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294.html

백제 유민, 망명지로 왜를 택하다 
[2009.07.03 제767호]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백제와 신라가 ‘동족’이고 왜국은 ‘이민족’인 국사관에서는 의아하겠으나 660년대 백제인의 혈맹은 일본
             
한반도 역사 전체를 통째로 봐도 ‘대대적 이산(離散)의 시대’라고 할 만한 시기는 두 번 찾아온다. 전통국가가 멸망하고 각종 고통 속에서 근대국가가 탄생되는 19세기 말부터는 근대의 ‘이산의 계절’이었고, 전란의 화염 속에서 한반도의 대부분이 한 고대국가로 뭉쳐갔던 7세기는 고대의 ‘이산의 계절’이었다. 근대의 이산 경험에 대해 우리가 통상 ‘비극’이라고 보는 이유 중 하나는, 일제의 징병과 징용 등 비자발적 이산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7세기의 ‘대(大)이산’에 대해서도 같은 측면에서 “신라에 의한 한반도 대부분의 통일을 수반하는 비극”이라고 이야기할 만하다.


» 오카야마현의 유명한 신사인 다카노 신사. 약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신사에서는 백제인 계통의 다카노 미야쓰코 가문의 조상신을 기리고 있다. 즉, 백제 왕족의 후손을 기리는 셈이다. 사진 www.geocities.jp
 
백제인의 절대악은 ‘국망의 원흉’ 신라

통일신라의 굴기(屈起)에 수많은 한반도 주민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신라의 동맹국인 당나라에 의한 강제 이향(離鄕)이었다. 예컨대 신라의 최대 라이벌인 고구려의 멸망(668) 이후에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인들을 2만8200호나 끌고 가 당나라의 여러 지역에 분산 정착시켰다는 기록이 있다(<구당서> 권5). 한 호(戶·대가족)가 적어도 5명 이상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15만 명 정도의 고구려인들이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다고 봐야 한다. 그중 일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가를 받았다고 하지만(<신당서> 권220) 수만 명의 고구려인들이 고향을 평생 보지 못한 채 제국의 질서에 순응해야만 했다. 백제도 660년 멸망 직후에 1만2천 명 정도의 포로가 당나라에 끌려가고 말았다(<삼국사기> 권5).

물론 당나라로 강제 유입된 한반도 주민들을 불쌍하게만 여길 필요는 없다. 개방적 다종족 제국 질서 속에서 어쩌면 고국보다 생계유지나 신분상승이 더 쉬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 제국을 위해 파미르고원을 넘어 오늘날의 타슈켄트 지역을 정복한 고구려 계통의 장수 고선지(高仙芝·?~755)를 비롯해 중국에서 출세한 고구려 유민의 사례들은 꽤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당나라에 의한 강제 사민(徙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아픔을 수많은 한반도 주민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7세기 한반도인들의 이산은 20세기의 이산과 마찬가지로 꼭 타의로만 이뤄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절대악이라고 여기던 일제 식민통치보다 차라리 중국이나 미국, 러시아 등 ‘덜 나쁜’ 외세의 권역 내에서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이는 길을 택하지 않았던가. 많은 백제 귀족들도 660년의 국망 이후 이와 같은 정치망명을 갔다. 이들에게 절대악은 백제 국망의 원흉인 신라였다. 그리고 조상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망명지는 왜국, 즉 일본열도였다.

별다른 근거 없이 신라인과 백제인을 ‘동족’으로 취급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는 이런 망명의 경로는 괴이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와의 적대관계를 이미 한 세기 넘게 경험한데다, ‘수많은 백제계 호족과 평민들이 살고 백제 문화가 많이 유입된 곳’으로 일본열도를 인식했던 660년대의 백제인들에게 신라보다 일본열도가 더 친근하게 보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660년대 많은 백제 귀족들의 도일(渡日) 망명은 우리 ‘국사’ 교육 체계에서 ‘기피 주제’에 속한다. 국정 국사 교과서(2002)에서 언급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기백 선생의 <한국사신론>(1967)이나 한우근 선생의 <한국통사>(1969)와 같은 권위 있는 개설서에서도 이 문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백제의 문화적 은혜를 입은 왜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결국 백제를 망치고 말았다고 못박는 신채호의 <독사신론>(1907) 이후로는 백제와 왜국 사이의 ‘혈맹관계’ 문제는 민족주의적 사학자들에게 꽤 ‘불편한’ 주제가 된 셈이다.

귀실집사는 400여 명을 데리고 도일 망명


» 도다이지의 대불. 국가 불교의 상징인 도다이지 불사에는 황금 900냥을 진상한 백제왕 경복 등 백제계 귀화인 집단이 큰 기여를 했다. 사진 www.7is7.com

그러나 우리에게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동시대인들도 꼭 똑같이 느꼈던 것은 아니다. 백제 귀족들의 도일 망명에 대한 <일본서기>(663)의 기록을 보면, 왜의 구원군과 백제 저항군이 어깨를 나란히 해서 싸웠던 주류성(충남 서천, 전북 부안 우금산성 등으로 추측됨)이 당나라와 신라 군대에 함락되자 백제 귀족들의 공통된 의논은 다음과 같았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으랴. 다만 호례성에 가서 일본군 장수들과 논의해야 할 일을 상의하자.”

항구로 보이는 호례성에 가서 왜국 구원군의 장수들과 상의할 일이란 처자를 데리고 도일하는 방법이었다. 백제의 여명마저 다 끊어졌다는 걸 확인한 백제 유신(遺臣)들에게 최후의 선택으로 도일 망명이 생각됐던 것은 절대 우연은 아니었다. 그만큼 백제와 일본이 역사·문화적으로 가까웠던 것이고, 또 그만큼 ‘혈맹 일본’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강했을 것이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이 기대만큼은 적중했다. 그들은 일본에 가서도 어느 정도 신분 유지가 되고 백제인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살 수 있었다.

신라보다 차라리 왜국을 선택한 백제인들은 대체로 누구였던가?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여러 이름 가운데 좌평(佐平)이라는 최고 관등을 지닌 왕족 여자신(餘自信)이 눈에 띈다.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유명한 여자진(餘自進)과 이명동인으로 보이는 그는, 일본에서 다카노 미야쓰코(高野造)라는 유명 가문의 선조가 됐다. 이들이 오늘날 오카야마현 쓰야마시 다카노 지역에서 세거하게 됐는데, 그 지역의 유서 깊은 신사인 다카노 신사는 바로 이 가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거기에서 지금도 다카노 미야쓰코 가문의 조상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자신과 함께 백제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또 한 명의 귀족은 귀실(鬼室)이라는 유명 가문의 대표자 격인, 귀실집사(鬼室集斯)라는 인물이었다. 그가 단순히 처자만 데리고 간 것도 아니고 400여 명의 ‘백제 남녀’를 대동하고 갔다는 기록은 <일본서기>(권27)에서 전해진다. 그들이 가문의 예속민(노비 등)이었는지, 아니면 전란을 피하려는 일반 양민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백제 귀족들의 도일 망명이 대규모 집단이주의 성격을 지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귀실집사는 백제 부흥운동의 영웅인 귀실복신 장군의 가까운 친척이어서 그랬는지 왜국 정권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일본에서 받은 그의 관품은 12위인 소금하(小錦下)였다. 정치적 기반이 없다시피 한 망명객 출신으로서는 상당한 출세라고 봐야 한다. 거기에다 그는 학직도(學職頭)라는 관직을 얻어 유교적 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는데, 그만큼 소양과 학식을 인정받았다.

백제 왕족에게 예우를 해준 이유

처음에 귀실집사와 그 추종 집단은 오미노 구니(近江國·오늘날 시가현)의 간자키(神前) 지방에서 집단 거주했다. 왜국 조정은 그 뒤 669년 여자신의 추종 집단과 귀실집사의 추종 집단을 합쳐 약 700명의 백제인들을 같은 오미노 구니의 가모(蒲生)군에 함께 옮겨 살게 했다. 황무지가 많았던 그곳에서 백제인들이 선진 농법을 써서 개간할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가모군의 백제인들은 어느 정도의 자치를 누렸으며 오랫동안 자신들의 기원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지녔다. 지금도 그 고장에는 망명 백제 귀족인 귀실집사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시쓰(鬼室) 신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실, 백제와 관련성이 있는 신사나 사찰은 일본에서 꽤 흔히 보이는 편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오사카 근교의 히라카타(牧方)시에 있는 백제왕 신사다. 이곳은 7~8세기에 ‘구다라노 고니기시’(百濟王)의 씨족이 세거했던 곳인데, 즉 말 그대로 ‘일본 속의 작은 백제’였다. 8세기에 이곳에 건립된 사찰이 소실되고 없어졌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실의 일파를 기리는 백제왕 신사는 그대로 살아남아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에게 명소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지내는 제사의 대상 중 가장 오래된 인물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善光)이다. 그는 애당초 의자왕의 대리인으로 왜국에 상주했는데, 나라가 망하고 형제인 부여풍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아예 왜국에 그대로 잔류하고 만다. 거기에서 그가 왕족의 대우를 계속 받았다는 것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원래 성인 부여씨 대신에 ‘구다라노 고니기시’, 즉 백제왕이라는 성씨를 특별히 사성(賜姓)받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패망한 백제의 왕족에게 이만큼 예우를 해주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일본 귀족사회에서 백제 계통의 가문들이 선점하던 지위, 즉 이미 보유하고 있던 영향력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純陀 또는 淳陀)의 후손들이 왜국에서 야마토노 후히토(和史)라는 성을 갖게 됐는데, 그 가문 출신인 다카노 니이가사(高野新笠·?~790)는 고닌(光仁·재위 770~781) 천황의 애첩으로, 다음 세대인 감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의 생모였다. 일본 천황가를 “모계 쪽은 백제계”라고 이야기할 때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백제 왕족이면 일본에서 그 위상에 상응하는 예우를 쉽게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왕 선광도 일본의 귀족 관료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됐다. 9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 후손들은 속된 말로 ‘잘나가는’ 쪽에 속했다. 그중 한 명인 백제왕 경복(敬福·697-766)이 말년에 상당한 요직인 형부경(刑部卿·법무부 장관)에까지 올랐다. 그가 743년 일본 동북 국경 지방인 무쓰노구니(陸奧國)의 지방관이 되고 거기에서 금을 발견해 749년 900냥이나 천황에게 진상해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 조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도다이지를 구경하는 수많은 한국 관광객들은, 과연 그 커다란 불사를 위해 필요했던 황금을 오늘날의 이와테·아오모리현인 무쓰노구니에서 백제계 광산 기술자들이 산출했을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기나 하는가.

문화·언어·전통 차원에서도 더 가까워

이만큼 고대 일본과 백제, 백제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백제왕 경복의 후손들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물론 백제계인 감무 천황 시절, 즉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반이었다. 자신의 어머니 쪽 뿌리가 백제에 있다는 걸 인식한 감무 천황은 790년 백제왕 가문을 ‘외척’으로 대우할 것을 특명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 백제왕 가문은 점차 쇠퇴했지만 그 후손임을 자칭하는 가문들이 중세 일본에 여럿이 있었던 걸로 봐서는 그 명성은 길이 남아 있었다.

민족주의의 세례를 이미 받은 우리로서는 백제와 신라가 ‘동족’이고 왜국은 ‘외국’이자 ‘이민족’이다. 하지만 여자신과 귀실집사, 왕자 선광 등 수많은 백제인들에게는 적국 신라보다 왜국이 훨씬 친근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백제와 왜국의 가까움은 자명하지만 문화·언어·전통 차원에서도 백제와 신라 사이의 거리는 백제와 왜국 사이의 거리보다 결코 짧지 않았으리라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적 ‘민족’이나 ‘국경’을 고대에 그대로 투사시키면 큰 오산임을 기억해야 한다. 신라 지배 밑에서 사는 것보다 차라리 도일 망명을 선택한 백제 귀족들이 신흥 율령국가인 당시 일본의 귀족 관료 사회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잘 편입했으며, 7세기 말~8세기 일본 문화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4세기 중반에 맺어진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거의 9세기 초반까지 백제계 귀족 가문들의 영향력 행사 등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백제의 역사는 한국사로도 일본사로도 동시에 이어지는데, 이를 자랑스럽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하지 않나 싶다. 이와 같은 역사는 언젠가 한·중·일이 같이 어울려 살 수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재당 신라인 사회 연구> 권덕영, 일조각, 2005, 52~55쪽
2. <단재신채호전집>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2007, 제3권, 335쪽
3. <사료를 보니 백제가 보인다 (국외편)> 정재윤, 주류성, 2007, 166쪽
4. <백제부흥운동사> 노중국, 일조각, 2003, 279~285쪽
5.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김현구, 창비, 2002, 125~161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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