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8>후고려기(後高麗記)(11) - 광인"에서 한 문단을 그리고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9>후고려기(後高麗記)(12)  - 광인"에서 대부분의 이정기 관련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7172987,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7173661


이정기 (1)

왕현지가 서귀도를 죽일 때, 그의 옆에는 후희일이 있었다. 옛날 당으로 끌려온 고려인의 후예이자, 훗날 평로치청이라는 독립왕국의 초대 군주가 될 이정기의 고종사촌 형이기도 한 그가 왕현지와 함께 서귀도를 내쫓고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추대했다. 발해와 고려 그리고 또 하나의 고려 역사를 전개할 인물의 대두를 뜻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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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8세기 당조는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융성한 문물수준과 잘 정비된 행정체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당조 안에서 사방 여러 나라들은 예전과 같은 위세를 누리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해봐야 당조가 만들어놓은 체제 안에서 내부에서만 황제를 칭하는 '외왕내제' 같은 방식으로 바깥으로 표출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당조에 그렇게 적대적이었던 고려를 계승했다는 발해마저도) 안록산의 난 이후 쇠퇴일로를 걸으면서도 여전히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그 한 시대의 기준이자 척도와도 같은 권세를 누리던 당 왕조. 그런 당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시대 앞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李正己, 高麗人也. 本名懷玉, 生於平盧.]
이정기는 고려 사람이다. 본명은 회옥(懷玉)이며,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사실 고려 사람이라는 것만 빼면 이 이정기라는 남자가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다만 그 출생지에 대해서는 '평로', 즉 지금의 요령성에 있는 영주(조양)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은 확실히 적어놨다. 고려가 멸망한 뒤 당이 설치했던 이른바 '안동도호부'는 당의 평로군에서 관장했는데, 그 평로군의 총책임자가 절도사다. 그리고 그 부임하는 치소는 영주에 있었다. 고려 유민들이 대거 사민된 곳으로 대조영도 잠시 살았던 그 도시. 그러니까 이정기와 대조영은 본의아니게 동향 사람이 된 셈이지. 살아생전 서로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그가 죽었을 때가 당 건중 2년(781)이고 그때 나이가 49세였다고 했으니 태어난 해는 발해 무왕 인안 13년(732). 장문휴 장군이 등주를 정벌하고, 무왕이 마도산을 치던 임신서정의 혼란기(라고 해야 하나?) 속에서 태어났다. 고려 유민의 저항과 신라의 반발로 평양에 제대로 못 있고 이리저리 떠돌다시피 하던 안동도호부가 평로로 치소를 옮긴 것은 이정기가 태어나기 27년 전인 705년의 일로, 그 무렵 이정기의 선대(조부나 증조부)는 이곳 영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당의 땅에 끌려온 고려 유민들은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만, 그들에게도 갱생의 길은 있었다. 군인으로 출세하는 것. 당시 당의 정책은 한족뿐 아니라 이민족들에게까지 출셋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더구나 고급 장교는 꼭 이민족 중에서 발탁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던 당에서 고려 유민이 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생존방법이었다. (무예라면 타고난 사람이었으니 어렵지는 않았겠지만)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이정기는 군인으로서 출세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불과 26세에 치청비장, 즉 평로절도의 부장 자리를 얻어 제법 출세했다 자부할 정도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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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元元年, 平盧節度使王玄誌卒. 會有敕遣使來存問. 懷玉恐玄誌子爲節度, 遂殺之, 與軍人共推立侯希逸爲軍帥. 希逸母即懷玉姑也.]
건원(乾元) 원년(758)에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왕현지(王玄志)가 졸하였다. 마침 사신을 파견해 조문하라는 칙이 있었다. 회옥은 현지의 아들을 절도사로 삼을까 걱정하여 바로 그를 죽이고, 군사들과 함께 후희일(侯希逸)을 추대하여 군수(軍帥)로 삼았다. 후희일의 어머니는 바로 회옥의 고모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자신이 섬기던 상관의 아들을 죽이고 대신 고종사촌형을 절도사 자리에 앉힌다ㅡ는 하극상은, 이미 이정기의 상관이었던 왕현지 자신이 선대 평로절도사였던 유정신을 후희일과 짜고 몰래 살해했던 순간부터 예고된 인과였는지도 모른다. 
 
이 무렵의 절도사의 지위란 자신이 통치하는 땅의 민정, 군사, 재정의 실질적인 권한을 모두 틀어쥔 그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천자가 평로에 조문사절을 보낸 것은 평로의 지배권을 당조로 귀속시키려는 조치였겠지만, 사태 파악은 역시나 평로번진의 현지사정에 훤한 이정기가 한수 위였다. 평로군에 있으면서 이정기를 따라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는 쿠데타에 동참했던 병사들은 거지반 그와 같은 고려계였고, 새로 추대된 후희일 역시 이정기와 같은 고려인이었으니. 고려인이 우글거리는 평로번진 안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건 당연한 이치.
 
평로번진의 치소는 지금의 차오양, 그러니까 옛날 고려 유민들(대조영 일가까지 포함한)이 강제이주당했던 그곳에 마련되어 있었고, 당의 평로와 노룡 두 군과 영주, 평주의 두 주(州)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설치 목적은 인근의 실위족과 말갈(어쩌면 발해?)을 통제하는데 있었다. 742년경 이곳의 군사로는 보병만 37,500명, 기병은 5,5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대체로 고려인들이 많았다고 여겨진다.
 
허나 평로번진의 앞날도 그리 밝지만은 못했던 것이, 일단 이곳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던 거점으로 당 조정이 경계하던 곳이었다. 거기다 이곳에 모여 살던 해족까지 평로번진에 우호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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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上元) 2년(761) 2월,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상원 2년, 발해 문왕 대흥 24년(761년) 5월, 후희일의 2만 평로군은 유주에서 사조의의 군세를 격파한다. 유주의 범양ㅡ지금 북경 서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에서,29세의 이회옥이 사조의의 군세를 격파하는데 큰 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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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 24년(761년) 12월, 평로군은 다시 한 번 사조의의 군세에 맞서 승리를 거둔다. 사조의의 부장이었던 범양절도사 이회선의 군세를 격파하고, 범양까지 남하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회옥이 큰 공을 세웠는데, 2만 평로군은 계속 진군을 계속해 발해만의 묘도 열도를 따라 등주로 상륙했다. 옛날 장문휴가 상륙했던 이곳 산둥 지역에, 평로군은 그들의 거점을 마련하려 했고, 앞서 이곳에 와서 활약하고 있던 전신공 세력과 합세하기에 이르렀다.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안전한 거점이 없으면 이리저리 떠도는 약탈군대로 전락할 수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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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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