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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의 책성지역 시찰
글 : 김종식
출처: ‘낱낱이 파헤친, 고구려본기’, ‘정사, 고구려’에서
그림2-2, 책성지역
태조왕은 고구려 제6대 왕으로 국가기반을 굳건히 다진 임금이다. 그는 부여로부터 삼각록과 장미토를 선물 받은 지 2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서 태조왕이 사냥을 떠나 7개월 동안이나 궁궐을 비웠는데, 어찌 된 일일까? 혹시 모반 때문에 피신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태조왕 46년(98년) 3월에 태조왕은 동쪽지역에 있는 책성(柵城)을 순방하였다.>
책성이라는 곳은 지금의 함경북도 두만강 건너편 중국 지린성(吉林省=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에 소재한 훈춘(琿春=혼춘)지역을 말하는데, 두만강 지류인 훈춘강 서안(西岸)에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훈춘을 고구려시대에는 책성(柵城)이라고 불렀는데, 그 지역은 농산물이 풍부하고 사금(砂金)도 출토되어 비교적 생활자체가 넉넉하여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훈춘이라고도 하는 책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785년부터 794년까지 약 10년 동안, 발해의 4번째 수도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되기도 했던 곳이고,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 일대를 북간도(北間島)라 부르기도 했다. 아무튼 태조왕은 책성지방에 가는 도중, 그때 책성지방에 있는 서계산(西罽山)에서 백록(白鹿=털이 흰 사슴)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36년 전인 태조왕 10년 때에도 동쪽지방에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고구려왕으로서 흰 사슴을 두 마리씩이나 잡은 왕은 태조왕 뿐이다.
[대왕마마. 저기 골짜기 아래 털이 하얀 사슴 한 마리가 여유 있게 물을 먹고 있사옵니다.]
[뭐라고 했느냐? 흰 사슴이라면 상서러운 짐승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옛 부터 하얀 매와 더불어 길한 동물로 여겨 왔습니다.]
[대왕마마. 저쪽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말을 타고 저쪽 산등성이로 올라가 사슴을 아래쪽으로 쫓아라! 사슴은 앞다리가 짧기 때문에 높은 곳으로는 잘 달려도 아래쪽으로는 잘 달리지 못하느니라. 내가 이쪽에서 활을 쏠 것이다.]
[대왕마마. 저어기 사슴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활을 쏘십시오.]
[오~그래! 으이~싸.]
[명중이옵니다. 대왕마마. 아주 정확하게 잘 맞추셨습니다.]
[허허허. 흰 사슴을 잡았으니 이번에 책성에 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라.]
[그러할 것이옵니다. 대왕마마.]
<태조왕은 책성(柵城)에 들어가 군신들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고 책성지역의 관리들에게 포상했으며, 그들의 공로를 바위에 새겨놓고 10월에야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정사에 바쁜 임금이 7개월이란 긴 시일동안 궁궐을 비워 두었다는 것은 좀 이례적인 데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태조왕이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책성지역은 두만강의 지류에 있기 때문에 강에서 획득하는 수산물이 풍부했고, 타 지역보다 발달된 넓은 평야가 있었으며 땅이 매우 기름진 옥토였던 모양인데, 농사를 지어서 많은 농산물을 수확했던 그런 지역이었다. 또한 이곳은 경제적인 이득 이외에 정치·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북쪽에 있는 읍루족이라고도 하는 숙신세력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진기지로서의 요충지였다.
그러니까 원래 책성지역은 말갈이라고도 하는 읍루(挹婁)족이 살던 곳으로 두만강 북쪽에 있었고, 북옥저는 두만강 남쪽에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말기에 부위염(扶尉猒)을 보내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城邑)으로 삼았던 지역이다. 그 후 부위염 장군이래로 두만강을 건너가 읍루족을 밀어내고 책성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만들었던 모양인데, 책성지역이 고구려영토가 된지 약 120년이 지난 후에 태조왕이 순방을 한 것이다.
책성지역의 농토가 얼마나 비옥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참고사항으로,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시대였을 때에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 책성지역(북간도)으로 농사를 지으러 밀려들었던 역사가 있다. 그건 그렇고, 제아무리 중요한 요충지라 할지라도 신하들을 보내서 그곳 관리들과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면 될 것이고, 또한 태조왕이 친히 갔더라도 한번 쓰윽 돌아본 후에 곧장 돌아올 수가 있었을 터인데, 뭣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책성에 머물렀을까?
[대왕마마. 저희 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해 험한 천리길을 달려오셔서 찾아주시니, 책성을 책임지고 있는 패자(관직이름)로서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허허허. 이곳의 주민들도 모두 다 고구려 백성이거늘, 왕으로써 내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이곳 백성들은 모두가 대고구려 백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모든 신하들은 백성들에게 소홀함이 없이 늘 힘써야 할 것이니라.]
[명을 받들어 따르겠나이다. 대왕마마.]
[내가 고구려왕으로서 책성의 신하들에게 선물을 줄 것이다. 또한 책성관리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겨 길이 후대에 전해지게 할 것이다. 그럼 오늘은 여러 신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 것이니, 마음껏 마시도록 음식과 술을 넉넉히 가져 오너라!]
태조왕이 책성지역을 찾아가서 공을 들였던 것은 군사적이나 경제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5부족연합 체제를 해체하고 계루부집단의 왕권중심으로 나라체계를 세웠으므로, 왕의 의지대로 나라를 이끌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먼 곳의 책성지역 같은 요충지역을 찾아다니며, 그 곳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감싸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태조왕은 3월에 책성으로 가서 10월에 돌아왔으니, 반년이 넘게 궁궐을 비워두고 나들이를 한 셈인데, 궁궐내부의 세력조직이 튼튼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내부 반란이 일어나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태조왕의 이 시기는 왕권중심체계가 확고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그 먼 책성지방까지 어떤 길을 택하여 갔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옛 행인국과 옛 북옥저를 거쳐 책성지역을 순방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행인국(荇人國)이란 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작은 부족국가였는데, 이미 동명성왕(주몽) 6년(기원전 32년) 10월에 오이(烏伊)·부분노(扶芬奴)를 보내 정벌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성읍(城邑)으로 삼았던 곳이고, 북옥저는(北沃沮)는 비교적 평야가 있고 해산물이 풍부한 백두산 넘어 동쪽, 지금의 함경북도 두만강유역에 터전을 잡았던 작은 부족국가였는데, 이미 동명성왕 10년(기원전 28년) 11월에 장수 부위염(扶尉猒)을 보내 멸망시켜 성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러니까 왕권중심으로 나라체계를 세운 태조왕은 이제는 고구려에 복속되어있는 지방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보둠아 안으려고, 동쪽에 있는 옛 행인국·개마국·옛 북옥저·책성 등을 찾아 순행했다는 그런 말이다.
태조왕이 반년이나 넘게 장기간 순행했다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갔을 것인데, 기록에는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추정상으로는 왕의 순방을 미리 가서 알리는 파발이 있었을 것이고, 왕이 출동시에는 선발대가 앞장서고, 왕을 근접에서 호위하는 경호대인 내군이 있었을 것이고, 조금 떨어진 후미에는 돌발시에 대비하여 따르는 외군이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말을 타고 갔을까? 아니면 수레를 타고 갔을까? 아무리 고구려가 말이 많고 수레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높은 백두산 줄기의 개마고원 준령을 넘어 수레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를 쓴 우리역사문화 연구소 김용만 선생이 펴낸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란 책을 보면, 고구려는 수레를 이용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다고 하였다. 수레는 말이나 소가 끄는 주요 교통수단의 하나였고, 중국과의 교역을 하려면 많은 물자를 운송해야 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들이 부(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통행에 이용했던 것이다. 참고로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김용만 선생은, 고구려사에 대해 많은 책을 펴낸 분이시다.
수레에 대한 연구는 곧 지금의 교통수단과 그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기초가 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에서 줄이기로 한다. 다만 고구려는 수레가 많다고 하는 것은 곧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교통로가 잘 닦여 있다는 것인데, 고구려 후반기에는 길들이 아주 잘 닦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왕시기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까지만 해도 고구려가 도로망이 그다지 발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태조왕이 백두산맥을 넘어서 책성지역까지 다녀왔을 때는 수레를 이용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태조왕 50년(102년) 8월에 사신을 책성으로 보내 그곳 관리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니까 태조왕이 처음 책성지역을 다녀 온 후 4년 만에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 위로하는 등, 끔찍이 책성지방에 대해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태조왕의 노력으로 책성지역은 국내성·평양·요동·부여지역과 함께 나중에 고구려의 5대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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