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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삼족오, 조선 사대부의 넋이 되다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  입력 : 2012-06-27 10:03:14ㅣ수정 : 2013-01-30 15:53:39

조선 전기의 문신 가운데 이곤(1462~1524년)이라는 인물이 있다. 

중종은 반정에 참여한 이곤을 연성군에 봉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 성남시 판교에 자리잡고 있다. 묘비는 그의 사후 35년 뒤인 1559년 손자인 이숙이 조성했다. 그런데 묘비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문양을 발견할 수 있다. 비석의 머리(비두)에 새겨진 ‘삼족오(三足烏)’의 문양이다. 비두는 구름 문양과 수평선의 파도문양에 바다가 보이는 일출광경을 그렸다. 해의 안에는 바로 그 삼족오가 요즘 말로 아주 ‘깔쌈’하게 새겨져 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고구려의 기상과 정신을 표현한다’는 상징물이 왜 유교이념이 골수에 박힌 조선의 사대부 묘비에 새겨진 것일까. 

하기야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 때도 그랬다. 심지어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삼보명자수가사(三寶名刺繡袈裟)>에도 삼족오를 수놓았으니 말이다. 이 뿐이 아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1085)의 상단에도 삼족오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보면 나라가 바뀌고 사상이 바뀌고 통치이념이 바뀌어도 삼족오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이 있다는 이야기다. 


연성군 이곤의 묘비에 새겨진 삼족오. 구름문양과 수평선의 파도문양에 장엄한 일출광경을 새겼다. /손환일 박사 제공

■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뜨다

<산해경>, <회남자>, <초사> 등 중국문헌에 나온 이야기를 종합한 재미있는 전설이야기 하나.

“태평성대의 시절이라는 요임금 때의 일이다. 산동지방으로부터 바다 동쪽, 태양이 솟는 곳에 양곡(暘谷)이 있었다. 이곳을 지배한 이는 동방의 천제 제준(帝俊)이었다. 부인은 태양의 여신 희화(羲和)였다, 둘은 모두 10명의 아들, 즉 10개의 태양을 낳았다. 

이들은 열흘을 주기로 하루에 하나씩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태양엔 모두 세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매일 반복되는 운행주기에 10개의 태양들은 싫증을 느꼈다. 어느 날 장난기가 발동한 태양들이 부모 몰래 일제히 떠올랐다. ‘우리는 재밌게 한번 놀아보고…. 인간들에게는 또 열배의 이익을 안겨주면 되고…. 그러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세상은 정반대로 돌아갔다. 10개의 태양이 쏟아내는 땡볕에 세상의 만물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요임금의 호소를 듣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부모가 말렸지만 아들(태양)들은 듣지 않았다. 천제(제준)는 할 수 없이 명궁 ‘예’를 불렀다. 예는 태양을 차례차례 쏘아 맞추기 시작했다. 빛을 잃고 떨어지는 태양을 보니 그것은 심장에 화살이 박힌 삼족오였다. 예가 10개 중 9개의 태양을 떨어뜨리자 요 임금의 걱정이 하늘을 찔렀다. 10개 모두가 떨어지면 암흑천지가 되어 종말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 임금은 화살 하나를 감추었다. 이로써 한 개의 태양만이 남게 됐다. 


경기 성남 판교에 있는 연성군 이곤의 묘비. 떠오르는 동방의 나라, 조선의 일출을 그리면서 삼족오를 새겨넣었다.


■ 복숭아, 제삿상에 올리지 않는 까닭

그러나 예는 고국(천제의 나라)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귀한 아들 9명이나 잃은 천제(제준)가 예의 지나친 징벌에 화를 낸 것이다. 할 수 없이 지상을 떠돌던 예는 물의 신인 하백의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 예의 본부인인 항아(姮娥)는 남편의 일탈에 분노했다. 항아는 남편이 얻어온 불사약을 혼자 마시고는 달로 올라가 버렸다. 뒤늦게 남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빠진 항아는 두꺼비로 변신했다.”

한편 지상에 남아야 했던 예는 제자들에게 활을 가르치면서 시름을 달랬다. 그런데 제자 가운데 봉몽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아무리 활을 잘 쏜다해도 스승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여겼다. 질투에 사로잡힌 봉몽은 사냥에서 돌아오는 예를 복숭아 방망이로 때려죽였다. 10개의 태양으로부터 세상을 지킨 예는 이렇게 허무한 종말을 맞는다. 예는 이때부터 귀신의 우두머리가 됐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네 제삿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귀신의 우두머리인 예도 싫어하는 복숭아를 조상귀신들이 더더군다나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 삼족오 신앙=천손신화+난생신화

중국의 신화학자들도 ‘예’를 동이계 종족의 신일 것으로 추정한다. 

“까마귀가 태양을 운행시키는 것이다. 결국 새를 토템으로 하는 종족과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 이 삼족오 신앙이다.”

중국 신화학자 쑨쭤윈(孫作雲)은 “새와 해를 토템으로 한 종족은 바로 동이족”이라고 단정지었다.

‘예’의 신화를 보면 동이의 냄새가 가득하다. 중국 산동반도도 결국 동이계의 터전인 발해연안에 속해 있다. 또한 신화내용 중 산동지방으로부터 바다 건너 동쪽은 어디를 뜻하겠는가. 또 활쏘기의 명수인 예와 봉몽은 고구려 신화의 명궁인 주몽을 연상시킨다. 고구려와 부여 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 하백이 예의 신화에 등장하는 것도 심상찮은 대목이다.

하기야 가장 오래된 삼족오의 문양은 역시 동이의 일파로 중원을 석권한 (은)상나라 시대 때 처음 보인다. 즉 은(상)의 수도인 인쉬(殷墟) 허우자좡(侯家莊) 1004호 묘에서 발굴된 청동제 사각형 솥의 문양은 가장 이른 시기의 삼족오 형상이다. 

한 때 삼족오는 한나라 시대의 고분벽화나 화상석, 기물장식 등에도 일부 전해졌다. 그렇다면 동이만의 전유물은 아닐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물론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대부분의 삼족오 문양은 동이계의 전통인 돌무덤에서 확인된다, 돌무덤은 고구려와 백제 등으로 이어지는 동이계의 전통 장례 방식이다. 이형구 교수는 “한나라 시대든, 어느 시대든 그 곳에 살고 있던 동이계 주민들의 문화이자 신앙으로 면면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것도 수·당 시대를 지나면 중국에서의 삼족오 신앙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평양 진파리 7호분에서 출토된 일중삼족오금동관식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원 안에 삼족오를 둔 관식이다.


중국 지안의 각저총 벽화에서 확인된 일중삼족오. 삼족오의 대표문양처럼 완벽한 모습이다.

삼족오 신앙은 쑨쭤윈의 언급대로 태양숭배사상과 조류숭배사상의 결합신앙이다. 달리 말하면 천손신화와 난생신화의 결합신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동이계 나라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대표신앙이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추모왕(주몽)은 ‘천제의 아들이자 황천의 아들(天帝之子 皇天之子)’이라 했다. 북부여 출신인 모두루 묘지에도 ‘일월의 아들(日月之子)’이라는 표현이 있다.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계의 천손의식을 드러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사실 <삼국유사>를 읽으면 천손신화와 난생신화가 교묘하게 결합된다. 즉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관계를 가졌다. 임신부가 된 유화는 햇빛을 받아 알을 낳았는데, 그 이가 바로 주몽이다. 한마디로 주몽은 10개의 하늘에서 살아남은 한 개의 태양, 즉 삼족오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랬으니 고구려는 태양에서 살면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삼족오를 숭배한 것이다. 

1941년 평남 중화군 진파리(평양시 력포구역 무진리) 7호 고분에서 고구려 왕관으로 추정되는 관식(冠飾)이 출토됐다. 제작시기는 4~5세기로 추정됐다. 그런데 이 관식의 이름은 ‘일중삼족오금동관식’이다. 즉 태양을 상징하는 원 안에 삼족오를 둔 금동관식인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허다한 사례가 보인다. 태양 속 삼족오인 ‘일중삼족오’는 물론 ‘달 속 두꺼비’인 ‘월중섬여’를 묘사한 벽화가 부지기수다. 즉 무용총과 각저총, 장천 1호분, 안악 1·3호분, 복사리 벽화고분, 태성리 연화총 등에서 확인된다. 또 약수리, 삼묘기 중묘, 쌍영총, 덕화리 1·2호, 진파리 1·4호분 등…. 이와함께 우산하묘구 사신총, 오회분 4·5호묘 등에서도 보인다.


지안 오회분 4호에 그려진 삼족오

여기서 ‘일중삼족오’와 함께 보이는 ‘월중섬여’, 즉 ‘달 속의 두꺼비’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예의 신화’와 일맥상통한다. 즉 남편 예를 배신하고 혼자 불사초를 먹은 뒤 달 속으로 숨은 항아가 뒤늦게 후회하면서 두꺼비로 변했다는 바로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중국의 고대신화인 ‘예의 신화’는 고구려의 신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삼족오 ‘가운뎃다리’의 비밀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왜 하필 까마귀 중에서도 세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이어야 하는가 말이다. 당나라 서견(徐堅)은 삼족오를 두고 아주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해 안에 있는 삼족오를 양정(陽精)이라 한다. 그것은 온윤한 곳에서 성장한다”(서견의 <초학기(初學記>)

이형구 교수(동양고고학연구소장)는 “양정(陽精), 그러니까 세 발 가운데 하나(가운데)는 남성의 상징인 양물, 즉 생식기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월중섬여와 함께 해석한다면 “삼족오는 양(陽), 달 속의 두꺼비(월중섬여)는 음(陰)을 뜻한다”(<문선·文選>)는 풀이가 설득력을 갖는다. 오묘한 음양의 조화이다. 


■ 일본축구의 엠블럼이 된 삼족오

어떻든 삼족오의 뿌리는 이처럼 깊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대부인 연성군 이곤 묘비에 새겨진 문양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즉 구름 사이로 펼쳐진 수평선에 떠오르는 일출….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 속에 보이는 ‘삼족오’…. 


오회분 4호묘에 표시된 일중삼족오.

“그것은 곧 해뜨는 동방의 나라, 조선의 상징을 새긴 것이 아니었을까. 이 문양은 동이족, 즉 한민족을 상징하는 징표이자 민족신앙이 아니었을까.”(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

그런데 요즘엔 어떨까. 관념으로만 ‘삼족오’를 ‘고구려의 상징’으로 여길 뿐, 그저 죽음을 연상시키는 까마귀, 즉 흉조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축구협회의 엠블럼과, 일본축구대표팀의 유니폼에 ‘삼족오’ 문양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기만 하면 마치 큰일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또 일왕의 즉위식에 입는 곤룡포에 삼족오의 문양이 있다면 또 어떨까. 


일본축구협회 엠블럼. 삼족오가 축구공을 다루고 있는 문양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삼족오 신앙은 만만치 않다. <고사기> 등 8세기 일본 문헌에는 ‘야타가라스(八咫烏)’라는 신령스런 까마귀가 나온다. ‘야타(やた)’는 ‘대단히 큰 것’이고, 가라스(がらす)는 까마귀이다. 이 상상 속 까마귀가 건국의 신이라는 진무(神武) 천황의 동정(東征) 때 길잡이를 해줬다는 전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천황 가문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 도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일본이 삼족오 신앙을 믿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고구려 기상의 상징인 삼족오를 지금 당장 국가와 민족의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한다면? 아마도 국수주의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냉소하고 폄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이 순간 ‘까마귀를 흉조’로만 여기고, 터부시한다면…. 아마도 ‘김치’가 ‘기무치’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들이 생길 수도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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