관의 설치 문제는 1996년 참여연대의 부패방지법 입법 청원에 포함되어 있던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의 신설안이 국민회의의 부패방지법안의 내용으로 상정된 것에서 시작되어 20년 동안 수많은 법안들이 제출되었고, 이를 둘러싼 논란도 계속되었다.
2001년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제외한 부패방지법이 제정됨에 따라 별도의 법률로 고위공직자비리 전담기구를 설치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명칭도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로 각기 달리 제안되는가 하면, 독립수사기구의 소속 및 권한, 감찰 대상 등도 법안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찬반의 논란 또한 뜨거웠다.
▲ 2012년 10월 23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는 "권력기관 바로세우기 정책발표 및 간담회"에서 대검중수부 폐지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등 집권 시 권력기관 운용 방안을 발표했다. ⓒ 남소연
1996년 이래로 이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가 자동 폐기되는 과정 역시 지난했다. 1996년에 참여연대가 입법을 청원했을 당시, 국회의원 과반수인 151명이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그 정도로 국민적 성원이 뒷받침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발의된 지 한달 만에 회기를 넘기면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의원 상당수가 지지하는 데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공수처 설치를 목표로 했던 그간의 법률들은 국회 내로만 들어가면 하나 같이 무기력하게 사라졌다. 비행기나 선박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많다는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국회는 자기 몸속에 들어온 공수처법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곤 했다.
1996년 12월 5일 국민회의 류재건 의원이 대표 발의한 부패방지법안은 1998년 12월 10일 류재건 의원 등에 의해 자진 철회됐다. 2002년 10월 25일에는 새천년민주당 신기남 의원이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치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이 법안은 16대 국회의 임기 종료와 함께 2004년에 자동 폐기됐다.
법안의 자동 폐기는 그 뒤로도 되풀이됐다. 2004년 11월 9일 정부가 발의한 법안은 17대 국회의 임기 종료와 함께, 2010년에 양승조(새천년민주당)·이정희(민주노동당)·김동철(새천년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2011년에 주성영(한나라당)·박영선(새천년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18대 국회의 임기 종료와 함께, 2012년에 김동철(민주통합당)·양승조(민주통합당)·이상규(통합진보당)·이재오(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19대 국회의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공수처를 향한 입법적 노력은 2016년에 구성된 20대 국회 들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지난 4월 백혜련 의원 등이 공수처법을 대표발의하기 전에도 노회찬(정의당)·박범계(더불어민주당)·양승조(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진보·보수나 여야를 불문하고 공수처 설치를 추진했지만, 지난 23년간 번번이 좌절만 겪었던 것이다.
대표발의자 속에 주성영·이재오가 포함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민주당 계열 의원들이 법안을 추진했지만 나중에는 한국당 계열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민주당 계열이 추진할 때는 검찰의 중립을 관철시키겠다는 목표가 강했다. 검찰이 보수정당을 편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국당 계열이 참여했을 때는, 너무 비대해진 검찰을 견제해야겠다는 목표가 더 강했다. 보수정당 편을 들던 검찰이 어느덧 독자 세력화했기 때문이다. 보수정당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검찰권이 지나치게 강해진 게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 및 검찰의 로비에 더해 검찰 출신 국회의원들의 지연 작전이 공수처 설치를 번번이 가로막았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검찰 출신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공수처에 부정적이었다.
보수정당의 경우에는 검찰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검찰을 이용해 독재권력을 행사했던 과거의 경험 탓에 검찰 견제를 단호하게 추진하지 못했다. 국민의 자발적 지지를 받아 국정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검찰 같은 권력기관의 힘을 빼는 일이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이렇게 공수처 설치가 무산될 때마다 실망한 쪽은 국민들이지만, 특히 이 때문에 한을 남긴 사람들도 있다. 위의 2004년 정부 발의를 주도한 노무현 대통령도 그중 한 사람이다.
노무현의 못다 이룬 꿈, 국민이 이루다
노무현은 16대 대선 당시의 공약집에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신설하여 대통령 친인척 및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이 약속을 이행하고자 '공직부패수사처의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상정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며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유시민이 정리한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노무현은 "여야 정당과 국회의원들이 협조해 주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술회했다.
"한나라당은 무조건 반대했다. 검찰은 조직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국회에 로비를 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 정치인인지라 그런지, 행정자치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국회의원들이 미적미적 심의를 미루었다. 여당 국회의원들도 큰 노력을 하지 않았다. (중략)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도, 공수처 설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때 좀더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한 것을 노무현은 한스러워했다. 퇴임 뒤 검찰로부터 모욕을 받은 것도 그때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인한 자업자득이라고 자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후회의 말을 남겼다. 자서전의 한 대목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에게 그처럼 큰 한을 남겼던 공수처법이 2019년 12월 30일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됐다. 검찰의 반대도 심했고 보수정당의 훼방도 심했지만, 이번에는 자동 폐기되지 않고 과반수 찬성 속에 여유 있게 통과됐다. 3일 전의 공직선거법 개정 때와 달리 한국당 의원들도 이번에는 무리한 몸싸움을 시도하지 않았다.
▲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 패스트트랙 입법 촉구를 위한 제10차 촛불문화제"가 10월 19일 오후 여의도 국회앞에서 검찰개혁사법적폐청산범국민연대 주최로 열리고 있다. ⓒ 이희훈
노무현이 못다 이룬 꿈이 이번에 비교적 쉽게 이루어진 것은, 지난 10월부터 국민들이 토요일마다 촛불을 들고 검찰 개혁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혁명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에너지가 서초동과 여의도를 진동시켰기에,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무난하게 검찰개혁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념과 성향이 제각각인 4+1 공조가 붕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확고한 국민 여론이 그들을 옥죄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 여론이 그들을 통합시켜주는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수처법 통과는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민중이고 국민'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세삼 깨닫게 해준 위대한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노무현을 비롯한 그 어느 사람의 정치적 꿈도 그것이 정의롭고 정당한 것이라면 결국에는 국민들이 이루어줄 수 있다는 진리를 일깨운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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