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9999_1_0000395&isEQ=true&kristalSearchArea=Phttp://db.history.go.kr/url.jsp?ID=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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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故國原王)

고구려 제16대왕.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미천왕.
생몰 : 미상∼371년. 
재위 : 331∼371년.
이름 : 사유(斯由), 유(劉)교(釗)
가계 
   
부왕 : 미천왕 
     
모후 : 왕후 주씨(王后 周氏) - 342년~355년까지 모용황(慕容皝)에게 인질로 고초를 겪었다.
     
제1왕후 : ?
                
장남 : 고구부(高丘夫) - 제 17대 왕 소수림왕이다.
                
차남 : 고이련(高伊連) - 384년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고국양왕에 즉위하였다.

331년 음2월 [미천왕 32년 2월 : 고국원왕 1년] 미천왕 죽음, 고국원왕 즉위함. 
332년 음2월 [고국원왕 2년 2월] 졸본(卒本)에서 시조묘에 제사지냄 
332년 음3월 [고국원왕 2년 3월] 졸본(卒本)에서 돌아옴. 
334년 음8월 [고국원왕 4년 8월] 평양성(平壤城) 증축함. 
335년 음1월 [고국원왕 5년 1월]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음. 
335년 음7월 [고국원왕 5년 7월] 이른 서리로 곡식 피해를 입음. 
336년 음3월 [고국원왕 6년 3월] 사신을 동진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전함 
339년 [고국원왕 9년]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의 군사가 신성(新城)에 침입 
340년 [고국원왕 10년] 세자를 보내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에게 조회함. 
342년 음2월 [고국원왕 12년 2월] 환도성(丸都城)을 수리하고  
342년 음8월 [고국원왕 12년 8월]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김. 
342년 음11월 [고국원왕 12년 11월]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북도(北道)로 침입 
343년 음2월 [고국원왕 13년 2월] 왕제(王弟)를 연나라에 보내어 진기한 물건을 전함 
343년 음7월 [고국원왕 13년 7월] 거처를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김 
343년 음11월 [고국원왕 13년 11월] 큰 눈이 내림. 
345년 음10월 [고국원왕 15년 10월]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모용각(慕容恪) 
349년 [고국원왕 19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나라 
355년 음1월 [고국원왕 25년 1월] 왕자 구부(丘夫)를 책봉하여 왕태자로 삼음. 
355년 음12월 [고국원왕 25년 12월]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볼모 
357년 음10월 [고국원왕 27년] 안악3호분 동수(冬壽) 묵서명(墨書銘) 작성함.  
370년 음10월 [고국원왕 40년 10월] 왜에 사신 파견. 
370년 음10월 [인덕천황 58년 10월] 고려국이 조공함. 
370년 [고국원왕 40년] 전연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망명 
371년 음10월 23일 [고국원왕 41년 10월 23일 : 소수림왕 1년] 고국원왕 전사, 소수림왕 즉위함. 

아버지는 
미천왕, 어머니는 주씨부인(周氏夫人)이다.
314년(미천왕 15) 정월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고구려 미천왕대에 이어 요동지역 확보를 위하여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의 국가전연(前燕)과 심각한 대립을 보였으므로, 왕은 336년 동진(東晋)에 외교사절을 파견한다든지, 338년전연 공격에 실패한 후조(後趙)와의 연결을 꾀하는 등 외교전에서의 우위확보에 노력하였고, 336년모용황(慕容皝)의 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모용인(慕容仁)의 난’(333∼336)에 가담하였던 곽충(郭充) 동수(佟壽) 고구려로 도망쳐오자 이들을 받아들였으며, 다시 338년 후조 전연공격시후조에 내통하였던 봉추(封抽)  송황(宋晃) 등이 역시 투항해오자 이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335년 제3현도군지역을 차지하여 그곳에 신성(新城: 撫順 北關山城)을 축조하였는가 하면, 342년 국도인 국내성(國內城)을 증축하여 전연과의 대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후조  요서 지방의 선비족의 일파인 우문부(宇文部)를 격파, 중원진출을 위한 후방의 안정을 얻기 위하여 342년 기습공격을 감행해온 모용황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의 국도는 함락, 파괴되고 선왕의 시신 및 왕모 주씨는 인질로 잡혀가는 한편, 왕 자신은 단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하는 등, 일대국난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343년 국도를 평양 동황성(東黃城: 지금의 江界?)으로 옮기는 한편, 전연에 사절을 파견하여 스스로 신하를 칭하기도 하였으며, 349년 고구려로 투항해왔던 송황을 다시 전연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고, 355년 전연으로부터 ‘낙랑공고구려왕(樂浪公高句麗王)’에 봉해짐과 동시에 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영주자사(營州諸軍事征東大將軍營州刺史)라는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345년 모용각(慕容恪)의 남소성(南蘇城)으로 쳐들어가긴 하였지만, 전연이 중원장악에 주력함에 따라 전연과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370년 전진(前秦) 전연을 격파하고 고구려와 경역을 접하게 됨에 따라 고구려로 피신해온전연의 권신 모용평(慕容評) 전진으로 압송하는 등, 전진과의 우호관계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한편, 왕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여 대방군(帶方郡) 지역으로 북진하고 있던 백제와 격돌하게 되었다. 왕은 369년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치양(雉壤: 지금의 白川)전투에서 백제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이끄는 군사에 패배하였고, 371년 10월 고구려 깊숙이 진격해온 백제 근초고왕군을 맞아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여 고국원(故國原)에 묻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隋書
晋書
梁書
資治通鑑
高句麗東黃城考(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高句麗平壤遷都의 動機(徐永大, 韓國文化 2, 1981)
南北朝時代の滿洲(箭內互, 滿洲歷史地理, 1913)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今西春秋, 靑丘學叢 22, 1935)
晋代の遼東(池內宏, 滿鮮史硏究,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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