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v.daum.net/v/20210204150319605

 

평양성 전투 (3) 연개소문 대 소정방 대 김유신
고구려사 명장면 116
임기환 입력 2021.2.4. 15:03
 
외형상으로는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보급이 끊긴 소정방은 초초했다. 9월에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을 신라에 보내 군량 지원을 요청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미 겨울은 코앞에 닥쳐오고 있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북상하던 신라군이 백제부흥군을 핑계로 남천주(경기도 이천)에서 꿈적도 않고 있다가 그냥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평양성 안의 연개소문은 느긋하게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행운이 자신 편에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9월에 압록강 전투에서 큰아들 남생군을 궤멸시킨 글필하력 군이 갑자기 철군했다. 게다가 문무왕이 직접 출정했다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 신라군도 10월 말에 서라벌로 되돌아갔다. 남은 상대는 굶주린 소정방의 당군뿐이었다. 이제 시간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다. 장안성 안에서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는 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당군은 스스로 무너질 판이었다.
 
당시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처음에 당 고종은 친정(親征)하기 위하여 35군을 동원했다. 하지만 친정을 포기했기 때문에 35군 전력 모두를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압록강으로 진격한 글필하력과 전력을 둘로 나누었기 때문에 평양성을 직공하는 소정방 군대의 규모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애초 편성했던 행군총관 다수가 평양성 전투에 참여한 흔적이 보인다.
 
660년 12월에 처음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할 때에 평양도대총관으로 임명되었던 유백영(劉伯英)이 있다. 얼마 뒤 661년 4월에 원정군을 재편할 때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을 맡았는데, 유백영은 소정방의 오른팔로 참여했을 것이다. 유백영은 백제 원정 때에도 소정방 아래 부대총관을 맡았던 장수였다. 다음 패강도대총관으로 참여한 병부상서 임아상(任雅相)도 최고 지휘관 중 한 사람이다. 그 외 누방도행군총관 정명진(程名振), 옥저도행군총관 방효태(龐孝泰), 함자도총관 유덕민, 그리고 행군총관명이 불분명한 조계숙(曹繼叔)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들 몇몇 행군총관 존재만으로 당군의 규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전해인 660년 백제 원정 때에 13만 대군을 동원한 점을 고려하면, 최소한 그 정도 규모의 대군이 소정방 지휘 아래 평양성 공격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름이 확인된 소정방 이하 행군총관 대부분이 백제 원정에 참여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규모 군대가 10월부터 군량 부족에 시달렸으니, 비록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기는 어려웠을 듯하다. 당시 전황을 전해주는 중국 측 기록이 거의 없는데, 다행히 '일본서기'에 고구려 사신의 전언이 기록되어 있다.
 
"오직 12월에만 고구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浿水·대동강)가 얼어붙는다. 그러므로 당의 군대가 운거(雲車), 충붕으로 북과 징을 시끄럽게 치며 공격해 왔다. 고구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오히려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고구려군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빼앗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당군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이듬해에 들어 고구려군의 역공세가 시작되었다. 662년 2월 14일에는 패강도대총관 병부상서 임아상(任雅相)이 병으로 진중에서 죽었다. 최고사령관 중 한 사람의 죽음이니 소정방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2월 18일에는 사수(蛇水)전투에서 방효태 군이 연개소문의 군대와 격전을 벌이다가 아들 13명 등과 함께 수만 군사가 패몰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제 평양 일대의 당군은 궤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정방은 치욕스러운 패배를 맛보아야 할 터이다. 연개소문의 대승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사수전투:  민족기록화 [전쟁기념관 소장]
 
이렇듯 동맹군 소정방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신라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662년 정월에 신라의 객관에 머물고 있던 당 사신이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開府儀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김인문 등 아홉 장군과 함께 수레 2000여 대에 쌀 4000섬과 조(租) 2만2000여 섬을 군량을 싣고 가 평양의 소정방군에게 보급을 명하였다.
 
군량 보급을 요청하는 소정방의 전갈을 갖고 유덕민이 온 때가 문무왕이 남천주에 주둔할 때였으며, 당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한 때도 10월 말인데, 그러면 이 두 달 동안 신라 조정과 당의 사신 사이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리고 왜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무열왕의 승하를 조문하고 곧바로 문무왕의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신라의 군량 보급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 간에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문무왕은 남천주에 있을 때 유덕민의 요청이 있음에도 군량 보급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차 당 고종 사신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겨울철 군사 행동이 쉽지 않은 상황이고, 더욱 고구려군이 포진하고 있는 고구려의 남부 전선을 뚫고 평양까지 군량을 보급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셈이다.
 
신라 측에서는 당연히 군량 보급을 주저할 수밖에 없고, 당은 책봉을 무기로 문무왕을 압박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양국 간에 적잖은 승강이가 벌어졌고, 결국 신라의 군량 지원을 전제로 문무왕에 대한 책봉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정치적 협상은 끝나고, 실제 겨울철에 적진 깊숙이 평양까지 군량을 수송하는 힘겨운 일만이 남았다. 이 어려운 책무는 김유신 몫이었다. 김유신은 다시 한번 탁월한 군사전략가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이 군량 수송 작전은 당시 김유신에게도 감당하기 버거웠던 모양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김유신이 문무왕으로부터 군량 수송의 명령을 받고 나서 현고잠(懸鼓岑) 동굴 안 절에 가서 재계(齋戒)하고, 곧바로 불당에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향을 태우며 여러 낮밤을 지낸 후에 나왔다.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번 걸음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날 동안 김유신의 고뇌와 심사숙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겨울철에 무거운 군량을 싣고 고구려 영역 한복판으로 들어갔다가 최소한의 희생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을 찾았을 것이고, 그 핵심은 어떤 진격로를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국사기'에는 당시 김유신군의 진격로에 대해 제법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체적인 지명을 여기서 거론하지 않고, 그 대략을 보면 김유신군은 지금의 파주에서 임진강으로 건너 수안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이용하되, 고구려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蒜壤)이란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길을 현재로서는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당시 서울과 평양을 연결하는 교통로는 자비령로, 방원령로, 재령로 등 크게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자비령로는 서울-양주-파주-장단-개성-금천-평산-서흥-황주-평양으로 이어지고, 방원령로는 서울-양주-연천-삭녕-토산-신계-수안-연산-대동-평양으로 이어지며, 재령로는 서울-파주-개성-해주-신원-재령으로 이어진다. 이 길 중 재령로는 예성강과 임진강 하류 지역 등 강폭이 넓은 지역을 도하해야 하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한 편이었다. 자비령로는 고려~조선시대에 대표적인 간선로였다. 이 길에는 서흥의 대현산성, 평산의 태백산성 등 고구려 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반면에 방원령로는 산악지대를 관통하면서 우회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중세 이후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재령강 유역을 거치지 않고 임진강 유역과 대동강 유역을 직접 연결하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기동력을 극대화하는 군사작전에 있어서는 매우 유용한 교통로였다. 따라서 전쟁이 빈번하였던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68년에 신라군이 평양으로 진공할 때 이용한 진군로가 바로 방원령로와 자비령로였다.
 
이러한 교통로의 상황을 보면, 662년 1월에 김유신이 군량을 공급하려 평양으로 진격할 때 선택한 교통로는 황도 수안에 비정되는 장새(獐塞)를 경유한 것으로 보아 방원령로와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반적인 교통로보다는 좁고 험해서 고구려군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길을 선택한 듯하다. 어쨌든 김유신 군은 1월 23일 칠중하(임진강)를 건너 2월 1일에는 장새(황해도 수안)를 지났고, 2월 6일에 양오라는 곳에 이르러 당군에 군량을 전달하였다.
 
소정방의 당군은 비록 신라군으로부터 군량을 보급받았지만, 이미 평양성을 공격할 수 있는 전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임아상이 죽고 방효태 군이 사수전투에서 패몰한 직후였기 때문에 당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역시 애초에 군량 보급을 목적으로 진공한 부대이기 때문에 평양성 포위 공격을 지원할 전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에 소정방은 부랴부랴 철수를 서둘렀다. 그렇다고 바로 퇴각하지는 못한 듯하다. 3월 24일에 소정방군이 위도(葦島)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위도 전투는 바로 바닷길 출항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로 짐작된다.
 
소정방이 군량 보급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계속 평양성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던 이유는 바닷길 퇴로가 차단당한 상태였기 때문으로 전회에서 추정한 바 있다. 따라서 이때 소정방군이 신라군으로부터 군량을 보급받고 퇴각한 데에는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바닷길 봉쇄가 풀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군량을 수송했던 김양도가 거느린 신라군 800명도 바닷길로 귀국하였다고 한다. 사실 신라 김유신군이 군량 수송이 편한 바닷길이 아니라 험준한 육로를 이용한 점을 보면 당시 서해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당과 고구려 사이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음은 분명한데 전혀 기록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당군이 평양성 포위를 풀고 철수를 서두르는 상황에서, 고구려 영역 내로 깊숙이 진공한 김유신의 부대 역시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으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김유신 군 역시 매우 빠른 속도로 회군하였으며, 이를 뒤쫓는 고구려군을 임진강 일대에서 격파하였다. 이렇게 김유신의 군량 수송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군량 수송 작전이야말로 전략과 전술에 탁월한 김유신의 재능을 잘 보여주는 명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연개소문은 김유신의 신라군이 한겨울에 대규모 군량을 평양성 코앞에까지 수송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소정방의 당군을 완전히 궤멸시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수양제 백만 대군을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명성에 버금가는 전과가 연개소문에게 주어질 뻔했는데, 겨우 사수전투의 승리로 만족해야 했다. 소정방은 백제를 멸망시킨 공훈이 1년 만에 빛이 바래고 말았다. 김유신의 신출귀몰한 군량 수송 작전으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간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661~662년 평양성 전투의 최후 승자는 연개소문이나 소정방이 아니라 바로 김유신이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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