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menuCnt=30917&writeDate=20121024&kindSeq=1&writeDateChk=20120418

<65>백암성 전투
성주 ‘공포’ 떨었지만 군사들 ‘결사’ 떨쳤다
2012.04.18

645년 5월 17일 요동성을 함락한 후 당나라 병사들은 휴식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당 태종이 갓 점령한 요동성을 고구려전선의 총사령부로 재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잿더미가 된 요동성과 그 주변을 청소해야 했고, 사령부로 쓸 가건물도 세워야 했다. 타서 죽은 요동성 사람 1만 명의 시신도 치워야 했고, 해자에 뒹구는 수많은 동료들의 뼈도 수습해야 했을 것이다. 근 보름에 해당하는 그 시간 동안 태종과 그의 장군들은 행정적 문제로 바빴다. 요동성에서 50만 석이나 되는 양곡을 노획했다. 그것을 새로 만든 창고로 옮기고 정리해서 앞으로의 전쟁 때 적재적소에 보급하기 위한 물류정리를 해야 했다. 노획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쇠뇌로 돌궐 왕족 저격 당나라 기병 운영 치명타 가해

백암성의 치. 고구려의 성 중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간직돼 있는 성이다.  필자제공
  
당군에 대항한 요동성의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했다. 그들을 포박해 명부를 만들고 신문하고 정연하게 편제하는 작업에 시간이 걸렸다. 많은 동료를 잃은 당군들은 그들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들은 요동성이란 거대한 화분에서 뿌리가 뽑혀 당으로 옮겨 심을 무력한 묘목들이 됐다. ‘구당서’ 고려전은 “요동성이 함락될 때 저항하다가 사로잡힌 1만4000명을 노비(奴婢)로 만들어 유주(幽州 : 북경지방)로 보내 당군에게 분배하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성의 함락과 그 성민 처리에 관한 소문은 금방 퍼졌다. 요동성에서 동쪽으로 태자하(太子河)를 따라 20㎞정도 위쪽 강가에 위치한 백암성(白巖城)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자가 있었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 믿었던 성주 손벌음(孫伐音)은 혼자 머리를 마구 돌리고 있었다. 

방비를 위해 움직이는 부하들이나 성민들과 함께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일신의 안위가 보장될까 생각하고 있었다. 무능한 지휘관의 전형이었다. 부하들도 그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고, 그가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이라고 믿지 않았다. 

백암성은 요동평원에서 평양성으로 향하는 최단거리에 위치한 요새였다. 당군이 침공해 올 것이 확실했다. 손벌음은 부하들에게 요동성을 함락한 당군과의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뜻을 은연중 내비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노골적으로 하지는 못했어도 암묵적으로 설득을 했다. 하지만 백암성이 삶의 터전인 부하들은 그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러설 곳도 없는 그들은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손벌음은 무능했지만 꾀가 많고 동작이 빨랐다. 그는 요동성이 함락된 직후 당 태종에게 사람을 보냈다.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 당 태종에게 호재였다. 백암성이 그냥 굴러들어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만사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연개소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오골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 1만을 백암성으로 보냈다. 

5월 28일 요동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도 백암성을 향해 출발했다. 다음날 아침 아사나사마(阿史那思摩)가 이끄는 당 휘하의 돌궐기병이 백암성 앞에 나타났다. 성주 손벌음이 ‘밀약’한 대로 성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뭔가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 감지됐다. 

오골성에서 원군이 온다는 소식은 백암성 내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듯했다. 사기가 충천한 고구려인들의 기세가 느껴질 정도였다. ‘책부원구’는 백암성과 그 위에서 당에 이끌려 온 돌궐기병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고구려인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흉도(兇徒)가 성의 담에 올라 잇따라 막아 지키었다. 산에 잇닿아 성 얽어 만들었는데 그 위에 뜬구름을 바라보인다. 계곡의 시냇물을 끌어다 해자와 통하게 하고 아래로는 햇볕이 없는 깊은 곳에 임하였다. 요사스러운 기운이 고슴도치처럼 모여들어 마치 장안에서 촉(중국 사천 지방)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검(大劍)ㆍ소검(小劍) 두산(山) 요해(要害)의 검각(劍閣) 깊은 것에 의지한 듯이 하였다.” 

백암성으로 접근하는 주변 모든 길을 차단한 아사나사마가 백암성 서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곳은 유일하게 백암성으로 접근이 가능한 위치였다. 책부원구의 표현 그대로 “백암성은 인산임수(因山臨水)하고 첩석이 4면을 둘러(疊石爲之四面) 험절하기 때문에 공격이 가능한 곳은 반경 60보(步) 정도에 불과”했다. 

고구려인들은 적의 선봉대장을 쓰러트려 돌궐기병들의 사기를 꺾어 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사나사마가 이끄는 돌궐 기병이 백암성 서쪽 성벽의 좁은 그곳으로 다가 오자 백암성의 강노(强弩)에서 한꺼번에 화살을 쏟아냈다. 선두에 있던 아사나사마가 한 발을 맞았다.

‘노해(弩解)’에는 강노가 10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기계식 활이며, 1000보의 거리에서도 갑옷을 뚫을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덩치가 커서 성벽 위에 거치해 놓은 고정식 화기였다. 묵직해 안정감이 있어 정확했다. 

고구려인들은 적군의 접근이 예상되는 백암성의 서문에 마치 중기관총을 배치하듯 다수의 강노들을 집중적으로 거치해 놓았던 것 같다. 물론 각 강노는 서문 앞 좁은 60보 이내의 모든 곳에 탄착지점이 선정돼 있었으리라. 아사나사마가 운이 없어 흐르는 화살(流矢)에 당한 것이 아닐 것이다. 거의 저격에 가까운 일제 사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인들이 그 저명한 돌궐왕족이자 외교관이었던 그를 모르고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선봉대장이 활을 맞고 낙마하는 순간 돌궐인 전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선방을 맞은 그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고, 우선 그들은 말에서 떨어진 아사나사마를 부축해 말에 싣고 성 아래의 평지로 서둘러 후퇴했으리라. 

하루 만에 아사나사마의 상처는 병균에 감염되어 곪아 들어갔다. 막사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신음소리는 돌궐인들 심리에 비루함이 깃들게 했고, 남의 전쟁에 끌려온 자신들은 무엇인가 되묻게 했으리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당 태종이 직접 백암성으로 왔다. 떨어진 사기를 살리기 위해 황제가 부상당한 그에게 뭔가를 해야 했다. 

당나라 군 내부에 중국 한족들과 돌궐인들 사이에는 영원한 인종적 골이 있었다. 아사나사마의 유고는 돌궐 기병의 운영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그는 확실히 당에 의해 몽골리아에서 고구려까지 이끌려온 돌궐인들의 대표였다. 유능하지는 못했지만 그에게 고귀한 혈통이 주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같은 돌궐인으로 충성심이 깊고 더 유능한 계필하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사나사마에는 비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당시 그는 적대세력인 설연타에 붙은 계필부의 족장 가족에 불과했다. 왕족 아사나씨가 아니면 돌궐인 전체를 묶어낼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없다. 백암성의 고구려 저격병들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다. 

오골성의 대성지관(大城之冠) 

백암성 전투 초반 오골성의 고구려 군대 1만이 백암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그들은 초전에 계필하력이 이끄는 돌궐 기병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오골성은 장쾌한 바위 봉우리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전체 둘레가 무려 16㎞다. 성벽은 총 7527m이다. 성벽 86개 구간과 천연 장벽 87개 구간으로 나뉜다. 아무리 막강한 군대가 침공해도 평지로 이어지는 북문만 막으면 철옹성이 된다. 

거대한 봉우리 안에는 북에서 남으로 길고 넓게 펼치진 완만한 굴곡을 낀 평지가 있다. ‘요동지(遼東誌)’에서는 10만 대군이 숙영하고, 훈련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이른바 대성지관(大城之冠)이다. 동시에 요동 평원과 압록강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집적하고 있는 거대한 격납고이며, 병력들을 조련시키는 훈련소이기도 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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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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