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1227151506175
을지문덕은 누구인가?
[고구려사 명장면 61]
임기환 입력 2018.12.27. 15:15
지난 회에 려수전쟁 현장 중계 네 번째 전투로 살수대첩을 다뤘는데, 주로 수나라 별동대의 구성과 살수전투까지의 경과에 초점을 맞춰 그동안 별로 주목하지 않은 내용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지인이 그동안 많이 알려진 인물일지라도 을지문덕에 대한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는 인상을 전해왔다. 살수전투 당시 을지문덕의 역할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혹 중언부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다소 간략하게 다루었는데, 말을 듣고 보니 그래도 을지문덕과 관련된 한두 가지 이야기는 좀 더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을지문덕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과거 역사에서도 시대를 막론하고 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갖고 있던 간에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을지문덕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위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는 경우는 없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에서 "소국 고구려가 유례가 없는 수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칭송하면서 춘추좌씨전을 인용해 그를 '군자(君子)'로 평가했는데, 여기서 군자란 나라를 지킨 어진 대신(大臣)을 의미한다.
또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도 1908년에 을지문덕 전기를 저술하면서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을지문덕이며, 일시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대동억만세의 을지문덕이니… 단군 이후 4천년 전해온 땅을 남에게 빼앗기어 우리 집 형제들은 발 디딜 곳도 없으니. 슬프다! 20세기 새 대한의 을지문덕 탄생이 어찌 이리 더니뇨"라고 탄식하면서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국난의 시기에 을지문덕을 역사에서 다시 소환해 민족 앞에 세웠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불세출의 명장으로 거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을지문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살수전투 전후의 간략한 행적에 불과하다. 그것도 중국 역사책에 나오는 기록일 뿐, 고구려로부터 전해지는 국내 전승 기록은 전혀 없다.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에서는 "그의 선대의 계보를 알 수 없다"라고 단 한 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대한제국 교과서 수록된 을지문덕 영정 삽화
이어서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겸하여 글을 알고 지을 수 있었다"라는 문장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다른 역사책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전승이라기보다는 후대에 삼국사기 편찬자나 혹은 그 이전의 역사 편찬자들이 중국 문헌에 나오는 살수대첩 관련 기사에서 을지문덕의 활약상을 보고 유추해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을지문덕을 평양 출신으로 언급하고,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마도 이는 평양 일대에서 전승돼 오던 지역 전승을 기록한 듯싶다. 실제로 을지문덕의 출신이 어디인지 판단할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다.
당시 동아시아를 뒤흔든 세기의 대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장식한 살수대첩의 주인공에 대한 고구려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대의 사정을 알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하러 수나라 진영에 찾아 갔을 때, 그전에 이미 수양제가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면 억류해두라는 밀지를 내린 것을 보면, 당시에 수양제나 군부 핵심부에서 을지문덕을 영양왕 다음의 인물로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적국에서도 충분히 인지할 정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을지문덕과 관련된 국내 전승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앞서 수양제의 밀지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살수대첩은 물론 수양제의 1차 침공에 대한 전쟁 전체를 지휘하던 위치에 있던 을지문덕은 그후 수양제의 2차, 3차 침공 시에는 전혀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전쟁의 경과 자체가 요동 일대에서 단기간 이루어진 것이라 을지문덕이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 남아 있는 기록상으로만 보면 을지문덕은 살수전투를 위해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 듯한 인상이다.
그러다 보니 을지문덕의 출신에 대해 독특한 주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수서'와 '북사' 등에서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이라고 표기했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도 표기했다. 이 '위지(尉支)'를 선비족(鮮卑族)의 성씨인 '위지(尉遲)'와 같은 성씨로 본 것이다. 이들 '위지'씨들은 북조 말기부터 수, 당에 걸쳐 중국 왕조에 관료로 출세했는데, 대표적으로 위지경덕(尉遲敬德)이라는 인물이 당나라 초에 활약하였다. 이런 인물에 주목하여 을지문덕 즉 위지문덕도 선비족 출신으로 어떤 이유에선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고구려로 망명한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제법 그럴싸한 주장이었다. 이름만으로는 위지문덕과 위지경덕이 사촌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이 성립하려면 尉支=乙支가 성(姓)이라는 확증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사실 그동안에도 을지문덕의 성을 '乙支'로 보기도 하고, 또는 진대법 시행으로 유명한 을파소(乙巴素)와 같이 '을(乙)'씨로 보기도 했다. 즉 '을지(乙支)'라는 성을 고구려 관등명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라는 뜻에서 유래한 성으로 볼 수도 있고, '乙'만이 성이고, '支'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존대 접미사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나 다 어느 정도 수긍될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기록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인물들을 보면 왕족인 고(高)씨, 연개소문 집안의 연(淵)씨처럼 성씨를 갖고 있는 인물도 보이지만, 모두루, 온달과 같이 귀족임에도 성씨가 없는 인물도 다수였다. 따라서 을지문덕도 굳이 성씨 여부를 따지기 곤란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성씨를 알 수 있다고 해서, 그 성씨가 곧 출신을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현재까지 자료로는 을지문덕의 출신을 확정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없다. 사실 을지문덕이 선비족 망명객이라는 주장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당혹스러워했다.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고구려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생각은 오늘 우리들의 민족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정작 고구려인들의 세계는 오늘 우리와 달랐다.
고구려는 영토의 확장, 세력권의 확대 과정에서 그 안에 다수의 종족과 다양한 문화를 포괄하게 되는 다 종족 국가였다. 여기서도 다룬 바 있는 안악3호분의 동수, 덕흥리고분의 유주자사 진과 같은 많은 망명객을 받아들인 포용성 높은 사회였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 잘 드러나 있듯이 다양한 계통의 문화 요소들이 어우러진 다문화 세계였다.
그러나 종족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가치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그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은 바로 '자부심'이기도 했다. 을지문덕 출신이 평양이 아니고, 만의 하나 망명객의 후예라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인'이었다.
'고구려인'이라는 게 자부심이 되는 나라.
그래서 을지문덕과 당시의 고구려인들은 모두 고구려를 지켜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부심이 되는 나라.
우리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 있을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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