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906150300578


수양제는 왜 고구려를 침공했나? (1)

[고구려사 명장면 53] 

임기환 입력 2018.09.06. 15:03 


수양제는 왜 고구려를 침공했을까?


598년 아버지 문제 때 동생 양량(楊諒) 등이 30만군을 동원했지만 요하를 건너지도 못하고 수많은 군사만 잃고 빈손으로 돌아온 상황을 수양제는 충분히 보았다. 그 패전의 원인이 전쟁 준비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님 못난 동생이 지휘한 탓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패전이 양제에게 어떤 교훈을 준 것은 틀림없는데, 적어도 그것이 고구려 정벌을 망설이게 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면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양제는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으며, 특히 1차 정벌군은 전투 병력만 무려 100만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 전쟁에 왕조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셈이다. 어찌 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런 점을 고려하면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이유를 한두 가지로 간단히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에서도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아마도 크고 작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으리라 보는 게 타당하겠다. 여기서는 여러 견해 중 가장 유력한 이유 몇몇을 살펴보도록 하자.


607년 4월부터 9월까지 수양제는 몸소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북쪽 변경지대를 순행하였다. 돌궐 등 북방 이민족에게 수의 위세를 과시하고 그들의 복속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행길에서 8월에는 낙양으로부터 북쪽으로 1500리나 떨어진 유림(楡林)에 이르렀다. 당시 동돌궐의 대칸은 계민가한(啓民可汗)이었는데, 양제의 순행이 시작되자 자신의 아들과 조카를 보내어 조회하였고,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수양제와 군대를 동돌궐의 영역안으로 맞아들여 직접 나아가 영접하였다. 계민가한이 지나치게 극진한 예를 갖추자 오히려 수의 조정에서 부담스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골칫덩이였던 동돌궐이 수양제 앞에 납작 엎드리고 굴복하자 수양제와 그의 신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수양제에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당시 고구려의 사신이 동돌궐에 와있었는데, 계민가한이 이를 숨기지 못하고 양제에게 소개하였던 것이다. 복속을 맹세한 동돌궐의 땅에서 적대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 사신과 마주친 수양제와 군신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때 수양제는 고구려왕의 입조를 요구하면서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고구려 사신을 위협하였다.


고구려 사신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찾아간 것은 수양제의 순행이 있기 전으로 보인다. 이 때 고구려가 동돌궐에 사신을 보낸 것이 사전에 양국 사이에 충분히 교감이 있었던 결과인지, 혹은 고구려의 일방적인 사신 파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고구려로서는 동돌궐에 사신을 보낼 때 나름 외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적어도 고구려 입장에서는 계민가한이 수에게 완전 복속되지는 않았고, 그러기에 수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어떤 외교적 모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동돌궐의 계민가한도 598년에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있었고, 그 이후 양국의 관계가 나쁘다는 점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사신을 맞이하였고, 때마침 수양제의 순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사신을 되돌려 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수양제에게 고구려 사신의 방문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였던 것이다.


제2 돌궐제국 시대 퀼테긴의 비문. (몽골 카라코룸 북쪽 40㎞ 지점에 위치). 비문에는 해가 뜨는 동방의 나라 `뵈크리`가 나오는데, 곧 고구려를 가리킨다.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사진=바이두


이런 계민가한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왜 수양제와 신료들은 고구려 사신을 마주치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돌궐과 수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6세기 중반 북방 초원지대를 장악하며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북방의 돌궐은 북중국이 북주(北周)와 북제(北齊)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구도를 이용하여 세력을 키워 갔다. 돌궐의 타발가한(他鉢可汗)이 "남쪽에 있는 두 아이들이 나에게 효순(孝順)한데 물자가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했다는 말에서 당시의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북주가 북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돌궐은 북주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늦추지 않았다. 이에 북주는 579년에 천금공주(千金公主)를 타발가한(他鉢可汗)에게 시집보내는 등 돌궐과 우호 관계를 맺기에 급급하였다. 이때까지 돌궐은 중원 왕조의 최대 적대세력으로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주를 뒤엎고 수가 건국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수는 581년에 북방에 장성을 축조하여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수의 예우에 분노한 사발략가한과 친정인 북주를 멸망시킨 데에 대해 한을 품은 천금공주는 영주자사 고보령(高寶寧)과 통모하여 582년과 583년에 거듭 수를 침공하였으나 격퇴되고 말았다.


더욱 당시 돌궐 내부에서는 소가한(小可汗)들의 분열과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는 이러한 돌궐의 내분을 이용하여 이간책을 시도하였고, 결국 수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주효하여 583년에는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고 말았다.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자 수는 이 기회를 타서 동돌궐을 공격하였다. 세력이 급격히 위축된 동돌궐은 수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치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에도 돌궐에 대한 수의 이간책은 계속되어, 동돌궐의 대가한(大可汗)인 도람가한(都藍可汗)에 대항하는 계민가한(啓民可汗)을 적극 지원하였다. 598년에는 동돌궐의 도람가한이 서돌궐에 연합하여 계민가한과 수를 공격하였으며, 수는 계민가한을 지원하면서 동·서돌궐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동돌궐을 내몽골 사막으로 내쫓았다. 이 과정에서 599년에 도람가한은 자멸하고 말았으며, 수는 계민가한을 지원하여 동돌궐의 대가한으로 삼아 복속시켰다.


이처럼 계민가한은 돌궐의 내분 과정에서 수의 지원을 받으며 동돌궐을 장악하였지만, 아직 서돌궐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으며, 서돌궐은 처라가한(處羅可汗)이 차지하고 있었다. 수의 입장에서는 아직 서돌궐을 제압하지 못한 상태라서 동돌궐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해야만 했고, 수양제가 607년 북방 순행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계민가한의 입장에서도 서돌궐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수의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완전히 수에 굴복해서는 돌궐 전체의 대가한으로 자신의 위상을 확보하기는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계민가한의 양면적인 입장이 드러난다. 이러한 계민가한의 양면적 입장을 고구려에서도 충분히 읽어내고 있었고, 그래서 수를 견제하기 위한 동맹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던 것이다.


수양제를 맞이하여 계민가한이 매우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여 양제의 호감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사신을 공개하면서 자신이 고구려와 손을 잡고 언제든 수양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냈다고 보인다. 바로 이 점이 계민가한의 속내였을 것이다. 수양제라고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 곧바로 고구려 사신을 겁박하여 당장 이듬해까지 고구려왕이 자신 앞에 와서 무릎을 꿇라고 큰소리쳤던 것이다. 계민가한의 속내를 읽고 고구려왕도 똑같이 굴복시킬 것이니 딴 마음 먹지 말라는 제스처인 셈이다.


수는 건국 때부터 북방의 돌궐을 제압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겨우 동돌궐을 무릎 꿇렸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돼 계민가한에 대한 통제력을 확인하기 위해 수양제가 직접 그 먼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계민가한의 뒤에서 수로부터 이탈을 부추킬 수 있는 고구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자, 수양제는 경악했던 것이다. 돌궐과의 연결을 꾀하는 고구려를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가장 위협적 존재인 돌궐이 언제 다시 이탈해갈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수로서는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 의지를 굳히는 데에 607년 8월 계민가한 장막에서의 조우가 큰 계기가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607년 8월 9일 계민가한의 장막에서는 고구려, 수, 돌궐 세 나라의 서로 다른 속내와 의도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수양제의 위세로 인해 계민가한과 연대하려는 고구려의 외교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궐 내부의 깊은 정세까지 읽어낸 고구려의 외교능력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계민가한 역시 고구려와의 연결줄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612년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돌궐은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607년 고구려의 돌궐 사신 파견은 작지 않은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후 고구려는 수와 당의 북방과 서방의 초원세력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안목을 키워갔고, 당과의 전쟁 시에 그 진가를 드러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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