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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세운 임금 온조왕(溫祚王, 재위 B.C.18~A.D.27)은 그 이름처럼 따뜻하게 기억된다. 동명왕 고주몽의 셋째 아들로,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는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복 형인 유리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자, 형인 비류(沸流)와 제 땅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열었다. 형과 함께 한 새 나라에서 갈등 또한 없지 않았으나, 남겨진 많지 않은 기록에서나마 그가 백제 건국의 시조로 인정받게 된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한다.
흔한 건국신화 없이 출발한 백제
백제의 건국에 따른 이야기는 다소 맹맹하다. 조선의 단군은 말할 것도 없고, 백제와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 고구려나 신라처럼 그럴 듯한 신화 하나 없이 나라가 시작되어 있다. 고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제 땅을 떠나 남쪽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정도이다. 그것으로 신화는 필요 없다 생각했을까, 고구려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해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백제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먼저 이 같은 의문에 부딪힌다.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말하면서 온조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엉뚱한 사람으로 시조를 대신하고 있다. [북사(北史)]와 같은 역사서에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이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했으며,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그의 처로 삼아 주었다고 썼다. 그러나 [삼국지]에 따르면, 후한 말 양평 사람이었던 공손도는 일족의 딸을 부여 왕 위구태(尉仇台)에게 시집보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쪽의 기록이 맞을 듯하다.
이렇게 백제에 대한 관심은 헐거웠던 것 같다. 나중에 백제가 나라의 격을 갖춘 다음에야 그 위치와 경계를 정확히 써주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구당서] 같은 책에서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이다. 그 동북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썼다. 이는 대체로 다른 역사서에서 받아 적은 바이다.
그러나 백제를, 그 시조인 온조를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온조왕이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면서,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고 적었다. 어쩐지 주몽을 그대로 빼 닮은 모습이다. 온조의 건국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면서도 신화 이상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구려의 셋째 왕자인 온조, 새나라를 세우려 집을 떠나
온조가 효성스러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처음에 주몽의 둘째 아들이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형인 비류가 있으니 그냥 그대로라면 아버지의 후계자로서는 어려웠다. 더욱이 어느 날 이복 형인 유리가 나타났다. 그날로 온조는 셋째 아들이 되었다. 왕이 될 욕심이 있었다면 둘째라도 어려웠을 텐데, 셋째라서 갈 길은 더 아득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그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왕이 죽자 둘째 사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몽이 낳은 아들이 둘이었다. 큰아들이 비류, 둘째가 온조였던 것이다.
주몽은 어떤 난을 피해 졸본부여로 왔던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주몽의 일생을 보면, 그가 피한 난이란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겨난 것을 말한다. 주몽의 능력을 경계한 금와의 아들들은 그를 죽이고자 했고, 이미 장가들어 아들을 두었던 주몽은 처자며 어머니마저 버려두고 황급히 몸을 피했었다. 그런 그에게 졸본부여의 왕은 성공의 은인이었다. 새 장가를 들이고 마침내 왕위까지 물려주었으니 말이다. 졸본부여가 아닌 고구려라는 이름의 새 나라를 세운 아버지 앞에 옛 아들이 나타나면서 비류와 온조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하였다. 아들의 이름은 유리, 주몽을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왕이 된 그이이다. 비류와 온조는 유리가 태자에 앉는 광경을 하릴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유리가 자신들을 어떻게 할지, 그것이 더 절박한 현실적인 문제였다. 두 사람은 두려웠다. 마치 주몽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가련한 아들들은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주몽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의 일이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백제 건국의 또 다른 이야기, 비류백제설
집을 떠나면서 더 비감했던 것은 형인 비류였던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다른 기록’이라고 하면서, 비류와 온조의 또 다른 탄생담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의 아버지 우태(優台)는 해부루의 서손인데, 우태는 연타발의 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하였다. 우태와 소서노는 두 아들을 낳았다. 이들이 곧 비류와 온조이다. 우태가 죽고 소서노는 혼자 살다, 주몽이 오자 두 아들을 데리고 재혼하였는데, 고구려가 세워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 공으로 고구려의 왕비로 떳떳이 자리에 올랐다.“
이상의 이야기에서는 졸본부여의 왕이 연타발로 바뀌었고, 과부인 그의 딸 소서노가 등장하며, 주몽은 두 아들을 둔 과부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새 아버지 주몽과 의붓아들들 사이의 묘한 감정선(感情線)이 숨어 있을 법하다. 조마조마한 관계는 주몽이 첫 부인 예(禮)씨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면서 폭발하였다. 주몽은 그를 태자로 세워버렸던 것이다. 비록 왕비의 자리에 있건만 소서노로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고, 비류는 이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에서의 환란을 피해 도망하여 이곳까지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물을 쏟아 부어 나라의 창업을 도와 이루었으니, 어머니의 수고로움과 공로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왕께서 세상을 뜨시자 국가가 유류에게 돌아가니, 우리들이 공연히 여기 있으면서 군더더기 혹처럼 암울하고 답답하게 지내느니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점쳐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나으리라.” ([삼국사기]에서)
여기서 유류는 유리인 것이 분명하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은 비슷하지만, 앞뒤 두 이야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백제의 시조를 온조와 비류로 각각 달리 보고 있다는 점이다. 비류를 시조로 보는 뒤의 이야기에서 두 형제가 주몽의 의붓아들로 설정된 점 또한 주목을 요한다. 어쩌다 이렇게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을까. 비록 같이 집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지만, 형제 사이에 모종의 갈등 관계가 있었고, 그들을 따르는 두 무리가 각각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의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온조가 백제의 첫 왕임이 두루 공인된 다음에도 ‘비류백제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수도의 위치를 둘러싼 온조와 비류의 불화, 그리고 화합
온조는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고 [삼국사기]는 적었다. 그들이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렀다.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았다. 한산은 지금의 서울, 부아악은 북한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온조와 비류의 견해가 갈린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자고 하였다. 그러나 열 명의 신하들이, ‘이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기대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에 큰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만큼 하늘이 내린 요새와 땅이 주는 이득이 큰 곳을 얻기 어려운데,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간청했다. 온조는 이 말을 따라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B.C.18년의 일이었다.
비류는 하남에 도읍하자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미추홀은 지금 인천의 문학산 주변을 가리킨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바닷가에 살자는 비류의 주장, 문학산 근처에서 발견되는 약간의 유적과 유물, 더욱이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인주(仁州)라는 주석을 붙여놓기까지 했지만, 연구자에 따라서는 미추홀의 위치를 남양반도의 화성군 마도면, 임진강의 파주군 적성면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비류는 미추홀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 비류는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위례성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은 태평하였다. 그런 광경을 보는 비류의 마음은 착잡하였다. 형으로서 동생만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정치 일선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지내기로 한 것이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초기 백제의 유적으로 추정하는 서울 올림픽공원 내 몽촌토성. <출처 : 강병기 at ko.wikipedia.com>
비류가 ‘깊이 뉘우치다 죽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것을 말해준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 또한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돌아오는 이들을 십제의 모든 백성이 매우 기뻐하며 맞았다. 그러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더불어 자신의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기까지 하였다. 또한, 온조는 즉위하자마자 동명왕의 묘를 세웠다. 이것은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신임을 강조하는 뜻과 함께, 강력한 왕권의 정착을 서두르려는 의지로 보인다. 선주민(先住民)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을 것이다.
건국왕의 이름처럼 따뜻했던 왕조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 그들의 성씨에 대해서 여러 다양한 의견이 아직 정설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백제사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뜻이다. 그런 과제는 과제대로 남겨둔다 해도, 백제의 첫 왕에게 붙여진 이름에서 무한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온조라는 말은 하늘이 내리는 따뜻한 복, 그런 임금을 뜻하지 않는가. 거창하고 권위적인 이름이 아니다. 여기서 문득 온조의 성품이 효성스러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다시 떠오른다. 집을 떠난 것도 아버지가 죽은 다음 이복 형과 있을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첫 왕이 그래서일까, 백제의 역사에 짧은 지면을 할애했으면서도 일연이 [삼국유사]에 거둬들인 이야기에는 ‘온조스러운’ 백제 사회의 단면이 잘 드러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사암(政事巖)에 얽힌 이야기이다. 호암사는 백마강 강에 있었던 절로 추정된다. 이 절에 정사암이 있었다. 나라에서 재상의 선임을 의논할 때에 뽑힐 만한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함 속에 넣고 봉해 이 바위 위에 둔다. 얼마 뒤에 떼 보아서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정사암이다. 도장은 누가 찍었다는 말일까.
또 사비수 언덕에 열댓 명이 앉을 만한 바위 하나가 서 있다. 이 바위를 돌석(火突石)이라 했다.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용을 낚았다는 용암이 바로 근처에 있다. 백제의 왕은 왕흥사(王興寺)에 예불하러 거동할 때가 있었다. 왕흥사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부여의 백마강 서쪽 기슭에 있었고, 최근에 ‘왕흥’이라 새긴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그 존재를 증명하였다. 왕은 먼저 사비수 언덕의 돌석 위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하였다. 그러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 돌석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여졌는데, 이 바위를 떠올릴 때마다 어쩐지 온조왕의 얼굴과 겹쳐지는 환상이 보이는 듯 하다.
글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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