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08654
박정희도서관에 비치된 황당한 노무현 장서
[탐방] 박정희대통령기념관·도서관에 가다
20.02.08 12:25 l 최종 업데이트 20.02.08 12:25 l 김경준(kia0917)
▲ 박정희대통령기념관·박정희도서관 외관 ⓒ 김경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이 연일 흥행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45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박 대통령이 다시 살아온 듯한 배우 이성민의 분장과 연기, '버려진 2인자'로서 충심이 역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소름 끼치게 표현한 배우 이병헌의 연기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몰입감을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자연스레 박정희와 김재규 그리고 10.26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보고 박정희 그리고 그가 통치했던 시대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하고 싶었다.
마침 '박정희대통령기념관·박정희도서관'(이하 박정희기념관)이 리모델링 후 재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과연 기념관에서는 박정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안고 지난 1일 박정희기념관으로 향했다.
230억 중 200억을 국비 지원 받아
▲ 박정희기념관 로비 ⓒ 김경준
박정희기념관은 대한민국 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진 기념관이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기념사업회에 재정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 공사가 추진됐다.
건립 예산 230억 중 200억 원을 국비로 지원받았으며 공공도서관 성격의 기념도서관으로 지어 서울시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상암동 부지를 무상임대 받았다. 2012년 2월 21일 정식 개관했으며 1년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19년 3월 1일 재개관했다.
토요일 낮이었음에도 박정희기념관은 한산했다. 재개관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매우 깔끔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전통적인 한옥 느낌을 주는 목조 마감재를 사용하여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으며, 전시 동선 역시 관람객들의 편의를 배려한 티가 났다. 데스크에서부터 환한 미소로 인사하는 직원들의 친절함까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기념관으로서는 매우 깔끔하고 관람객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공간이었다.
▲ 한국 사회의 혼란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전시물 ⓒ 김경준
입구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가난', '게으름', '못 살겠다 갈아보자', '공산주의', '전쟁', '위선', '빈곤' 등 당시 혼란스러웠던 한국 사회의 시대상을 나타내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적힌 벽을 지나가야만 한다.
그 '부정의 벽'을 지나고 나면 눈앞에 '혁명공약'이 등장한다. 이 빛나는(?) 혁명공약을 보면서 관람객들은 '아! 혁명은 필연적이었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혼란스러운 한국을 구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으로 5·16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읽힐 수 있는 구성이었다.
'민족중흥의 길'이라는 테마 아래 펼쳐지는 업적들
▲ 소년 박정희를 묘사한 모형 ⓒ 김경준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리 촌에서 가난한 집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정희. 어린 시절부터 위인전을 탐독하면서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소년이라는 뻔한 영웅담으로 전시는 시작된다.
1층 전시실은 5·16쿠데타(기념관에서는 '혁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후 박정희의 업적을 '민족중흥의 길'이라는 테마 아래 쭉 나열하고 있다.
▲ 5·16군사쿠데타를 부패와 무능에 맞서 젊은 엘리트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 김경준
국가재건최고회의 활동,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광부·간호사 파독,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전력 보급, 중화학공업 육성, 철강산업 육성, 과학기술 개발 장려, 경부고속도로 건설, 베트남전쟁 파병 등등. 여기까지만 보면 '신이 내린 지도자'가 따로 없다. 박정희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나도 전시를 보면서 괜히 뭉클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상관에서는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노인이 되어 그 시절을 회고하는 영상을 상영하고 있었다. 그 영상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이분들이야말로 묵묵히 자신을 희생해가며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한 분들 아니던가. 이분들의 희생과 공로를 부정할 수는 없다.
▲ 박정희·육영수 부부에 대한 추모의 공간 ⓒ 김경준
아마 그 시절을 살았던 분들에게서 유독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는 것도 그 시절 청춘을 희생해야만 했던 자신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 그리고 그러한 노력 끝에 만들어낸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중년 여성 관람객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손으로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혹시라도 우는 관람객들을 배려해 '추모의 공간'에 티슈를 배치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유신독재·인권탄압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쓰던 유품들 ⓒ 김경준
그러나 전시관 출구에 다다르자 '이게 끝이야?'라는 허탈함이 밀려 왔다.
악명 높은 남산의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시절 벌어졌던 온갖 간첩조작 사건은?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납치한 사건은? 광복군 장준하 선생에 대한 암살 의혹은? 근로기준법 개정을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부마항쟁은?
박정희 시대는 '새벽종이 울리면 새 아침을 노래하는' 밝은 시절이면서 동시에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민주주의를 쓰는' 어두운 시절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파독 광부나 간호사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수많은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개선을 부르짖으며 만들어온 굴곡의 시대였다.
▲ "인권이나 민주는 경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 김경준
경제발전이라는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유신독재·인권탄압이라는 어두운 기억은 이 공간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인권이나 민주는 경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박정희의 준엄한 꾸짖음만이 메아리처럼 울릴 뿐이었다. 박정희 시대 흑역사 제조기라고 할 수 있는 '남산의 부장들'도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 2층 "비판과 시련" 코너 ⓒ 김경준
2층 전시실 입구에 '비판과 시련'이라는 코너가 등장하기에,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고 한 건가?'하고 잠깐 기대를 품었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에 대해 야당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온다는 신문기사 스크랩 몇 개가 전부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다음에 펼쳐지는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추모의 공간이었다.
▲ 박근혜 대통령에 관한 50여 권의 장서 ⓒ 김경준
전시실을 나오면 이번에 리모델링을 거쳐 새롭게 개관한 '박정희도서관'이 보인다. 도서관은 연설문, 각종 정책에 관한 보고서 등 재임 시절 기록들부터 시작해서 평전까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모든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고 있었다.
이름이 박정희도서관이니 박정희에 관한 책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장서 코너는 균형을 많이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한눈에 봐도 서가가 꽉 차 보이는 이승만 대통령 코너나 50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코너에 비해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장서는 9권에 불과했다. 심지어 '북한의 변호인 노무현'이라는 황당한 제목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9권의 장서. 세 번째 줄부터는 이명박 대통령 관련 장서다. ⓒ 김경준
균형 있는 공간으로 발돋움하려면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 대통령만큼 논란이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그렇기에 오히려 균형 있는 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올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해야 할 청소년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 공간에 온다면 박정희를 흠결 없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지도자로 인식하게 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시민 강은혜(22)씨 역시 "박정희가 독재를 하고 부정도 저질렀지만 많은 분야에서 성과도 올렸기 때문에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관람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특정 인물을 기념하는 기념관의 특성상, 비판적인 전시를 기대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러나 국비 지원을 받아서 지어진 기념관이라면 당연히 '역사의 객관화'를 추구하는 게 옳지 않을까?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줄 게 아니라 그 이면의 그림자들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방법일 것이다. 앞으로 박정희기념관이 박정희 시절의 공(公)과 과(過)가 균형 있게 담겨 있는 공간으로 발돋움하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은 한 줄 관람평을 남기고자 한다.
"각하, 전시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 박정희기념관에 조성해놓은 박정희 대통령 마네킹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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