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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천리장성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
1. 개요
한국사에서 두 차례, 고구려와 고려 시대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위치의 장성. 이 이름들은 모두 현대에 와서 "천리"가 되었다는 기록에 따라 임의로 붙여진 이름이나, 사실상 공식 이름이 되었다.[1] 길이를 따져보면 고구려 천리장성은 천 리보다 훨씬 길다. 고려가 쌓은 장성은 길이가 천 리와 비슷하다.
2. 고구려의 천리장성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千有餘里(왕동중축장성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천유여리)
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긴 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쪽은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삼국사기 영류왕 14년(631년) 기사.
당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구려가 631년(영류왕 14년)에 축조를 시작한 성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요동 만주 벌판의 부여성(중국 길림성 농안/장춘)에서 동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에 걸쳐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주요 학계에서는 비사성(중국 요녕성 대련)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참고. 이 성을 축조하는 데는 무려 16년이 걸려 647년에 완공.
641년 천리장성 축조의 총 지휘를 맡은 연개소문이 642년 10월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는 정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2.1. 구조 논란
고구려 천리장성은 기록과 유적이 부족해 실체가 무엇인지 불확실하다. 대당 방어선이 어째서 발해만이 있는 서남이 아니라 동해가 있는 동남으로 바다에 닿는다 했는지도 의문스럽다.
2.1.1. 토성장벽설
곳곳에 있던 토성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쌓은 토축성으로 너비가 약 6m이며 높이는 2미터 ~ 3미터의 고르지 않은 성벽이라는 설이다. 하지만 돈대나 누각 같은 방어 시설이 없는 단조로운 구성으로 영구적인 방어보단 임시 방편으로 적을 잠시동안이라도 저지할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1.2. 요새 연결망설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고려의 천리장성처럼 연결된 구조물로 볼 이유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연결된 성으로 보기에는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고려의 천리장성은 지금까지 유적이 잘 남아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그렇지 못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부여성으로 추정되는 농안에서 요하 하구의 영구를 따라 서 있는 노변강 유적이 전부이다. 이 유적은 1940년대 조사에서는 높이 5미터나 됐지만 오늘날 상태가 양호한 구간은 약 1킬로미터로, 기단부 너비는 6미터, 상층 너비는 3미터, 높이는 약 1미터에 불과하다.
노변강 유적이 천리장성의 전부라면, 노변강 유적을 제외하곤 흔적조차 남지 못한 토성을 쌓느라 고구려가 16년 동안 뻘짓을 할 이유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기록에는 남자들이 천리장성을 쌓는 데 죄다 동원되어서 여자들이 농사를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과연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쉽게 허물어질 흙벽에 불과했느냐 하는 것이다.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고구려의 성이다. 그런데 과연 고구려가 쉽게 무너질 구조물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까? 즉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흙 장벽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당의 침입에 맞서 축조한 천리장성이, 뜻밖에 고구려 - 당과의 전쟁에서는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이 고구려 천리장성의 성격에 대한 오해를 더욱 부추겼다. 기록이 없기에, 고구려 천리장성이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한 임시 방편이었다는 식의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천리장성의 완공 연도는 647년이다. 알다시피 제 1차 고당전쟁은 645년에 끝났다. 전쟁 때 천리장성이 무용지물이었다면, 전쟁이 끝난 뒤로도 성을 축조했을 이유가 없다. 고구려 사람들이 미친 놈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長城'을 무조건 만리장성과 같은 형태로 이해해야 할까? 고구려 전문가 김용만은 그의 저서 "새로 쓰는 연개소문傳"에서 천리장성을 장벽이 아닌 '요새 네트워크'로 볼 것을 제안한다.
고구려 - 수나라와의 전쟁은 614년에 종결되었다. 수나라는 618년에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이세민은 626년에 즉위했다.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631년부터 쌓기 시작했다. 고구려 정부는 당나라가 건국되고, 이세민이 야욕을 보이자[2] 위협을 느끼고,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드러난 방어망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고구려 - 수나라와의 전쟁과 고구려 - 당나라와의 전쟁 양상을 보면 사뭇 다르다.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끌고 온 제 2차 전쟁 때, 수나라 군대는 요하와 요동 반도를 가로지르는 천산 산맥을 넘어 오골성과 압록강을 지나 평양 인근까지 침공하기도 하였다. 반면 제 1차 고당전쟁의 경우, 당나라는 천산 산맥조차 넘지 못했다. 당나라는 돌파구를 찾으려 계속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을 두들겼지만 실패했다. 두 전쟁 사이엔 천리장성 축조가 있다. 두 나라가 같은 지역에서 싸웠으면서 다른 전쟁을 보였다는 것은, 고수 전쟁 후 축조된 천리장성이 역할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만약 이때 천리장성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었다면, 전쟁이 끝난 647년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장성의 방어 능력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만리장성이 과연 적 침입 방어에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 진시황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3] 만리장성은 훗날 여러 왕조를 거치며 개축되고 또 개축되었다가 명나라 때 와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만리장성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은 경우는 얼마나 있을까?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우리 귀에 익숙한 이민족이 중원을 침략할 때 만리장성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물론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는 데 곤욕을 치른 예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때는 화약 무기가 발달한 때다. 만주족은 홍이포의 위력 때문에 산해관 넘기가 힘들었던 것이지 장성 자체의 방어력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또 어떤가? 요나라와의 3차 전을 마무리하고 요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었다곤 하지만.. 이후 몽골의 침입 때 역시 가볍게 패스되고 말았다. 즉 장성은 결코 적 침입에 효과적이지 못하다.
반면 개별 성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경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 성이 공격 받을 때 다른 성에서 지원을 할 수 있으며, 성과 성이 적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다. 또 어느 한 성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성이 있으므로 방어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방벽과 같은 구조는 한 곳만 무너지면 그냥 뚫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스타크래프트를 생각해도 쉽게 답이 나온다. 적을 막기 위해 파일런이나 서플라이 디팟 등을 가지고 일렬로 쭉 늘여놓는 것보다는 불규칙적 혹은 유닛이 다닐 길목에 성큰이나 포토 캐논을 배치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645년 4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개모성을 공격할 때 개모성 주변에 있는 가시성에서 지원군을 보내 당나라 군대를 공격한 사례가 있다. 백암성이 공격 당할 때 오골성에서 1만의 지원군을 보내기도 하였다.
소규모 요새들은 아군 성을 공격하는 적의 배후를 기습 타격하는 것은 물론 아군의 주요 성을 공격하는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작은 요새라도 공격 측에 주둔 병력보다 최소 2배의 병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점령전이 가능했다. 게다가 중소 규모 성들이나 보루는 아군의 휴식처나 물자 보관소 역할도 했다. 방어선에서 적의 발을 묶거나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적고 분산되어 있는 고구려가 오랜 세월 축적한 방어 노하우였다.[4]
이렇듯 고구려 -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 성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적의 침입에 맞섰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에 이런 성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구려의 성은 총 176개이다.[5] 이 중 80%는 요동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 그야말로 한정된 지역에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성이 요동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고구려는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 방어망보다 요새 네트워크 방어망을 선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점을 볼 때,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편견처럼 만리장성과 같은 연결된 구조물이 아니라 오늘날 GOP 비슷한 개념의 전선 내지는 요새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천리에 이르는 구간에 길게 성을 쌓았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성들을 증축, 보수하거나 새로운 성들을 쌓았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1) 무용지물이 아니었으며 2) 임시로 대충 만든 것도 아니었으며 3)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 구조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노변강 유적은 무엇인가? 분명 천리장성의 시발지가 부여성이라고 하였으므로, 요동과 부여성 사이의 평원에도 천리장성이 축조되었을 것이다. 노변강 유적은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 구조라 할 수 있는데, 평원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고구려가 지배 하에 두고 있던 이민족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방벽으로, 이 지역에는 형태를 달리하여 장벽 구조로 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제 3차 고당전쟁 때 부여성이 함락되면서 주변 40개 성도 같이 함락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성들이 천리장성의 범주에 포함된 것일 수도 있다.
2.1.3. 반론
위의 이론은 고구려에서 '요새 네트워크'를 장성이라고 불렀다는 증거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장성'을 성벽이 이어진 긴 성으로 보는 것은 편견이 아니라 그게 장성이라는 단어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리장성이 침략을 막는데 쓸모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인들이 미친 놈들이 아니라면 이런 성을 축조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듣기에만 그럴듯할 뿐 사실 앞뒤가 맞지 않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대대손손 미쳤기 때문에 전국 시대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쓸모도 없는 장성을 쌓느라 고생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만리장성 항목에도 나오듯이, 장성은 대군의 공격을 직접적으로 막기에는 적합하지 않더라도 적군의 움직임을 제한하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6][7]
또한 노변강 유적이 단순히 허술한 구조라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의 축성술로 이런 허술한 성벽을 천리장성이라고 쌓았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전쟁을 대비하며 (혹은 심지어 전쟁 중에) 급하게 쌓은 기나긴 장성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건설한 거점 성곽보다 구조가 단순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진나라 시대의 장성 성벽은 토성에 가깝고, 지금과 같은 성벽이 만들어진 것은 명나라 시대의 일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서도 그런 구조의 만리장성을 쌓는 것은 국가에 상당한 무리가 가는 일이었는데,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진대의 만리장성과 유사한 구조였다는 이유로 고구려의 축성 기술이 이 정도밖에 안 되겠느냐고 따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위의 주장에는 노변강 유적에 대한 이해와 고당전쟁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 노변강 유적은 중국과 국내에서 농안 부여성에서 지금의 요하 하구인 영구에 이르는 것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파악이 되어 왔다[8]. 요동반도 해안선에서는 명확한 장성의 흔적이 발견되지도 않을 뿐더러 상륙한 적 상륙군도 천산산맥에서 충분히 방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벽의 성격과 인접 유적에서 고구려의 천리장성임을 유추할 수 있는 증거들이 많이 발견된다. 판축에 의한 축성 방식을 따르면서 후방의 고구려 산성들과는 다른 고구려식 평지성[9]들이 인접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의 국경인 요하에서 신성이나 요동성과 같은 고구려 주요 거점성 사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이른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요하를 주요 방어선으로 삼았던 고구려가 적의 도하를 방어하기 위한 장성과 거점성을 설치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발굴 조사에서도 현재 GOP와 비슷한, 약 40여 개의 전방 초소들의 존재가 확인된다.[10]
천리장성의 문헌 출현이 적다는 지적 역시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의 차이를 살펴보면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수나라의 침공 당시 수나라군은 통상적으로 임유관-영주-회원진-요하를 거치는 루트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고구려군의 첫번째 주 저항선 역시 회원진-요하 루트의 도하 지점에 있었다. 고당전쟁 시에는 침공 루트와 방식이 다양해졌는데, 바로 천리장성의 축성으로 인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시 당나라군은 회원진뿐 아니라 요하 하구와 통정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도하 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우월한 기동력을 갖춘 군대가 장성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통상적인 작전으로, 여러 장소가 일거에 공격을 받으면 수비 전력은 자신의 수비 범위에서만 수비가 가능해 상호 지원이 불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방어선에 구명이 나면 수습이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1차 고당전쟁 시의 천리장성의 존재는 간접적으로 확인이 되지만 당나라의 후속 침공 시 천리장성의 기록 부재는 당 원정군의 성격 변화에서 해답 도출할 수 있다. 구당서에 따르면 666년 경 요하에는 약 15만의 고구려군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요동성과 같은 고구려 거점성의 병력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러나 1차 침공 이후 고구려에 소규모 공격을 가했던 이세적의 군에 '물에 익숙한 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배치되었고 1차 침공 이후에 당군이 요동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가하지 않았었다는 점[11]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차 고당전쟁 이후 고구려가 당군의 동시다발적인 도하에 대응하고자 요하 유역에 방어군을 대폭 전진 배치 했고, 이 때문에 당군 수뇌부는 요동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따라서 당군은 소규모 습격 시에도 도하 작전에 유용한 부대를 투입했으며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후방인 패강에 우회 상륙하는 방식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연남생의 항복으로 고구려의 심장부인 국내성 일대가 당군에 넘어간 상태에서 시작된 3차 여당전쟁에서는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 방어선에 전방위적인 대규모 공세를 가하게 되고 요동 방어선 북방의 최고 요충지인 신성의 함락을 시작으로 방어선이 우후죽순으로 와해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주
[1] 만리장성 역시 "장성"이라고만 불렀으나 후에 만리장성이란 수식어가 붙었고, 중국인들은 아직도 장성이라고 부른다.
[2] 이세민은 아버지 당 고조 이연과 달리 팽창 의욕이 강했다.
[3] 다만 이때의 만리장성도 전국 시대 각국이 지어놓은 장성들을 연결한 것이다.
[4] 비류수 전투에 고구려 수도까지 공략하며 고구려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위나라나 전연의 경우에도 고구려 땅에서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다.
[5] 그러나 이는 멸망 직후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에 있던 성의 갯수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발굴된 고구려의 성만 해도 300개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이다.
[6] 당장 몽골과 금나라의 전쟁만 봐도 만리장성이 있었기에 금나라가 몽골을 막기 위한 병력을 각지에서 모아 결전을 시도할 수 있었지(결과적이겐 칭기즈칸이 너무 사기라 기발렸지만..) 만리장성 마저 없었으면 금의 수도 중도(오늘날의 베이징)는 바로 몽골 기병의 급습에 흔적도 없이 갈려 나갔을 것이다. 게다가 만리장성 때문에 몽골이 계속 하북 지방과 몽골 본토와 왕래하기 어려웠고 결전에서 개발렸음에도 중도를 잃지 않고 화친하는 선에서 칭기즈 칸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7] 오늘날 같이 해체 기술이 간단할 때야 폭약을 왕창 아래에 넣고 펑 박살내면 되지만 이 당시에 성을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은 일일히 사람을 동원해서 깨부수면서 해체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당장 적지에서 성벽을 해체할 여유가 어딨을까..
[8] 국내 연구자로는 여호규가 대표적이다
[9] 봉천통지
[10] 1~2리 둘레의 규모로 보아 요하 주변을 감시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11] 연남생의 투항 이전까지 당나라의 공세는 수군을 통한 평양 정공법으로 바뀌었음을 상기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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