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ysculture.com/02_hyangto/23_uglyjapan.htm


왜군 만행의 상징 귀무덤 코무덤

일본 고도인 교토에 가면 헤이안진꾸, 낀카쿠지, 시미즈사 등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유명한 고적들이 많지만 한국인이라면 꼭 찾아 볼 수 밖에 없는 가슴 아픈 유적이 귀무덤이다. 귀무덤 앞에 서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잔학상에 고개를 젖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4백주 년 조사단은 귀무덤을 찾기에 앞서 오카야마(岡山)의 코무덤을 조사했다. 오카야마는 왜군으로 서울을 점령했던 우키다히데이에(宇喜多秀家한성부사령관)의 고향으로 그가 저지른 잔학한 만행이 코무덤으로 남아 역사의 증언을 해주고 있었다. 오카야마 역에서 아카호선(赤穗線)을 타고 50분정도 가면 가도(香登)역에 닿게 되고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쇼고엔(尙古園)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나오는데 그 오른 쪽에 코무덤이 있다.

가토마찌의 공민관 관장인 하마다 히로시(濱田博80)씨가 조사단을 안내했다. 그는 지난 82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황폐화되어 가던 코무덤을 시민성금을 모아 정비하여 이 지역에서는 코무덤의 할아버지로 알려져있는 유지다.

교토의 귀무덤처럼 거대한 봉분이 있고 규모있는 무덤인줄로 예상했던 조사단에게 하마다씨가 보여준 코무덤은 평지에다가 주춧돌 10여 개로 장방형(5x3미터) 표지를 해놓은 정도였다. 다만 산쪽으로 높이가 2미터 정도 되보이는 조그만 일본식 사당이 있고 입구에 코무덤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어 주춧돌로 둘러쌓여 있는 부분이 코무덤임을 알게해 줄뿐이다.

82년 정비 당시 세운 안내판에는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으로 출병하여 엄명에 따라 적병의 머리대신 코를 가져와 장사지낸 곳이다. 우키다히데이에의 가신인 나가후네노리이노가미(長船紀伊守)의 깃발을 들고 다닌 로크스케(六助)라는 스님이 적병이지만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위해 코무덤을 만들고 조그마한 사당을 지었다. 그 이후 '천인비총(千人鼻塚)이라는 이름으로 가토촌에 전해지고 있는데 근년 사당이 황폐화되 도괴 직전에 놓임으로 6백3십 명이 성금을 협조, 사당을 재건하고 '천비령사(千鼻靈社)로 개명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기록에 따르면 코무덤을 만든 로크스케스님은 기골이 장대하여 180cm이상이었다고 한다. 힘이 셌기 때문에 기수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남원전 전투에서 기수로 참전하면서 왜군들이 전과를 과장하기 위하여 당시 조선군은 물론 무고한 농민들의 코까지 자르는 만행을 목격하고는 자책의 의미로 가토에 왜군이 귀국하며 가져온 코들을 묻고 천인의 코무덤이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측 기록(임진왜란 연구서)에는 풍신수길이 전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귀, 코, 혀를 절추해 보내도록 명령을 내려 이를 실행한 사례가 여러 곳에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목을 베었으나 너무 부피가 크자 귀 코를 절취해 소금에 절여 보냈다는 것이다.

우키다히데이에의 경우 1597년 남원전투에서 성을 함락한 후 622면 분의 코를 베어내 소금으로 절여 항아리에 담아 나고야성의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도도타카도라(藤堂高虎 유학자 강항을 오즈로 잡아간 왜장 ) 도 421명 분의 코를 절취해 히데요시에게 칭찬을 받았다. 이와 같은 왜군의 끔찍한 만행은 우스노키(臼杵)의 성주 오오다카스요시(大田一吉)가 코의 수를 확인하고 확인서를 떼어준다. 도사의 번주(藩主) 나카소아배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는 코를 벤 것이 6천 6개인데 이를 천 개씩 소금에 절여 6개의 나무통에 넣어 참모에게 맡겼다고 기록했는가 하면 사쓰마(薩摩)의 번주 시마쯔요시히사(島津義久)는 1597년의 사천성 전투에서 무려 3만 8천 명분의 코를 절취해 10개의 나무통에 넣어 일본으로 가져왔다는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유적을 집대성한 것이 교토의 귀무덤이다.

토요토미히데요시를 모셔놓은 토요쿠니진자의 정문에서 2백m 떨어진 도로 옆에 있는 귀무덤은 토요토미히데요시에게 복을 비려고 온 일본인들이 줄을 지어 있는 것에 비해 그저 철책에 둘러쌓인 채 침묵 속에 있을 뿐이다.

이곳은 1966년 교토시의 사적으로 지정돼 보호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토요토미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은 옛날부터 일반적인 전공의 표시로 했던 수급(머리)대신 조선군민 남녀의 코와 귀를 절취,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것들을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명에 의하여 이곳에 묻었다고 되어있다. 당시 기록에는 1597년 9월 12일 규슈의 나고야성에 조선 각지로부터 수집된 귀와 코가 15개의 나무통에 절여져 실려온 뒤 묻혔다고 하니 엄청난 수량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히데요시가 9월 28일 교토에 있는 승려4백 명을 동원, 이들을 위해 불공을 드려줬다는 사실이다.

조사단의 신기수씨는 히데요시가 원혼들을 무서워 했다기보다는 자신의 박애정신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교토 5대 사찰중의 하나였던 소오코쿠지(相國寺)의 승려로 히데요시의 정치고문이었던 니시와라쇼오다이(西笑承兌)는 '히데요시는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비심이 두터운 인간으로 조선인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어주고 귀무덤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왜군에게 끌려와 교토에 살던 조선인 2천여 명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귀무덤의 원혼들을 위하여 제를 드렸다고 한다. 그들은 쌀과 야체를 각자 가지고와 제를 지내려했으나 제문을 쓸줄 몰라 마침 교토 부근 후시미(伏見)에 와 있던 유힉자 강항(姜沆)선생에게 부탁'베어진 코와 귀가 산을 이룬 언덕은 서쪽에 있고 원혼의 큰 뱀은 동쪽에 있다'는 글을 받았다고 한다. '원혼의 큰뱀은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강항선생은 조선인의 신체를 소금에 절이도록 명령한 히데요시가 그의 사후 토쿠카와이에야스 등 5대 보좌(五大老)에 의해 소금에 절여진 것은 잉과응보라고 간양록(看羊錄)에서 밝혀 흥미롭다. 히데요시가 죽자 당분간 그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5대 보좌가 히데요시의 복부에 소금을 넣고 부폐하지 않도록 한 후 겉에는 관복을 입혀놨음을 지적한 것이다.

귀무덤은 건립되게 된 사연이 너무나 잔인한 탓인지 안내판의 끝부분에는 일본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반성의 내용이 들어있어 주목된다.

히데요시가 방약무인하게 일으킨 전쟁은 조선반도에서 밑으로부터의 저향에 의해 패전으로 끝났다. 전쟁이 남긴 귀무덤은 전란에서 당한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 전하고 있다.

홍종필(명지대, 교토대 객원교수,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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