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70611.html


최첨단 부엽공법, 고대 동북아를 진보시키다

등록 :2018-11-16 19:23 수정 :2018-12-30 09:56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 ① 역사학과 자연과학의 융복합


7세기 오사카 사야마이케 저수지 제방, 흙 사이 나뭇잎 등 넣는 부엽공법

앞선 풍납토성·벽골제 기술과 똑같아, 낙랑 출신이 만든 안휘성 제방도 동일

고대 과학기술 전파와 교류 보여줘

우리민족제일주의 역사관 시대 지나, 매년 우리 땅 유적발굴만 1500건, 공학 등과 융합하고 시야도 넓혀야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풍납토성의 단면에 부엽층의 흔적이 뚜렷하다. 발굴 당시의 단면을 떼어 전시하고 있다. 풍납토성은 부엽공법뿐 아니라 회를 황토에 섞는 방식의 증토축성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권오영 교수


‘식민사학 대 민족사학’, ‘국뽕·환빠 대 친일·사대’라는 도식적인 구도로 한국 고대사를 해석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21세기의 한국 고대사는 우리의 조상들이 과거에 주변의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나름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는지를,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1년 동안에 이루어지는 유적 발굴조사 건수는 매년 1500~1800건 정도에 달한다. 출토되는 유물의 양은 짐작조차 어려울 정도이며, 새로운 빅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패가 좌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땅에서 발견된 자료로 하여금 우리 역사를 말하게 하려면 역사학적 방법론만으로는 금방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자연과학과 공학, 의학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방법론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 고대사에서도 융복합적 연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렸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도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넓어지게 되었다. 한반도만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고대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이 포함된 동북아시아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서 도출된 내용들은 ‘우리민족제일주의’와는 다른 모습을 띨 것이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외국 국적 주민의 수가 176만명을 넘어서서 전체 국민의 3.4%를 차지하고, 곧 다문화 가정의 인구수가 74만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현재의 역사 연구는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


과학실험으로 ‘증토축성’ 증명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이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군대는 기수와 말이 모두 철제 비늘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긴 쇠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 그리고 단병기로 무장한 보병으로 구성된 연합부대였다. 동북아시아 최강의 기계화 사단인 것이다. 꼬박 7일 동안 이어진 공성전 끝에 고구려 군대가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성문을 불태웠다.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백제의 개로왕은 기병 수십명을 거느리고 풍납토성을 탈출하여 남쪽에 있는 몽촌토성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고구려 군에게 생포되었고 결국 한강 건너 아차산으로 끌려가서 살해당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녀 8천명이 고구려에 포로로 끌려갔다. 죽음을 앞에 둔 개로왕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도림이라는 요승의 꾐에 빠져 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반성하였을 것이다.


이 비극이 일어나기 몇년 전, 바둑을 좋아하는 개로왕에게 바둑의 고수인 승려 도림이 접근하였다. 그는 순식간에 개로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고 국정에 깊숙이 간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림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고 잠입한 고구려의 고급 스파이였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유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권하였다. 이 말에 넘어간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증토축성”(烝土築城)하고 그 안에 각종 건물을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강에서 큰 돌을 캐서 무덤을 만들어 아버지의 유골을 장사하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가난해져서 국가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서 장수왕에게 보고하자 장수왕은 백제를 급습하였다.


도림의 사주에 의해 백제가 실시한 토목공사는 국고를 거덜낼 정도였는데, 그 기술은 증토축성이라고 표현되었다. 증토축성이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풀기 위하여 많은 역사학자가 도전하였다. 증토를 “흙을 찌다”라고 이해하고 판축(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서 단단하게 다져 담이나 성벽 등을 쌓는 일)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석하거나, “증”이란 글자에 “모으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많은 흙으로 쌓았다”는 해석도 나왔지만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연구실에서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외국의 사례를 비교하는 방법이 효율적이었다. 왜냐하면 개로왕의 증토축성 바로 직전에 대하(大夏)라는 나라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표현인 증토축성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13년 지금의 오르도스(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곡류하여 ? 모양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대하의 왕성을 축조하기 위해 10만명이 동원된 대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당시의 역사를 전하는 <진서>에서는 흉노족 출신인 대하의 왕, 혁련발발의 명령을 받은 기술관료 질간아리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적의 강력한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을 철옹성을 쌓기 위해 무자비하고 끔찍한 방법을 택하였다. 일정한 구간의 공사 책임자를 정하고, 감리하는 인물로 하여금 쇠송곳을 들고 공사 중인 성벽에 온 힘을 다하여 구멍을 뚫게 한 것이다. 2~3㎝ 정도 깊이로 구멍이 뚫리면 그 구간의 책임자를, 뚫리지 않으면 감리자를 성벽 안에 처넣어 죽이면서 공사를 진행하였다.


백제 풍납토성에 관한 표현인 ‘증토축성’이라는 말의 비밀은 통만성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서 풀렸다. 북방유목민족인 흉노의 나라인 대하가 5세기 초에 세운 통만성(중국 오르도스)의 흰색 성벽은 아직도 단단하게 서 있다. 권오영 교수


오사카 번영의 씨 뿌린 백제 기술자


그로부터 1500년의 세월이 흘러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질간아리가 쌓은 통만성을 발굴조사하였다. 질간아리의 끔찍한 방법이 효험이 있었던지 통만성은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었다. 중국의 학자들은 성벽의 흙을 채취하여 과학적인 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석회 성분이 인위적으로 섞여 있음이 밝혀졌다. 석회에 물과 황토를 섞어 버무리면 석회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열을 발산하는데, 그것이 마치 흙을 찌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증토축성의 비결은 석회에 물을 섞어 일종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2012년 필자는 증토축성의 문제를 오랫동안 추적해오던 고대 성곽 전문가인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과 함께 중국 산시성 위린시(섬서성 유림시) 인근에 위치한 통만성 조사에 나섰다. 황량한 오르도스 벌판에 우뚝 솟아 있는 하얀색의 통만성은 정말 장관이었다. 일반적인 토성과 달리 성벽이 흰색을 띠는 이유는 석회가 섞여 있기 때문임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성벽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하여 손으로 내려치면 손에 상처가 날 정도였다.


당시 필자는 고대 성곽의 축조기술을 과학적, 공학적으로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었다. 고고학자, 토목공학자, 역사교사, 과학교사와 함께 진행한 학제적 협업 연구 덕분에 역사학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답사에 동참하였던 고등학교 과학교사는 석회를 이용한 축성기술의 발열반응에 주목하여, 귀국하자마자 자신이 지도하던 과학반 학생들과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석회에 물을 부어서 일어나는 화학작용, 석회와 황토의 비율에 따른 강도의 차이를 멋지게 실험으로 증명해낸 것이다.


젊은 과학도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가지 실험을 더 하였다. 투명한 아크릴판으로 상자 여러개를 만들고 토목구조물의 통수성을 실험한 것이다. 나무 잎사귀를 전혀 넣지 않고 점토만으로 채워진 아크릴 상자, 잎사귀층과 점토를 교대로 쌓은 아크릴 상자에 같은 조건으로 물을 부으면서 내부에 스며든 물이 어느 정도 배수되는지를 비교한 것이다. 점토로만 쌓은 경우는 그 내부에 스며든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꿀렁꿀렁한 상태에 처하게 된 반면, 나뭇잎을 층층이 넣어준 상자는 그 층을 통하여 배수가 원활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아크릴 상자가 토성의 성벽, 제방의 제체(본체)라고 한다면 구조물의 안전성을 좌우하는 데에 잎사귀층의 존재 여부가 큰 영향을 끼침을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잎사귀층을 부엽층, 그리고 그 공법을 ‘부엽공법’이라고 부른다.


중국 오르도스 통만성 답사를 다녀온 고교의 과학반 학생들이 실험실에서 부엽층을 황토에 넣을 경우 배수가 잘돼 성벽이나 제방이 튼튼해진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권오영 교수


부엽공법은 토성, 제방, 선착장 등의 대규모 토목구조물을 만들 때 발휘된 고대의 최첨단 토목기술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김제 벽골제를 발굴조사할 때 최초로 그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당시에는 부엽공법이란 공법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1999년 서울 풍납토성의 성벽 절개조사 과정에서 부엽층이 확인되면서 부엽공법이 다시 주목되었다.


오사카에는 사야마이케(狹山池)라는 거대한 저수지가 있다. 주변의 논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리관개시설인데 그 혜택을 받는 몽리면적이 최대 17.9㎢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이다. 1988년부터 발굴조사가 실시되면서 부엽공법을 발휘하여 제체를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제체의 안팎으로 물을 흐르게 하는 목통도 발견되었는데, 그 벌채 연대가 616년임을 알게 되었다. 조사가 점차 진행되면서 이 제방의 축조가 백제계 기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음도 밝혀졌다. 이로부터 10년 뒤 풍납토성 성벽의 조사에서 부엽공법이 확인됨으로써 백제의 기술자들이 일본에 정착하여 수리관개시설의 확충에 종사하였음이 명백해진 것이다. 요도가와(淀川)와 이시카와(石川)라는 큰 강의 범람으로 사람이 살기 어렵던 오사카 일대를 현재와 같이 번화한 곳으로 만든 기초공사는 백제계 기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 오사카부의 사야마이케박물관은 7세기 초에 축성된 오사카의 저수지인 사야마이케의 제방을 두부처럼 떼 와서 전시하고 있다. 제방에도 부엽층의 흔적이 뚜렷하다. 권오영 교수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약사동(울산) 제방도 부엽공법으로 만들어졌다. 권오영 교수


국가 장벽 넘나든 고대 과학기술자


부엽공법이라면 왕경이란 인물을 빠뜨릴 수 없다. 그의 조상은 원래 중국의 산둥(산동)지방에 거주하다가 낙랑으로 이주하였는데 대대로 과학기술자 집안이었다. 기원후 1세기 초 무렵 왕경은 지금의 안후이(안휘)성 일대인 여강 태수로 복귀하여 작피(芍陂)라는 거대한 제방을 수리하여 수해를 막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작피는 현재 안풍당이라고 불리는데 발굴조사 결과 부엽공법이 발휘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왕경과 풍납토성, 그리고 사야마이케를 통하여 최고의 과학기술자가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부엽공법은 풍납토성에서 벽골제를 거쳐 가야와 신라, 그리고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고대 동북아시아 수리관개시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착취하는 상징물이 아니라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주는 농업유산이란 측면에서 안풍당과 벽골제, 그리고 사야마이케를 연속유산의 형태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 중이다.


황남대총과 풍납토성, 벽골제나 의림지 같은 거대 토목구조물 앞에서 증토축성이나 부엽공법 등 성 쌓는 방법이나 그 과학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강사나 해설사를 만나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대의 토목구조물은 역사교육의 중요한 소재이면서 동시에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우리의 역사, 문화재 연구와 교육이 인문학적인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과학과 공학의 도움을 받을 경우 종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다. 나아가 한반도를 벗어나 외국의 유사 유적과 비교할 때, 한국 전통 과학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역사 연구와 교육은 문헌에 고고학적 자료를 더하고, 여기에 자연과학과 공학적 분석을 추가하면서, 주변 지역과 비교하여야 함을 말해준다. 이렇게 세월은 바뀌고 있다.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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