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amu.wiki/w/고구려-수%20전쟁#s-4.3
* "고구려-수 전쟁 - 나무위키"에서 요하 도하 전투만 가져왔습니다.
4.3. 전쟁의 시작 - 요하 도하 전투
수 양제는 총 24군으로 나뉘어 진격하게 했으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평양이었다.
좌 12군: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우 12군: 점선(黏蟬)수군, 함자(含資)수군, 혼미(渾彌)수군, 임둔(臨屯)수군,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이처럼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건 대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성은 촘촘히 연결되서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과거 여러 성의 집합이었던 만리장성이나 훗날 고려에서 축조한 천리장성 등 성들의 집합인 일종의 마지노 선과 같은 방어선이었다. 한 군데를 뚫어도 주변의 성에서 응원군이 와서 역포위를 하거나 후방을 교란해서 보급로를 차단하고, 설사 성을 함락하더라도 주변의 방어선 자체는 건제하기 때문에 항상 주변의 성을 경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10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방어선에 투입하면 야전에서 일단 밀리니 함부로 전투도 못하고 다른 성들에서 응원군도 오기 힘들며, 설사 오더라도 역포위 위험도 적다. 거기다 그 많은 병력이 어디로 움직일 지 모르기 때문에 각 성은 자기 방어하는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예비대 투입도 곤란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방어선은 일시적으로 마비된다.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하여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잠입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612년 음력 2월, 수 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러 군대가 다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 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수나라의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이 공병 작업은 차질을 빚는데, 첫 번째 시도 때는 부교를 세 개 만들었으나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 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고 이로인해 1차 도강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강 중인 수나라군을 고구려 군대가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공격하자 큰 피해를 받았다. 수나라군은 맥철장(麥鐵杖) 등의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수 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게 했고, 하조가 이틀 만에 이를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10,000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확실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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