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19406


'자유시참변'처럼 참변 당한 기록 없을 것

자유시참변 99주년에 즈음해... 비극적인 사건에서 희망을 본다

20.03.07 21:10 l 최종 업데이트 20.03.07 21:10 l 이옥희 (news)


▲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일본 예찬론자, 백작 이완용이 아직도 퍼렇게 살아 있다. 한국의 독립과 함께 반민특위의 역사적인 재판을 받고 해소되어야할 친일파 집단이 이승만의 야욕으로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그 후손들은 독재정권과 손을 잡아 전열을 재정비하고 지금도 역사를 욕보이며 자신들의 아성을 영구히 지키고자 국민들을 볼모삼아 보이지 않는 친일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 후예들이 자유당 시절 학문 권력을 틀어잡고 시도한 역사 왜곡이 오늘도 우리 눈앞에 이념전쟁으로 펼쳐지고 있다. 친일파가 만든 이념 전쟁으로서의 역사 전쟁이 속히 극복되기를 기원하며 자유시참변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로서 희생된 우리 무명의 독립군 용사들에게 자유시참변 99년째 되는 해에 뜨거운 눈물과 감사를 담아 이 글을 바친다.


양반 관료가 아닌 상놈들이 생명 바친 독립운동


자유시참변이 있기까지 간도와 연해주가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다. 왜 간도와 연해주가 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다!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다! 알고도 주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주목하면 고민해야 하고 고민하게 되면 쉽게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1860년대 조선 양반∙관리들의 탐학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살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도망친 빈민, 소작농, 천민들의 대대적인 탈출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그로써 조선 멸망의 참되고 구체적인 원인, 양반∙사대부∙관료들의 죄악상이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21년까지 간도와 연해주에서 진행된 독립운동은 바로 조선을 탈출한 사람들의 운동이었고 그 상놈들의 저항이었다. 그 상놈들이 피땀 흘려 바친 애국금이 무기가 되었고 그 상놈들이 낳은 자식들이 독립군이 되었다. 그 상놈들의 고난과 헌신으로 용정의 3∙13만세시위, 훈춘의 3∙20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그 후에 만주일대에 30여 개에 달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그 결과로 수많은 국내진공작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가 일어난 것이지, 을사조약이나 한일늑탈, 3∙1독립만세 운동 전후에 들어온 몇몇 양반, 관리들과 무관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간도와 연해주의 무장투쟁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사 기록은 그 사실에 일체 침묵하며 그 상놈들의 생명 바친 독립운동을 뜻이 있어서 가산을 정리해서 망명했다고 하는 양반∙관료, 무관 등등 몇몇 사람들의 독립운동으로 축소해서 정리해 버렸다.


독립운동의 첫 장을 연 그 상놈들은 연해주 4월 참변과 10월에 시작된 간도 참변으로 도륙을 당했다. 그리고 자유시참변을 기점으로 해서 독립운동의 무게 중심이 상해로 옮겨졌다. 이로써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망명 양반∙관료 중심, 기호파 중심의 상해 독립운동의 외교론자들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다.

  

자유시참변을 끝으로 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이 영영 사라졌는가? 아니다! 독립운동은 더 치열하게 일어났다. 문제는 그 땅이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에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이승만 정권 아래서 상해임시정부 민족주의자 계열의 독립운동만 취사선택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그 나머지는 배제되거나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인 사정으로 우리 독립운동사 중에 자유시참변처럼 참변을 당하고 있는 기록도 없을 것이다. 팩트에 대한 연구나 고민 없이 후대에 형성된 낡은 이념의 틀로 판단하고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우리민족의 당파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혀져서 민족성에 대하여 절망하며 정치에 무관심하고 부정적인 국민정서를 형성하기도 한다.


내년이면 자유시참변 100주년이 된다. 색깔논쟁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닫힌 미래를 열고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하여 과연 자유시참변은 왜 일어났으며 무엇이며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미래의 시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같은 독립군끼리 총질


자유시참변은 외형적으로는 1921년 6월 28일,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간도와 연해주에서 자유시로 모인 1,900여 명의 한인무장부대의 지휘권을 다투는 중에 볼셰비키 적군과 한인자유보병대대가 불복하는 군인들의 무장해제를 감행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사의 최대 참변으로 <독립신문>은 사망 36명, 도망 37명, 포로 900명으로 발표하였다. 같은 독립군끼리 총질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오늘까지도 성토해 마지않는다.


당시 상해파를 지지하던 재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살 72명, 익사 37명, 탈진해서 죽은 자 200여 명, 행방불명 250명, 체포 917명이라고 발표하였다.


자유시참변에 대하여 당시 이르쿠츠크파는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군권쟁탈전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은 대한의용군 사령부와 고려혁명군정회에 있으나 직접적인 책임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선동한 대한의용군측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상해파는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이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것은 상해파와 극동공화국 내 한인부의 노력이었는데 대한국민의회가 이르쿠츠크 공산당과 결합하여 군권 장악하고자 군정의회를 조직하여 유혈사태를 일으켰으므로 책임이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에 있다 '고 주장하였다.


이렇듯이 자유시참변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사건해석과 평가가 다르지만 참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양파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하여 극동공화국 한인부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동원하며 극단적인 대립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양파 모두에 책임이 있다.


자유시참변의 주범은 한인무장부대들을 자유시로 집결시킨 자들이다. 그들을 자유시로 집결하게 만든 세 그룹이 있다.


첫 그룹은 극동공화국이다. 극동공화국 대통령 크라스노쇼코프는 소비에트정부를 대신하여 연해주에 있는 일본군 철수를 위해 협상을 진행시키는 중이었다. 그는 신생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성공을 위협하는 일본군의 철병을 위해 한인부대를 빠른 시간 내 집결시켜서 무장해제를 단행해야 했다. 이것은 적군과 함께 일본인들 대량학살에 참여하여 니콜라옙스크참변을 일으킨 한인무장부대에 대한 일본의 단호한 요구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명정부의 안전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모스크바의 뜻이기도 하였다.


둘째 그룹은 상해파로 불리는 한인사회당 그룹이다. 그들은 임정에서 탈퇴한 이후로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코민테른에 한국의 유일한 공산당으로 인정받기 위해 총력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유시참변에 대한 성토문에서 4000여 명의 독립군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극동공화국 한인부와 한인사회당의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노선에서 무장투쟁론자인 그들은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한인부대 지휘권 쟁탈의 초강수를 두어 같은 독립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유시참변을 일으켰다. 이들 배후에는 러시아 극동공화국 한인부와 극동공화국이 있었다.


셋째 그룹은 이르쿠츠크파와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보병대대이다. 문창범은 청산리전투 이후, 해산된 독립군들에게 자유시로 결집할 것을 촉구하였고 오하묵은 이만에서 부대들과 만나 그들을 설득하여 무장해제를 시킨 후에 자유시로 인도했다. 이르쿠츠크파는 부르주아 상해임정과 협력하고 모스크바자금을 사사롭게 착복한 기회주의자인 상해파에 전로 한인공산당 지도권을 내줄 수 없었다. 그들 배후에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있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한인무장부대를 자유시로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상해임시정부에 자파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약속대로 임시의정원을 해체하지 않았고 항의하는 대한국민의회의 의견을 묵살하고 협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주도권 싸움을 야기하였으며 임정의 고질적인 분열의 단초를 만들었다.


또한 양반∙관료의 습관으로 독립군들에게 임정 봉대를 요청하였으면서 위기에 빠진 독립군들을 위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고 그들이 러시아로 떠나도록 만든 것이 그들의 큰 죄다.


당시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들의 무장해제는 일본의 압력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부대끼리 최소한 인명 살상은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파국으로 치달으며 수많은 청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관료적인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동북아 정세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부족했으며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역학관계에 무지하였고, 조국독립이라는 대의를 잊고 독립군끼리 경쟁하며 탐욕적인 파벌싸움에 주도하였고, 독립운동이야 어찌되든지 간에 자기파의 권력 강화를 위해 외국세력과 손을 잡고 동족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청년들이 죽어가며 이루고자 했던 건 조국 독립


자유시참변이 동족상잔의 비극이요, 한국독립운동계를 좌우로 분열시킨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참변의 이름으로 더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불신, 선입관과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자유시참변의 권력다툼은 지도자들이 벌인 게임이었고 참변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에서, 서북간도에서 일본군과 생명 걸고 싸우던 청년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1860년대 부패한 양반∙관료들의 등쌀에 고향산천을 등져야 했던 가난한 천민과 소작인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러나 그 청년들이 독립전쟁 일선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이 "조국 독립"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유시참변에서 희망을 본다.


그들은 자유시 하늘 아래서 몸뚱이로 조국광복의 불을 밝힌 촛불들이었다. 독립운동사에 이름 석 자 없는 숱한 무명의 상놈투사들이 있어서 우리의 하늘이 어둡지 않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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