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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결론

        - 압록강 ·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중심으로 -  신 광 철
       Ⅰ. 서론                               http://tadream.tistory.com/5520
        Ⅱ.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    http://tadream.tistory.com/5519
        Ⅲ. 압록강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2
        Ⅳ. 요하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3
        Ⅴ. 결론                             http://tadream.tistory.com/5521        
        참고문헌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압록강 · 요하 유역의 방어체계는 지역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먼저 압록강 유역의 경우 오녀산성과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평지성과 산성의 도성방어체계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도성 외곽 노령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한 관애 · 산성으로 구성된 호형방어선, 혼강 우안의 호형 · 축선방어체계가 구축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혼강 우안의 호형 · 축선방어체계가 국경지대의 축선방어체계와 도성 외곽의 호형방어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영역 전체에 걸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가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요하 유역의 방어체계를 보면 혼하 · 태자하 일대의 방어체계는 전기 수도인 국내성을 중심으로, 요하하류~천산산맥의 방어체계는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었으며, 요하 중상류~길림합달령산맥의 방어체계는 양자가 복합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더욱이 요하 중상류에서 압록강 중류 일대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성자산산성이나 최진보산성은 혼하 중상류의 성과 하나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중상류의 각 지류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성은 요하~천산산맥의 성들과 함께 대흑산맥에서 천산산맥 서남단에 이르는 산성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요하 유역의 고구려 성은 동북대평원에서 대흑산맥~천산산맥의 지류연안을 통해 고구려 중심부로 나아가는 모든 진입로를 차단하면서 입체적인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운용하던 양상은 7세기 전반 고-수, 고-당 전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645년 당군이 세 갈래의 도하로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천산산맥 횡단로의 입구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공략하던 전황은 요하~천산산맥 일대의 교통로 상에 구축된 고구려의 입체적 군사방어체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648년 당군이 해로를 통해 압록강 하구를 침공하자 오골성, 안시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한 사실은 전연방어성과 종심방어성과의 유기적 연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특히 650년 이후 당군은 신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며, 666~668년 당군의 최종 군사작전시에는 신성이 함락되자 각 방면의 성들이 순식간에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신성이 요동지역 군사방어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지를 잘 알려주는 일이라 하겠다. 요하 하류와 요하 중상류, 그리고 동북대평원과 동부 산간지대 등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신성은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는 핵심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은 시기적으로도 요동평원과의 접경지역에 축조된 최초의 산성으로서 초기 방어체계를 중후기 방어체계로 전환시켜주는 매개고리이기도 하다.
 
또한 고구려 후기 성곽 방어체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천리장성의 존재일 것이다. 631년부터 16년간 당 왕조와의 전쟁에 대비해 쌓았다고 알려져 있는 천리장성은 그간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여호규 2000: 184-191, 신형식 2000b: 71).
 
하지만 천리장성은 정작 고-당 전쟁시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천리장성이 방벽의 개념이 아닌 보축 작업한 여러 성들이 유기적인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김용만 2003: 57-68). 실제로 고구려 내부에서는 고-수 전쟁 이후 천산산맥을 횡단하는 교통로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당 왕조가 고구려의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리자 곧바로 위협을 느끼고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후 이러한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는 당군의 세 차례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3차 고-당 전쟁 때 동원된 당군의 규모는 무려 100만에 육박했으며 부여성 및 주변의 40여성이 함락되고, 신성 및 주변의 16개성이 함락됐음에도 고구려군 15만은 여전히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에서 당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만약 천리장성이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으로 이뤄졌다면 이런 식의 저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 왕조에 항복하지 않은 성들이 존재한 것 역시 천리장성이 여러 성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요하유역으로 끊임없이 진출하면서 점령지역에 축조하기 시작한 성들은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안정적으로 차지한 이후에는 일관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에 맞게끔 보축되기도 하고 증축되기도 하는 등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고-수 전쟁 이후 16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천리장성이 완성되면서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는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러 차례 승전으로 인한 고구려 군사정책 입안자들의 경직된 전략 판단은 당군의 새로운 전략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총체적인 국력 저하로 고구려는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김용만 2003: 318-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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