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416150317575


려당전쟁 현장중계 5 - 당태종 주인공 만들기

[고구려사 명장면 94] 

임기환 입력 2020.04.16. 15:03 수정 2020.04.17. 10:57 


이번 회에서 다루는 전투는 안시성 외곽에서 벌어진 당태종의 군대와 고구려 구원군 간의 전투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주필산대첩'이라고 부른다. 당태종이 전투를 지휘했던 곳의 본래 이름은 육산(六山)인데, 당태종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필산(駐蹕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국의 어느 학자가 이 주필산 전투를 중국 역사상 3대 전투의 하나로 꼽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절로 실소가 나왔다. 그 학자는 안시성에서 패퇴한 당태종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보존하려고 안시성 전투에서 주필산 전투로 눈을 돌리려는 취지였을 게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그 수많은 전쟁과 전투 중에서 주필산 전투를 3대 전투에 포함시킬 정도라면 중국 전쟁사 자체가 빈약해질 수 있다는 점은 생각 못했을까?


사실 당태종을 미화하는 글은 오늘날 역사책만이 아니다. 당나라 때의 사관, 그리고 그 뒤 역사서 편찬자들의 사필(史筆)도 마찬가지였다. '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귀' 등 할 것 없이 중국 역사서는 모두 성군(聖君)으로서 당태종의 덕목을 찬양하기 바쁘다.


이런 당태종의 모습은 당나라 때에 편찬한 '수서'에 보이는 수양제에 대한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물론 당태종과 수양제는 애초에 성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당태종은 남북조시대에 흔히 보이는 폭군 같은 군주상에 비하면 특이할 정도로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중국 역사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당태종의 모습은 실재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군주상'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서술 태도는 고구려 원정 과정에 대한 기록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요하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한 당태종은 곧바로 요동성으로 시찰 나갔는데, 해자를 메우기 위해 병사들이 흙을 지어 나르는 모습을 보았다. 당태종은 무거운 흙더미를 나누어 말에 지고 갔고,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이 모두 감격해 다투어 흙을 지고 날랐다는 이야기다.


백암성 공격 때에 장군 이사마(李思摩)가 화살에 맞자 당태종이 직접 상처의 피를 빨았다고 한다. 또 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이 부상을 입자 직접 장막에 들어가 약을 전해주었고, 강하왕 도종이 발을 다치자 당태종이 직접 침과 뜸을 놓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리고 이런 당태종의 모습에 장군과 병사들이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내용을 계속 덧붙이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암성의 주민들에게도 자애로운 덕을 베풀고, 또 포로가 된 고구려 병사들을 모두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기술하면서 당태종의 너그로움은 당의 군사만이 아니라 고구려 백성들까지 감화시켰다고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런 기사들이 모두 거짓과 과장은 아닐 게다. 당태종은 장수와 군사들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아는 군주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런 당태종의 지휘력도 탁월하지만, 모든 정황을 당태종 중심으로 그리는 사필(史筆)의 결과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역사서들이 당태종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말과 행동을 마치 현장 중계하듯이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당태종을 이 전쟁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당 태종의 초상 /사진=바이두


이 글의 목적이 이른바 주필산 전투 자체는 아니지만, 중국 역사책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전투이니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6월 20일에 당태종이 거느린 대군이 안시성 외곽에 도착해 진영을 갖추었고, 그 이튿날 21일에 고연수와 고혜진이 거느린 15만명 고구려 군대가 안시성 외곽 가까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당태종 주인공 만들기'가 절정에 이르는 대목이다. 병법에도 능한 지략가로서 당태종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는 장손무기나 이적 등 숱한 군신들을 앞에 놓고 자신이 지휘하는 이 전투의 승리를 예언한다. 고구려군이 취할 수 있는 3가지 방식, 즉 상책․중책․하책을 모두 제시한 뒤 고구려군 지휘관 고연수는 태종 자신과 대결하는 제일 하책(下策)을 선택하여 포로로 잡힐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아니나 다를까. 고연수는 당군과 직접 대결하기 위하여 안시성 40리 가까이까지 진군한다. 물론 고구려군 내부에도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고정의라 인물이 있어 당태종이 언급한 상책(上策)에 해당하는 장기전을 펼치는 전술을 제안하였지만, 젊은 패기의 고연수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당태종은 다시 돌궐군 1000명을 보내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여 당군이 싸우기 유리한 곳으로 고구려군을 유인하도록 하였는데, 고연수는 여기에 걸려들어 안시성 동남쪽 8리 가까이 진군하여 산 아래 진을 쳤다. 게다가 당태종은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회유하여 고연수로 하여금 방심하도록 하고, 야간에 몰래 군대를 이동시켜 고구려군의 배후에서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튿날 22일에 고구려군은 서쪽 편에 진을 치고 있는 이적의 당군만 보고 진격하였다. 이때 고구려군 배후에 숨어있던 당군이 뒤를 쳤으며, 양쪽으로 적을 맞게 된 고구려군은 2만(혹은 3만)명 군사가 목숨을 잃는 참패를 하였다. 계속해서 당군이 고구려군의 퇴로를 끊고 압박하자, 결국 고연수, 고혜진 등이 나머지 병사 3만6800명을 이끌고 당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주필산 전투는 당태종의 호언대로 하루 만에 당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승리의 기쁨에 당태종은 역참을 통해 이 소식을 바로 태자에게 알리고, 태자를 보좌하던 심복 고사렴에게도 편지를 써서 "짐이 장수가 되어 이런 승리를 거두었는데 어떠한가"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떠한가? 과연 당태종의 위업을 크게 빛낼 정도의 대단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당의 대군과 대적한 고구려군 지휘관은 연개소문도 아니고, 고연수, 고혜진 등 젊은 장수들이었다. 왜 이런 젊은 장수에게 대군을 맡겼는지는 몰라도, 나이와 경험이 많은 대로(對盧) 고정의를 함께 보낸 것을 보면, 연개소문도 우려하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 두 젊은 장수는 애초에 당태종의 적수라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들이다.


게다가 중국 역사 기록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게 당군의 수는 적은데 고구려 구원군의 수가 15만명에 이르는 대군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병력 수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다. 15만명이라는 기록이 대부분이지만, 10여 만, 20만, 25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기록상에 나타난 고구려군 병력 수에 다소 불분명한 점이 있다.


무엇보다 당시 고구려군의 총 군사력을 고려하거나, 또 고구려의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과연 15만명이라는 대군이 안시성 구원전에 투입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수나 군사력을 고려하면 이렇게 많은 군사가 안시성 구원전에 투입될 여력은 없다고 보인다. 당시 고구려 병력 수는 3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668년 기록이지만 요동 일대 성곽에 15만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으니, 안시성 구원전에 실제로 15만 병력이 투입되었다면, 이는 나머지 군사력을 모두 여기에 쏟아부은 셈이 된다.


정말 당시 고구려 정권이 안시성 전투에서 단판 승부를 거는 그렇게 무모한 군사 행동을 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시성이 함락되더라도 그 길을 따라 천산산맥을 넘으면, 오늘날 수암에는 요충성인 낭랑산성이 버티고 있고, 낭랑산성이 뚫리더라도 압록강 이북 요동을 통과하는 모든 교통로가 합쳐서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요동반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오골성(봉황산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차례 승부를 걸 곳이 있고, 평양성까지는 첩첩의 방어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아무리 안시성의 방어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총력을 기울여 15만이라는 대군을 안시성 구원전에 투입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전회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정작 중요한 요동성 공방전에는 4만의 군사가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지 않았던가. 중요성으로 따지자면 안시성은 요동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욱 당태종도 알고 있듯이 안시성 성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 아니던가?


아마도 고연수 등이 이끄는 병력은 본래 압록강 전선을 지키던 군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성이 함락되고 백암성이 당군의 손에 들어간 뒤에도 당군이 오골성과 압록강 방면으로 진군하지 않자, 압록강 수비군의 일부를 안시성 구원전에 투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이때 투입된 고구려 구원군 병력을 대략 5만~6만명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구원군의 총수만이 아니라,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 전사자의 수도 1만, 2만, 3만 등으로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전투의 최종 수확물에 대해서도 기록마다 다르다. 이처럼 유독 주필산 전투와 관련된 여러 숫자의 차이는 이 전투의 성과를 과장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전투에 투입된 당군의 수는 3만명 정도로 줄이고, 고구려군의 수 및 전투의 성과는 과장하는 필법으로 당태종이 거둔 승리를 과대 포장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추정한다.


설사 주필산 전투의 승리 자체를 높이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이 승리가 이후 전황의 전개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승리의 의미는 퇴색하고 말았다. 안시성의 항전이 갖는 중요한 의미가 바로 주필산 전투의 패배마저 원점으로 되돌렸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결국 '당태종 주인공 만들기'도 그만 빛을 잃고 말았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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