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menuCnt=30917&writeDate=20121024&kindSeq=1&writeDateChk=20120404
<64>요동성 함락
남풍 불더니 ‘불길<不吉>’ 唐 불화살 공격 요동성 온통 ‘불길’
2012.04.04
북쪽의 건조하고 찬 고기압이 남쪽의 습한 저기압을 몰아낸 날이었다. 황제가 지른 불이 요동성 내의 고구려인들을 삼켰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갑신일(645년 5월 17일을 의미) 남풍이 급하게 불자 황상은 정예 군사를 파견하여 충간의 끝에 오르게 하여 그 서남쪽에 있는 누각에 불을 지르게 하니 불꽃이 성안을 다 태웠다.” 불은 남쪽에서 시작돼 북쪽으로 번져나갔다. 차가운 비가 내린 후 기상이 탁 트인 상태에서 불어온 건조한 강풍은 화재를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켰다. 파괴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화재의 특성은 높은 온도로 가열되어 발생한 가연성 가스가 바람을 따라 이동하며 그 뒤를 이어 불길이 퍼져나가는 것이다.
기상이 전세 완전 뒤집어 고구려인 1만여 명 숨져
당군의 다음 목표였던 백암성 성벽이다. 645년 5월 17일 요동성에 대화재가 났던 날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백암성을 지키던 고구려 병사들이 그 화염을 목격했으리라.
2011년 공산성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갑옷의 조각들. 요동성을 공격한 당나라 군대는 백제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당군이 입은 갑옷도 이것과 비슷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 평남 순천시 용봉리에 있는 고구려 때의 벽화 고분에 남아있는 요동성 평면도.
불길이 사찰·관청과 같은 거대한 목조 건물들에 닿자 회오리바람 같은 불기둥이 일어났고, 불길은 내성과 외성을 갈라놓는 성내의 성벽에 닿았을 때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그 위의 목조누각에 옮겨 붙어 벽을 넘었으리라. 불길을 피해 파괴되지 않은 남쪽 석재 성벽 부분으로 많은 사람이 기어 올라갔고, 성벽에 올라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것을 바라만 볼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길이 일어난 내부에서 폭풍이 일어났으며, 화마의 한가운데서 고구려 병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물통을 들고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노력은 한 줄기 오줌에 불과 했으리라. 고구려 역사상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타서 죽은 적이 없었다. ‘신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불길이 성(城) 내부로 번져 집들이 거의 다 타고 불에 타 죽은 사람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지옥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이 품은 사적 원한을 풀 기회를 포착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자행한 하극상이 ‘책부원구’에 기록돼 있다.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부하들에게 맞아죽었다. 장사는 이로부터 250년 전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군부의 역할이 강화됨에 따라 두어진 장사ㆍ사마(司馬)ㆍ참군(參軍) 가운데 하나로서 요동성의 고위 군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그의 부하에 대한 미담도 전한다. 군리(郡吏)인 성사(省事)가 요동성 불길 속에서 그 가족들을 탈출시켜 당시 고구려 수중에 있던 백암성으로 피신시켰다는 것이다. 기구한 사연은 보름 후 백암성이 함락됐을 때 그들이 당태종에게 사로잡혔기에 기록에 남았다.
군인들의 기강도 일부 무너졌고, 저항의 의지도 한풀 꺾였다. 성벽에서 당군을 향해 쏟아져 나오던 화살과 돌의 흐름도 느려졌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아직 많았다. 그들은 당군의 포로로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치욕이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자들이다. 당나라군이 밀려오자 그들은 남은 힘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싸움의 결과를 ‘신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당군 사졸들이 성벽에 오르자 고구려 군대가 방패를 들고 창으로 찌르며 저항했다. 석포에서 발사된 투석(投石)이 비처럼 쏟아지면서 성이 드디어 무너졌다. 여기서 군사 1만과 호구 4만 명을 포로로 잡고 군량 50만 석을 노획하고 그 땅을 요주(遼州)라 하였다.”
패배하고도 살아남은 고구려인들은 치욕을 당했다. ‘책부원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성루의 성가퀴가 불타고(焚其樓雉) 남은 불기운이 있는 가운데(竝爲?燼), 성이 함락돼 포로가 된 병사들(合城男子)은 군문 앞에서 ‘면박’을 당했다(面縛軍門). 그 가운데 간부들을 골라냈다(取彼渠魁). 그리고 취조를 위해 법무담당관에게 넘겨졌다(屬之司敗).”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묶여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앞으로 쳐드는 ‘면박’을 당한 1만 명의 고구려군인들이 당나라 군문(軍門)을 지나갔다. 그들의 관등성명과 계급이 일일이 기록됐다. 장군급이나 고위군관들이 색출됐다. 그들은 엄격한 취조를 당했다. 당군은 이어 공격할 백암성은 물론이고 안시성의 현 상태에 대한 근거 있는 고급정보들을 캐냈으리라.
요동성 전투에 대한 당태종의 솔직한 고백을 ‘책부원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잡아 도적(寇 : 요동성의 고구려 사람을 지칭)을 하루아침에 쓸어버렸다.” 하마터면 당태종은 고구려의 문턱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어마어마한 희생을 내고 나서야 요동성을 함락했다. 결코 함락되지 않을 것 같던 성의 함락에 당태종은 감격했다. ‘책부원구’는 그것을 이렇게 전한다. “임시로 세운 종묘에서 조상들에게 감사를 올리며 승리를 그윽하게 고했다. 같은 마음으로 힘을 모아 이 같은 큰 공적을 이루었도다. 어찌 짐 한 사람이 홀로 능히 이 같은 일을 이루었겠는가? 지금 이에 이겼으니, 하늘을 덮을 만큼의 경사로다.”
645년 5월 17일 당태종은 승리의 봉화 불을 지피라고 명령했다. 요동성 앞 당군의 봉화대에 연기가 올라갔다. ‘신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당초 태종이 태자가 있는 곳(定州)에서 요동행재소(요동성)까지 삼십 리 간격으로 봉화를 설치하고 요동성이 함락되는 대로 봉화를 들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이날에 봉화를 들어서 정주(定州: 현 하북성 보정)로 들여보냈다.” 요동성 부근 봉화대에서 올라간 연기 기둥은 요택을 건너 정주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올라갔고, 고구려의 정예군 1만과 성민 4만이 줄줄이 묶여 요택을 건넜으리라.
요동성 전투는 기상이 전투의 전세를 완전히 뒤바꾼 하나의 사례다. 만주 벌판 한가운데의 바람을 탄 화재의 거대한 불기둥은 수백 리 밖에서도 훤히 보였고, 인접한 백암성 사람들은 미래를 직감했으리라. 산성의 꼭대기에서 지평선 너머로 불꽃이 점점 커지며 하늘을 덮었을 것이다. 그날 요동성에 꽃이 피었다.
백제의 갑옷
요동성을 공격할 당시 당나라 군대는 백제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신당서의 고구려전을 보면 “이때에 백제가 금휴개를 바치고, 또 현금(玄金)으로 산오문개(山五文鎧)를 만들어 보내와 사졸들이 그것을 입고 종군했다. 태종과 이적의 군사가 모이니 갑옷이 햇빛에 번쩍거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2011년 10월 공주 공산성 저수시설의 펄층에서 갑옷이 발굴됐다. 천 편에 달하는 갑옷 조각들의 표면엔 0.4㎜가 넘는 칠(漆)이 덮여 있다. 갑옷의 가슴 부위에 붉은색 명문이 있다. “정관 19년 4월 21일 왕무감 대구전○○서○○ 이○은○(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王武監大口典○○緖李○銀○)” 정관 19년이면 645년 4월 21일에 제작된 것에 해당한다. 혹 이 갑옷이 옛 문헌에 기록된 백제 갑옷인 ‘명광개’(明光鎧)일 수도 있다. 명광개란 황칠(黃漆)을 한 갑옷으로 광채가 난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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