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afe.daum.net/yeohwicenter/4ulL/174

Ⅳ. 결론

        - 압록강 ·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중심으로 -  신 광 철
       Ⅰ. 서론                               http://tadream.tistory.com/5520
        Ⅱ.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    http://tadream.tistory.com/5519
        Ⅲ. 압록강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2
        Ⅳ. 요하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3
        Ⅴ. 결론                             http://tadream.tistory.com/5521        
        참고문헌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압록강 · 요하 유역의 방어체계는 지역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먼저 압록강 유역의 경우 오녀산성과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평지성과 산성의 도성방어체계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도성 외곽 노령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한 관애 · 산성으로 구성된 호형방어선, 혼강 우안의 호형 · 축선방어체계가 구축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혼강 우안의 호형 · 축선방어체계가 국경지대의 축선방어체계와 도성 외곽의 호형방어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영역 전체에 걸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가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요하 유역의 방어체계를 보면 혼하 · 태자하 일대의 방어체계는 전기 수도인 국내성을 중심으로, 요하하류~천산산맥의 방어체계는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었으며, 요하 중상류~길림합달령산맥의 방어체계는 양자가 복합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더욱이 요하 중상류에서 압록강 중류 일대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성자산산성이나 최진보산성은 혼하 중상류의 성과 하나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중상류의 각 지류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성은 요하~천산산맥의 성들과 함께 대흑산맥에서 천산산맥 서남단에 이르는 산성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요하 유역의 고구려 성은 동북대평원에서 대흑산맥~천산산맥의 지류연안을 통해 고구려 중심부로 나아가는 모든 진입로를 차단하면서 입체적인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운용하던 양상은 7세기 전반 고-수, 고-당 전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645년 당군이 세 갈래의 도하로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천산산맥 횡단로의 입구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공략하던 전황은 요하~천산산맥 일대의 교통로 상에 구축된 고구려의 입체적 군사방어체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648년 당군이 해로를 통해 압록강 하구를 침공하자 오골성, 안시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한 사실은 전연방어성과 종심방어성과의 유기적 연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특히 650년 이후 당군은 신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며, 666~668년 당군의 최종 군사작전시에는 신성이 함락되자 각 방면의 성들이 순식간에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신성이 요동지역 군사방어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지를 잘 알려주는 일이라 하겠다. 요하 하류와 요하 중상류, 그리고 동북대평원과 동부 산간지대 등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신성은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는 핵심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은 시기적으로도 요동평원과의 접경지역에 축조된 최초의 산성으로서 초기 방어체계를 중후기 방어체계로 전환시켜주는 매개고리이기도 하다.
 
또한 고구려 후기 성곽 방어체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천리장성의 존재일 것이다. 631년부터 16년간 당 왕조와의 전쟁에 대비해 쌓았다고 알려져 있는 천리장성은 그간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여호규 2000: 184-191, 신형식 2000b: 71).
 
하지만 천리장성은 정작 고-당 전쟁시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천리장성이 방벽의 개념이 아닌 보축 작업한 여러 성들이 유기적인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김용만 2003: 57-68). 실제로 고구려 내부에서는 고-수 전쟁 이후 천산산맥을 횡단하는 교통로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당 왕조가 고구려의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리자 곧바로 위협을 느끼고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후 이러한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는 당군의 세 차례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3차 고-당 전쟁 때 동원된 당군의 규모는 무려 100만에 육박했으며 부여성 및 주변의 40여성이 함락되고, 신성 및 주변의 16개성이 함락됐음에도 고구려군 15만은 여전히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에서 당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만약 천리장성이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으로 이뤄졌다면 이런 식의 저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 왕조에 항복하지 않은 성들이 존재한 것 역시 천리장성이 여러 성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요하유역으로 끊임없이 진출하면서 점령지역에 축조하기 시작한 성들은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안정적으로 차지한 이후에는 일관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에 맞게끔 보축되기도 하고 증축되기도 하는 등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고-수 전쟁 이후 16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천리장성이 완성되면서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는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러 차례 승전으로 인한 고구려 군사정책 입안자들의 경직된 전략 판단은 당군의 새로운 전략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총체적인 국력 저하로 고구려는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김용만 2003: 318-322).
 
 
참고문헌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1979,『조선전사』3.
孔錫龜, 1998,『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書景文化社.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한국고대 군사전략』.
권오중, 2005, 「遼東郡 中部都尉와 高句麗의 新城」『연구총서』5, 고구려연구재단.
金瑛河, 1985, 「高句麗의 巡守制」『歷史學報』106, 歷史學會.
______, 1988.『三國時代 王의 統治形態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용만, 1998,『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______, 2003,『새로 쓰는 연개소문傳』, 바다출판사.
金龍善, 1980, 「高句麗琉璃王考」『歷史學報』87, 歷史學會.
金賢淑, 1996,『高句麗 地方統治體制 硏究』,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______, 2005,『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남일룡, 1995, 「평양지방의 고대토성」『조선고고연구』1995-2, 사회과학출판사.
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______, 1988,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韓國史論』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______,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한국고대사논총』8,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______, 1999,『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류제헌, 1999,『중국 역사 지리』, 문학과지성사.
리순진, 1995, 「평양 일대에서 새로 발굴된 황대성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1, 사회과학출판사.
朴性鳳, 1995, 「高句麗 發展의 方向性 문제(南進發展論의 民族史的 再吟味)」『高句麗 南進經營史 硏究』, 백산자료원.
박용운, 2004, 「국호 高句麗 · 高麗에 대한 일고찰」『북방사논총』창간호, 고구려연구재단.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9,『조선전사』3, 과학백과사전출판사.
박창수, 1988, 「고구려 서북방 성방어체계의 위력」『조선고고연구』1988-3, 사회과학출판사.
서병국, 1997,『고구려제국사』, 혜안.
서영교, 2007,『고구려, 전쟁의 나라』, 글항아리.
서영대, 2007, 「장수왕과 평양 천도」『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동북아역사재단.
손영종, 1997,『고구려사』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______, 2000,『고구려사의 제문제』, 신서원.
徐榮洙, 1987, 「三國時代 韓中外交의 展開와 性格」『古代韓中關係史의 硏究』, 三知院.
申瀅植, 1995, 「遼東地方의 高句麗 遺蹟」『梨花史學硏究』22, 梨花女子大學敎 史學硏究所.
______, 2000a, 「고구려산성의 분포와 특징」『고구려산성과 해양방어체제 연구』, 백산자료원.
余昊奎, 1995,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한국사연구』91, 한국사연구회.
______, 1998,『高句麗 城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______, 1999a,『高句麗 城Ⅱ-遼河 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______, 1999b, 「高句麗 後期의 軍事防禦體系와 軍事戰略」『韓國軍事史硏究』3, 國防軍事硏究所.
______, 2000, 「고구려 천리장성의 경로와 축성배경」『국사관논총』91, 국사편찬위원회.
______, 2007, 「고구려의 기원과 문화 기반」『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동북아역사재단.
吳舜濟, 1998, 「2세기末~3세기 中葉 高句麗의 遼東 進出에 對한 硏究」『선사와 고대』11, 한국고대학회.
윤명철, 2003,『고구려 해양사 연구』, 사계절.
______, 2006,『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삼성경제연구소.
李基東, 2005, 「高句麗의 勢力圈 遼東에 對한 地政學的 考察」『高句麗硏究』21, 高句麗硏究會.
이강래, 1994, 「대 이민족 투쟁과 애국심의 문제」『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 대륙연구소출판부.
李丙燾, 1977,『國譯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이송래, 1993, 「考古學的으로 본 高句麗建國 以前의 桓仁-集安地區의 文化社會性格(試論)」『馬韓·百濟文化』13,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李龍範, 1966,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白山學會.
이인영, 2006, 「고구려지명의 지명어미에 대하여」『일본연구』27,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
林起煥, 1998, 「高句麗 前期 山城 硏究」『國史館論叢』82, 國史編纂委員會.
______, 2007, 「고구려의 멸망과 계승」『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동북아역사재단.
임용한, 2001,『전쟁과 역사-삼국편-』, 혜안.
조희승, 2004, 「고구려력사연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북한의 최근 고구려사 연구』1, 고구려연구재단.
池培善, 1986,『慕容燕의 中國化 政策과 對外關係』,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池炳穆, 1987, 「高句麗 成立過程考」『白山學報』34, 白山學會.
채희국, 1985, 「고구려의 성곽」『고구려력사연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千寬宇, 1989, 「慕容廆의 遼東郡 · 玄兎郡 장악」『古朝鮮史 · 三韓史硏究』, 일조각.
황기덕, 1963, 「두만강 유역의 철기시대에 대하여」『고고민속』1963-4, 사회과학출판사.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渾江市文物志』.
馬大正 외, 서길수, 2007,『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 여유당.
無順市博物館, 1992, 「遼寧新賓縣高句麗太子城」『考古』1992-4.
蘇長淸, 1985, 「高句麗早期平原城」『遼寧省本溪丹東地區考古學術討論論文集』.
辛占山, 1994,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1994-2.
王綿厚 · 李建才, 1990,『東北古代交通』, 藩陽出版社.
魏存成, 1985, 「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1985-2.
劉明光(주편), 1998,『中國自然地理圖集』, 第2版, 中國地圖出版社.
劉威(책임편집), 1998,『遼寧省實用地圖集』, 哈爾濱地圖出版社.
李殿福, 1986, 「兩漢時代的高句麗及其物質文化」『遼海文物學刊』創刊號, 遼寧省考古博物館學會 · 省博物館 · 省考古硏究所.
______, 1994,『東北考古硏究』(二), 中州古籍出版社.
李殿福 · 孫玉良, 강인구 · 김영수(공역), 2005,『중국 학자가 쓴 고구려사』, 학연문화사.
林植樹, 1994,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5, 韓國文化財硏究振興財團.
田中俊明, 金希燦(역), 1999, 「성곽시설로 본 고구려의 방어체계」『高句麗硏究』8, 高句麗硏究會.
田中俊明, 1994, 「高句麗の興起と玄免郡」『朝鮮文化硏究』1, 東京大學敎.
________, 1997, 「高句麗前期 · 中期の遼東進出路」『朝鮮社會の史的展開と東アジア』, 山用出版社.
Basil Henry Liddell Hart, 주은식(역), 2004,『전략론』, 책세상.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