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16416
'이명박의 친구'가 만든 조직, 지금 포털서 검색하면...
[한국의 보수단체들 3] 뉴라이트전국연합의 등장과 쇠퇴
20.03.10 08:20 l 최종 업데이트 20.03.10 08:20 l 김종성(qqqkim2000)
예전에는 '전국연합'하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떠올랐다. 이후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뒤엉켜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앞의 전국연합은 1991년 이후 민주·진보 진영을 이끌다가 2006년에 한국진보연대로 대체된 단체이고,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보수파로 전향한 운동권 출신들의 결집체로 노무현 정권 후반기와 이명박 정권 때 뉴라이트(신우익)를 대표했던 단체 중 하나다.
▲ 뉴라이트전국연합에서 활동한 김진홍, 류석춘, 주옥순 ⓒ 오마이뉴스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5년 11월 7일 창립된 뉴라이트전국연합(이하 뉴전연)의 간판 인물은 김진홍 목사다. 1941년 경북 청송에서 출생한 뒤 박정희 정권 때 예수교 장로회 전도사로서 활빈교회를 세우고 반정부 투쟁을 했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투옥된 인물이다. 최근에는 전광훈 목사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광화문 집회에도 가끔 모습을 드러낸다.
뉴전연과 연상되는 또 다른 인물은 류석춘 연세대학교 교수다. 공동대표를 역임한 그는 2019년 9월 19일 수업 때 일본군 성노예를 매춘부에 빗대는 발언을 해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아베 수상님'에 대해 사죄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주옥순 대한민국엄마부대 대표도 뉴전연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19년 8월 1일, 옛 일본대사관 앞 집회에서 그는 "아베 수상님, 지도자가 무력해서, 무지해서 한일관계의 모든 것을 파괴한 것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라며 속죄의 변을 읊었다.
2019년 9월 6일 조국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 때 "아버지는 위선, 어머니는 청탁과 반칙의 제조기, 딸은 거짓말"이라며 조국 일가를 맹공격했다가, 몇 시간 뒤인 9월 7일 새벽 1시경 아들이 음주 교통사고에 더해 운전자 바꿔치기 시도 의혹까지 받는 바람에 고개를 들 수 없게 된 미래통합당 장제원 의원도 부산 뉴전연 공동대표 출신이다.
뉴라이트의 등장
▲ 뉴라이트 전국연합 창립대회 ⓒ 권우성
뉴전연은 최초의 뉴라이트 단체가 아니다. 뉴전연보다 1년 전인 2004년 11월 23일 자유주의연대가 뉴라이트 운동을 처음 시작했다. 이후 교과서포럼·뉴라이트싱크넷·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료와사회포럼·시민들과함께하는변호사모임·한국기독교개혁운동·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등이 속속 출현했다. 뉴라이트재단은 전국연합 출범 7개월 뒤인 2006년 6월에 등장했다.
신우익은 미국에서는 '네오콘(neocons)'으로, 일본에서는 '신우요쿠(新右翼)'로 불린다. 뉴라이트는 이것들과 같은 의미다. 뉴라이트로 불리게 된 계기에 관해 2008년 9월호 <신동아> 기사 '자만·과욕·혼돈 신(新)권력 뉴라이트'는 "한기홍 뉴라이트재단 상임이사에 따르면 뉴라이트란 명칭은 이동관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장(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최홍재씨와 함께 술자리에서 만들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생긴 뉴라이트란 표현을 뉴전연 설립자들이 조직 명칭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뉴전연은 같은 시기에 등장한 동종 단체 중에서 가장 큰 두각을 보였고, 자유주의연대와 더불어 뉴라이트의 한 축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내세운 최고 이념은 '자유주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계화를 외치며 등장한 자유주의의 업그레이드판인 '신자유주의'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재벌기업 친화적인 신자유주의와 다르지 않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에서 "자유주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개인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권리를 존중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두 축으로 하여 성립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말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적 강자인 재벌기업에 유리한 논리다. 경제적 약자의 자유와 경제적 강자의 자유가 충돌하면 약자의 자유는 약자의 굴종으로 변모한다. 약자와 강자의 자유경쟁은 결국 약자의 굴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창립선언문에 '두레·품앗이·계 같은 공동체주의로 자유주의를 보완하겠노'라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공동체 자유주의는 시장이라는 자원배분 기제의 효율성을 믿는다"고 선언했다. 시장 기능을 통해 공동체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공동체주의로 시장 기능을 보완하겠다고 선언해 놓고, 시장 기능을 통해 공동체주의를 실현하겠다고 말하는 모순을 범한 것이다.
약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보호를 받으려면, 국가 같은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시장의 기제' 즉 시장주의 시스템인 자유경쟁에 의해 약자들이 보호받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주의가 사실상 무의미해지게 된다.
이는 뉴라이트의 이념이 실상 '올드라이트'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뉴'를 떼고 '라이트전국연합'으로 불러도 됐던 것이다.
뉴라이트는 '이명박 당선'을 위해 존재했다
뉴전연을 포함한 뉴라이트 단체들이 2005년을 전후에 대거 등장한 것은, 1997년 대선에 이어 2002년 대선에도 패배한 데 따른 보수세력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창립선언문에서 뉴전연은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연이은 좌파의 집권으로 대한민국의 우파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왔다"고 한 뒤 "언제까지 우파는 지난 60년간 피땀 흘려 이룩한 눈부신 성과를 좌파에게 강탈 당한 채 침묵해야 하는가"라고 탄식했다.
선언문에서 말한 '피땀 흘린 우파'는 올드라이트를 말한다. 올드라이트가 상실한 권력을 운동권 출신인 자신들이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선언문에도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의 긍정적 유산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라는 문구가 있다.
뉴전연의 출현은 어느 정도는 신선했다. 낡은 보수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보수의 시대가 도래할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기대감은 이들의 급성장으로 연결됐다. 위 <신동아> 기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대중 조직화를 추구한 결과 2년여 만에 회원을 17만 명으로 늘렸다"며 "전국 시·군·구에 200여 개 조직을 건설했고, 종교·교사·기업인·문화체육·노동·의사·학부모·대학생 등 17개 부문조직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 지난 2007년 11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뉴라이트전국연합 창립 2주년 기념행사에서 인사말을 마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오른쪽)가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과 함께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런 성과로부터 최고의 수혜를 누린 인물이 있다. 김진홍과 동갑내기 친구이며 1980년대부터 교회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2007년 대선을 2년 앞두고 출범한 뉴전연은 이명박과 손잡았고, 대선 직전인 2007년 11월 28일에는 공식적인 지지 천명까지 했다. 뉴전연을 비롯한 뉴라이트 단체들의 후원이 이명박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승리를 계기로 뉴전연 구성원들 일부는 정치권에 진입했다. 일례로 제성호 공동상임대표는 외교통상부 인권대사가 되고, 이석연 변호사는 법제처장이 되고, 박영모 조직국장과 한오섭 기획실장은 청와대 행정관이 됐다. 장제원 부산연합 공동대표 등은 2012년 18대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그런데 이명박의 대선 승리는 결과적으로 뉴전연의 쇠퇴를 초래했다. 10년 만의 정권 탈환을 이룬 뒤, 뉴전연은 목표를 상실한 배처럼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2008~2013년) 후반기에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공식 해체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식물조직 상태가 되고 말았다. 뉴전연의 최대 목표가 이명박 당선이고 이를 계기로 쇠퇴했으니, 결과적으로 이 단체의 최고 수혜자는 이명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 단체가 처음부터 이명박 선거운동 조직으로 출발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 뉴전연에 몸담았던 장재완 전 청년연합 상임대표도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인 2008년 2월 23일 <한국논단>과 가진 인터뷰에서 장재완은 "이 뉴라이트라는 이름의 뜻은 개혁적 보수다, 건강한 보수를 외치고 있으나 처음 뉴라이트를 만들기 전 이미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뉴전연은) 이명박씨의 위장된 선거사무소였다. 왜냐하면 거기 구성원들이 지금도 저 빼놓고는 전부 MB 쪽에 가 있지 않습니까?"
뉴전연의 태생이 이명박과 불가분이었다는 점은 설립자 김진홍의 입으로도 증명됐다. 대선 승리 직후인 2007년 12월 25일 자 <중앙일보> 기사 '이명박이란 대통령감 있어 2년 전 뉴라이트 운동 시작'을 보면, 김진홍은 "이명박이란 좋은 대통령감이 있어 2005년 6월 뉴라이트 운동을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뉴전연 출범 5개월 전부터 이명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김진홍은 "뉴라이트 태동기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개혁보수세력이 집권하는 데 기여하자는 그림을 그렸다"고 덧붙였다.
이명박 당선을 위해 활동한 단체이니 당선 뒤에 방향감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것은 당연했다. 신자유주의 등을 둘러싼 이념논쟁은 처음부터 부차적인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대 현실과 맞지 않았던 이념
뉴전연의 쇠퇴를 초래한 요인들은 더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들의 이념 자체가 시대 현실에 맞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고 국민통합이 이완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경도돼 있었다. 공동체주의를 내세우긴 했지만 공허했다. 시대의 요구를 충족할 만한 콘텐츠가 없어 장기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국민행동본부와 뉴라이트전국연합회원들이 2008년 6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 본사 앞에서 "광우병선동방송 MBC 규탄" 집회에서 광우병 조작 보도하는 MBC 규탄의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운동방식의 모순도 크게 작용했다. 한국의 보수단체들은 전통적으로 관변단체였다. 한국반공연맹과 그 후신인 자유총연맹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은 국가의 감독과 재정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이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지원 덕분이었다. "이 련맹(연맹)이 아니면 한국반공련맹(한국반공연맹) 또는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라는 한국반공연맹법 제7조에서 느낄 수 있듯이, 국가는 소소한 문제에서까지 보수단체들을 보호했다.
그런 환경에 익숙해 있는 올드라이트를 지도하겠다며 나선 이들이 바로 운동권 출신 뉴라이트들이다. 뉴라이트들은 올드라이트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 운동권 환경에서 성장한 지도부가 관변단체 방식에 익숙한 보수파 지지자들을 이끌어가는 구조였으니, 단체의 생명력이 오래갈 수 없었다.
2008년에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하고 이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퇴조하기 시작한 것도 뉴라이트들의 활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더욱 중시되는 상황에서 재벌기업 친화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이 설 자리는 그리 넓지 않았다.
김진홍 1인의 리더십에 과도하게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 2009년 4월 상임의장을 사임한 김진홍이 구원투수로 다시 불려 나가 2010년 6월 상임의장에 재취임했다가 2011년에 물러난 뒤로 조직이 급속히 쇠퇴했다는 것은 이 조직이 '이명박의 친구'에게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한계들로 인해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심히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용두사미란 말을 생각나게 하는 상황이다.
네이버 인물정보에서 '정형근'을 검색하면, 전직 국정원 차장이자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정형근의 웃음기 띤 얼굴과 함께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이란 직책이 나온다. 용두사미처럼 형해화돼버린 이 조직이 '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형근 같은 인물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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