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10대 선왕 대인수(宣王 大仁秀, ?~830, 재위 818~830) 재위 시기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다. 하지만 발해 전성기를 이룬 선왕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 최고의 국세를 이룬 선왕. 과연 그의 어떤 업적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발해의 전성기를 만들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발해 왕계(王系)를 바꾼 선왕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698년 이후 발해 왕위는 그의 후손으로 지속되어 왔다. 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까지는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4대 대원의(大元義, 재위 793)와 5대 성왕(成王, 재위 793~794)은 그 재위 기간이 너무도 짧았다. 대원의는 문왕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고, 성왕은 문왕의 손자였다. 짧은 혼란이 끝난 후, 성왕의 동생 6대 강왕(康王, 재위 794~809)이 16년간 왕위를 유지했지만 다시 혼란이 시작되었다. 7대 정왕(定王, 재위 809~812), 8대 희왕(僖王, 재위 812~817), 9대 간왕(簡王, 재위 817~818)은 모두 강왕의 아들들로, 왕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간왕을 마지막으로 대조영의 후손들이 더 이상 없었다. 발해 자체 기록의 부족으로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발해 왕실 내부에 어떤 갈등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간왕이 죽은 후 임금이 된 사람이 곧 10대 선왕 대인수다. 그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6대 강왕과 같은 항렬의 왕실 가족이었다. 하지만 4대 할아버지가 대야발이란 것 외에 아버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출생연도 또한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적어도 손자를 둔 40세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그가 13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죽은 후, 다음 왕위에 오른 이가 그의 아들 대신덕(大新德)이 아니라 손자인 대이진(大彛震, 재위 830~857)이었기 때문이다.

 

발해 왕위는 이후 대이진의 동생 대건황(大虔晃, 재위 857~871)이 12대 임금이 되고, 13대 대현석(大玄錫, 재위 871~894), 14대 대위해(大瑋瑎, 재위 894~906), 15대 대인선(大諲譔, 재위 906~926)이 대를 이어 계승했다. 따라서 발해 왕실은 2~9대까지 대조영의 혈통, 10대~15대까지 대야발의 혈통이 각기 왕위에 오른 셈이 된다. 10대 선왕의 등장이 곧 발해 왕실의 교체를 가져온 셈이다. 그의 등장을 계기로 발해사는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발해의 정치, 사회 등 많은 면에서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발해의 영토를 크게 넓히다

단명한 임금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발해의 정치 상황에서 살아남아 왕위에 오른 그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는 왕실의 혼란을 잠재우고,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정하였다. 건흥이란 흥성함을 건설한다는 의미로, 발해의 정치, 사회적인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요사(遼史)] ‘지리지 흥요현’ 조에는 “발해 때에 장녕현으로 당나라 원화(당나라의 연호, 806~820) 연간에 발해 왕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락을 공략하여 군과 읍을 설치함에 따라 지금의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선왕은 즉위한 후 곧장 남과 북쪽으로 정벌활동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녕현은 요동 지역으로, 선왕 때에 이르러 발해가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동 지역에는 소고구려(小高句麗)가 있었는데, 이 무렵 세력이 약해져 발해에게 통합되었다.

 

신라와 전쟁을 한 것은 819년 당시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이정기의 손자인 이사도(李師道) 토벌 작전에 3만 군사를 보낸 것과 관련이 있다. 발해는 이정기 일가와 말 무역을 비롯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732년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할 때 신라가 발해 남부 지역을 공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발해도 신라가 이사도를 공격할 때, 신라를 공격하여 이사도를 도운 것이라고 하겠다.

 

선왕의 정복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방면은 북쪽 지역이었다. [신당서] ‘발해’ 전에는 “대인수가 바다 북쪽(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큰 영토를 개척한 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바다는 붕어(鯽)가 특산물인 미타호(湄沱湖)로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싱카이호(興凱湖)로 볼 수 있다. 이곳보다 북쪽은 불녈(拂篞), 월희(越喜), 흑수(黑水) 등의 말갈 부족의 거주지다. 선왕은 이들 말갈 부족을 정복했던 것이다.

 

월희부는 740년대에 발해에 복속된 적이 있지만, 802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발해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사이에 잠시 독자 노선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자 선왕이 이를 다시 복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말갈 부족 가운데 발해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흑수말갈이었다. 흑수말갈은 말갈 부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선왕 시기 당나라는 이사도를 비롯한 여러 번진(藩鎭)세력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수말갈에게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왕은 이 기회를 노려 흑수말갈을 정복했다. [신당서] ‘흑수말갈’ 전에는 원화 연간에 흑수말갈이 두 번 사신을 보냈지만, 이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흑수말갈을 비롯한 모든 말갈족이 복속되어 당나라와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갈 부족을 모두 굴복시킨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발해 초기 강역은 사방 2천 리였으나, 이때에는 사방 5천 리로 크게 넓어졌다.



발해 전성기를 맞이하다

발해의 행정구역은 5경15부, 62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토의 확장과 함께 변화해오다가, 선왕 때에 완성되었다. 선왕 시기 통합한 월희말갈 거주지는 회원부(懷遠府)와 그 아래 9주로, 불녈말갈 지역은 동평부(東平府)와 5주로 각각 편제되었다. 이처럼 선왕은 발해의 행정 통치 체제를 완성했다.

 

선왕은 발해의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나라, 일본과의 외교,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재위(在位) 13년 동안 선왕은 일본에 5차례 외교 사절을 보냈다. 그런데 825년 일본의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노 오츠구(藤原緖嗣)는 발해가 보낸 사신 일행을 상업하는 무리로 인식하고, 그들을 사신으로 대접하는 것은 일본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 내부의 비난에 불구하고, 선왕은 825년 12월 103명의 대규모 사신단을 보냈다. 발해 사신단은 외교 활동도 하지만, 초피(貂皮)를 비롯한 물건을 일본에 파는 상업 활동에 주력했다. 신라의 장보고를 비롯해 일본과의 교역에 적극적이었던 시대였던 만큼, 발해도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무역 활동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발해에게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은 당나라였다. 산둥반도 등주에는 발해관이 있을 만큼, 당나라의 입장에서도 발해는 주요한 무역 상대국이었다. 선왕 시기 발해는 신라의 활발한 해외교역에 자극받아 일본뿐만 아니라, 당나라와의 교역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에 따라 사신도 더 자주 파견했다.

 

아울러 당나라에 이거정(李居正), 주승조, 고수해 등의 학생들을 파견해 유학을 배워오게 했다. 이들 가운데 이거정은 32세 무렵에 당나라에 가서 10년간 공부를 한 후 833년 귀국한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후에는 70대 나이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다. 일본에서 그는 문장이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크게 환영을 받았는데, 당시 그는 정3품 고위직 벼슬을 갖고 있었다.

 

선왕은 당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당나라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도 적극적이었다. 선왕은 819년 문적원(文籍院)에 소속된 이승영(李承英)이란 자를 일본에 파견했다. 문적원은 서적을 관리하고, 비문, 축문, 제문 등을 작성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다. 이런 부서에 속한 이승영은 유학에 능통한 자로 볼 수 있다. 이거정, 이승영 등의 문관(文官)들을 일본 외교에 적극 활용한 것은 당시 선인이 유학자들을 적극 활용해 정치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삼국시대에는 유학에 능통한 자가 거의 없었고, 높은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발해시대 특히 9세기 이후에는 발해는 유학자들이 차츰 대접받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832년 발해에서 돌아온 왕종우란 자가 발해에서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좌우삼군(左右三軍), 120사(司)를 설치했음을 당나라에 정부에 보고한 기록이 [구당서]에 등장한다. 좌우신책군은 임금을 지키는 금군(禁軍)을 뜻한다. 이 기록은 이는 발해에 군 조직이 일부 개편된 것임을 알려준다. 832년은 선왕이 죽은 후 2년이 지난 시기지만, 당나라 사신이 발해를 방문하여 그 기록을 남긴 것이 가끔 있던 일이기 때문에, 선왕 시기에 벌어진 군 개혁을 뒤늦게 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선왕은 왕의 안전을 도모하고, 왕위 다툼과 같은 혼란을 막고, 대외 팽창에 걸맞은 군 조직을 갖추기 위해 군사 개혁을 진행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발해 전성기를 이끈 선왕

왕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그의 인물됨이나, 그가 행한 구체적인 행동들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선왕 시기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호칭한 것은, 단지 영토가 커졌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선왕은 발해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대외적 팽창과 안정적인 내치(內治)를 통해 발해의 전성기로 이끈 인물이라고 하겠다.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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