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post.co.kr/news/10874


소수의 의견도 들어야
훌류한 지도자는 다수의 의견속에서도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임동주 서울대 교수 (발행일: 2009/10/13 22:24:00)  

서기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 12년이었다. 당시 연나라 시조 모용황은 중국 도모에 앞서 고구려를 제압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모용황은 중국을 치려고 도성을 비울 때 고구려가 뒤통수를 칠까 우려했던 것이다. 고구려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북쪽 길과 남쪽 길이 그것이다. 한 신하가 모용황에게 권했다. 

“고구려로 가는 북쪽 길은 평활하여 왕래가 쉬운 반면 남쪽 길은 길이 좁고 험합니다. 고구려는 분명 우리가 북쪽 길로 오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노리고 약간의 군사만 북쪽 길로 보내어 고구려군의 눈을 속이고 주력군을 남쪽 길로 보내면 아무런 저항 없이 도성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모용황은 그 계책대로 정예병을 이끌고 남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한편 고국원왕은 연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 넓은 북쪽 길로 오리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대사자 아불화도가가 혼자 이견(異見)을 제시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쪽 길로 올 수도 있습니다.” 
”싸우러 오는 놈들이 무엇이 무서워 좋은 북쪽 길을 마다하겠소.“ 
“모용황은 간계(奸計)가 뛰어난 자이옵니다. 우리가 연군이 넓은 길로 오리라 생각하고 북쪽 길을 방비할 것을 노리고 비어있는 남쪽 길로 올 수도 있사옵니다. 그러니 남쪽 길도 방어해야 합니다. 저에게 1만의 군사만 주시면 제가 남쪽 길로 가서 저들을 막겠습니다.” 

고국원왕과 대신들은 가뜩이나 군사의 수에서 밀리는데 군사를 분산시키는 것이 탐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불화도가는 유명한 지장(智將)으로 대소신려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왕은 아불화도가에게 늙고 병약한 군사 5천을 내주고 정예병을 북쪽으로 보냈다. 아불화도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군소리 없이 군사를 끌고 남쪽 길목인 하곡으로 갔다. 

모용황이 주력군을 이끌고 남쪽 길로 진군해 하곡에 이르러 보니 고구려 군사들이 목책을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용황이 크게 놀랐다. 

“고구려군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우리의 계책이 탄로 난 것이 아니냐.” 
“첩보에 의하면 고구려 주력군은 북쪽 길로 갔다 하옵니다. 아마도 소수만이 이곳에 왔을 겁니다.” 

모용황은 당장 군사를 시켜 싸움을 걸어 고구려군의 실상을 파악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 군사들은 늙고 약했다. 아무리 아불화도가가 맹장이라 한들 병약한 5천의 군사로 연나라 대군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결국 고구려 군은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거칠 것이 없는 연군은 곧 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갔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도성도 함락되고 선왕인 미천왕 시신도 도굴 당했다. 이어 태후와 왕후도 연나라로 끌려가는 기막힌 일을 당하게 된다. 

나중에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이 나서서 연나라를 쳐서 치욕을 갚았지만 동명성왕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래 최악의 수모였다. 자고로 대다수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해도 항상 소수의 의견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도 미래의 일을 100% 예측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서울대학교 교수, 우리나라삼국지 저자 (임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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