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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를 전후한 하슬라의 입지 연구

오랫동안 하슬라는 곧 강릉이라는 해석이 통념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러한 통념을 전적으로 인정하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하슬라를 비롯한 신라의 명주지역이 과연 어디까지 고구려에 편입되었는지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다. 더구나 강릉을 곧 하슬라주로 인정한다면 고구려는 양양지역 이남으로는 진출하지 못하였다는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신라장군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로 임명되어 울릉도를 통합했다고 되어있지만, 잡지에는 실직주의 군주로 파견되었다고 되어 있어 서로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가지 문제점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하슬라주에 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신라 내물 이사금 42년(서기397년) 이며, 당시 기록은 아래와 같다.

가을 7월에 북변의 하슬라 지방이 가뭄과 누리(우박 혹은 이른서리)로 인하여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리므로 죄수를  석방시키고 1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하슬라주는 진흥왕때에 신라영토였음이 분명하다. 또 하슬라는 신라 최북단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행정적인 기능보다는 군사적인 기능이 강한 도시였다. 그리고 하슬라 지역의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말갈족등의 침입에 늘 시달려야 했으며,  고구려가 팽창하는 5세기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빈번하게 등장하게 된다.

그럼 문제가 되는 눌지 마립간 34년(450년)  7월의 기록을 살펴 보자.

고구려의 변방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하슬라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엄습하여 죽였다

이 기록은 짧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실직은 삼국사기 지리지 편에 삼척이라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어, 오늘날 까지 이름이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삼척은 강릉의 남쪽에 있지 않는가? 물론 과거에는 동해와 삼척지방이 하나의 행정구역이긴 하였지만, 강릉의 남쪽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당시 신라에 미치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신라 왕자를 볼모로 잡고 왕위계승 문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이긴 하지만, 삼직이란 인물을 하슬라주 성주로 파견한 것을 보면,  여전히 신라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직이란 인물이 고구려의 변방장수를 피습한 것 역시, 영토침입으로 간주하여 이러한 행동을 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슬라가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 중기에 이르기까지 신라영토였다는 사실은 자비마립간 재위 11년(468년)의 기록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에서 실직성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 사람으로서 나이 15세 이상이 된 자를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이하는 이천이라고도 한다.

하슬라가 신라영토가 아니라면, 그 곳의 사람들을 부역에 동원하여 이하성을 쌓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러한 국방강화정책이 효과를 거둔 것은 소지 마립간 3년(서기481)에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당시 신라는 백제 가야와 연합하여 총력전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을 뿐더러, 이하의 서쪽에서 대승을 거두어 1천명의 고구려 군을 참살할 수 있었다.

다만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이 시행됨으로 인해, 이 지역을 포함한 영동지역 대부분을 잃어 버렸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지증왕 13(512년)년 이사부 장군을 하슬라주 군주로 파견함으로 인해, 하슬라는 신라영토로 분명하게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앞서도 재기하였지만 삼국사기 잡지편에는 실직주의 군주로 파견된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삼척군은 본래 실직군인데 파사왕 때 항복해 왔다. 지증왕 6년(505년)에 州(주)로 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과연 이 서로 다른 이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것일까? 그런데 해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다. 삼국사기 잡지편에 보면 명주는 본래 고구려의 하서량인데 뒤에 신라에 소속되었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고 하서량은 하슬라라고도 쓴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슬라 = 명주지역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주 전 지역을 하슬라였다고 확대 해석 할 수는 없다. 즉 고구려의 영토에 있다가 후일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지역을 하슬라 라고 칭한 것이다.


고구려 영토였던 하서량은 군사적 요충지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선덕여왕때 소경으로 삼았다가, 말갈족의 침입이 잦은 이유로 곧 주로 강등된다.
 
그렇게 본다면 하서량 즉 하슬라는 강릉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강릉에서 삼척지역을 포함한 강원도 영동지역 일대를 하슬라주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하슬라주의 행정중심지가 적어도 이사부 장군시절에는 실직주 즉 삼척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구려 말갈족 등의 침입이 잦은 사정을 고려 하여 행정중심지를 비교적 안정된 후방에 배치하고자 한 고려 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울릉도 원정에 있어서는 임시로 하슬라 즉 강릉에 행정지를 옮기고 편리에따라 일을 처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내물왕 42년부터 자비왕 11년 (397~468), 하슬라는 신라의 명백한 영토였는지, 고구려가 편의에 따라 신라에 양도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왜냐면 눌지왕대에 고구려 변장이 삼척지역에서 사냥한 기록으로 보아,  삼척지역까지를 그들의 영토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강릉지역이 각광을 받고, 또 김주원 세력의 정착으로 인해 강릉이 하슬라라는 통념이 정착되기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슬라는 언제 신라에 편입되게 되었는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파사이사금 25년에 실직국이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평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하슬라 역시 당시에 이미 통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4~6세기에 전개된 하슬라주의 입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학술연구자에의해 진행되어야 겠지만,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6세기 이전에 지칭되는 하슬라주는 강릉에서 삼척지역에 이른 광역자치구였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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