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7/11/021163000200711220686026.html

고조선이 만주를 지배했다고?
요동 일부 지역만 통치, 연나라 침략 뒤엔 더 남하해…‘만주 고토 회복’이란 구호는 옳은가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 담론에서도 가끔 찾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한국 민족주의는 한 가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늘 평화의 민족임을 내세우고, 이 주장과 상충되는 역사적 대목들을 기억의 영역에서 추방한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동참한 사실은 단순히 파병으로 처리되는가 하면, 1107~08년에 수천 명의 여진족을 살상하고 그 삶의 터전을 빼앗은 윤관의 여진 지역 정복은 역시 침략이 아닌 정벌로 불린다. ‘착한 우리들’이 남을 ‘침략’했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수사법상 말해질 수 없는 이야기다. 또 한편으로는 한반도 고대 국가들이 한반도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것은 민족주의자들의 자랑거리다.

△ 민족주의자들은 고구려나 고조선의 만주 지배를 아예 현재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주에 있는 대표적 고구려 고분인 중국 길림성 장안시 태왕릉. (사진/ 한겨레)

친일파도 외친 ‘만주 회복’

국사 교과서에서도 고구려의 만주 지배나 고조선의 요령 지역 지배가 강조되지만, 재야 민족주의자들은 과거의 만주 지배를 아예 현재형으로 해석하려 하기도 한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1992년 한-중 수교와 중국 관광의 시작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차에다 ‘고토 회복’(故土 恢復) 같은 내용의 현수막들을 걸어놓은 채 고구려·발해 유적을 답사하는 단체들이 많이 등장했다. 이와 같은 도발적 행위는 나중에 악명 높은 동북공정으로 이어진 중국 관료들의 노이로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들은 소수였지만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의식이 의외로 극단적 국수주의와 관계없는 일반인 사이에서도 폭넓게 퍼져 있는 것이다.

“평화적이지만 옛날부터 광활한 영토와 강성 대군을 과시해온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상 매우 자가당착적인 담론이 형성된 것은 개화기였다. 무너져가는 국권을 다시 세우려 했던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우리가 만주를 차지했을 때”에 대한 기억에 호소해 옛날의 강성을 되찾자고 절규했다. 신채호(1880~1936)는 명저인 <독사신론>(1908)에서 고조선을 세운 단군이라는 정복자가 오늘날 심양(瀋陽)과 요동(遼東)의 영토를 두루 평정한 덕에 만주가 “우리 민족의 발상지가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 계통’의 국가로서 만주를 마지막으로 영유했던 발해의 망국을 무엇보다 억울한 일로 여겨, 발해사를 <삼국사기>에 싣지 않았던 김부식을 큰 죄인으로 몰았다. 같은 해에 그는 ‘한국과 만주’라는 논설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해 “한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민족이 강성하고, 다른 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민족이 쇠약해진다”는 ‘역사의 법칙’을 밝혔다. 이 논리에 따르면 당시 망국적 상황의 근원적 이유는 만주 회복에 실패한 고려왕조의 무능과 만주에 무관심했던 조선왕조의 문약(文弱)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만주 경영’ 타령까지 하는 것은 현실도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이 만주까지 가질 정도로 강성했다면 앞으로도 언젠가 만주를 되찾아 중국,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열강이 될 수 있겠다는 준제국주의적 욕망의 논리였다.

이 욕망은 개화기나 일제 시절에 꼭 신채호나 박은식(1859~1925)과 같은 항일 투사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와의 ‘협력’을 선택한 최남선(1890~1957)과 같은 ‘문화 민족주의자’도- 비록 <조선역사강화>(1930)에서 단군 시대의 조선을 “대동강 유역, 구월산 일대의 작은 나라”로 묘사했지만- ‘빛의 숭배’ 등 ‘고대 한국의 종교’가 만주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동북아 문화권의 중심이라고 보는 등 만주와 조선의 관계 설정에 주의를 기울였다. 최남선이 1938년에 만주로 건너가 괴뢰 만주국 건국대학의 어용 교수가 된 것을 해방 이후에 “조상의 땅을 답사했다”고 변명한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와 같은 친일파가 “일본 민족과 하나가 된 조선 민족이 만주를 활동의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사고를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일제에 항복한 것을 대가로 얻는 ‘만주 고토 회복’이라고나 할까?

요서는 산융과 고죽이 지배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에 일제에 협조적이었던 조선 문인의 상당수가 ‘만주 개척 소설’을 통해 ‘야만적 만주’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문명’을 전파해 ‘낙토’를 건설한다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나중에 북한에서 김일성 숭배의 주창자가 됐다가 숙청을 당한 한설야(1900~63)나 북한의 온갖 요직을 다 거쳐본 이기영(1895~1984)도 당시에 각각 일본어와 조선어로 ‘개척 소설’을 썼는데, 이기영의 소설 <처녀지>(1944)에서는 조선인 의사 남표가 한때 만주인들의 습격을 받았던 조선인 개척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해가면서 ‘우생학과 단종법’(민족 우생에 유전적으로 해롭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하는 것)이라는 ‘최첨단 과학 지식’을 가르치는 등 ‘야만적 만주를 깨우쳐주는 문명적 조선인’이라는 구도가 매우 선명했다. 이기영은 월북 이후에 일제의 비호 밑에서 이루어졌던 ‘만주 개척’을 찬양하는 일을 그만두었지만, <두만강>(1954~61)처럼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을 ‘조선 역사의 주류’로 묘사하는 그의 대하소설에서는 그 무대가 여전히 ‘원주민’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조선인이 가꾸는 만주 벌판이었다.

중국과의 관계를 잘 이끌어나가야 했던 북한에 비해 남한에서의 ‘만주 향수병’은 훨씬 노골적이었다. 일제 시절에 만주에서 공진항(1900~72)의 큰 농장의 관리인으로서 조선인과 중국인 소작인들을 착취했던 이선근(1905~83)이 이승만, 박정희의 어용 역사학자가 되어서 <화랑도 연구>(1949)와 같은 국군의 초기 정신훈련 교과서에서 만주를 ‘민족의 고토’라고 불렀다. “요령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강성”을 강조하는 교과서들이 쓰이는 근·현대사적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러면 민족주의적 상상이 아닌 역사의 현실 속에서 고조선이 과연 ‘광활한 만주 벌판’을 ‘지배’했던가? 고조선이라는 예맥(濊貊)족을 기반으로 했던 정치체가 중국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대략 기원전 4세기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위략>(魏略)이라는, 기원후 3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자료에서 왕을 칭하기 시작한 연(燕)나라를 공격하려다 중지한 ‘조선왕’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늘날 북경 근방의 지역을 기반으로 삼았던 연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왕을 칭한 것은 기원전 332년부터니까 그때쯤부터 고조선이 주변 세력들과 자웅을 겨룰 만큼 힘을 키웠다고 봐야 한다.


△ 일제에 협조적이었던 조선 문인 상당수가 만주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문명을 전파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해 길림성에 진주한 관동군. (사진/ 사진으로보는 독립)

그런데 과연 이 시기의 고조선이 만주를 지배했다고 볼 수 있는가? 만주 전체는 이야기할 것도 없지만, 오늘날 요령 지역만 해도 기원전 4~3세기에 다양한 종족 세력들에 의해 점거돼 있었다. 예컨대 요서(遼西), 즉 요령 지방 서쪽 지역은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중국을 이미 괴롭혀온 산융(山戎) 부족이 살았던 곳인데, 이들이 초기의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비파형 동검을 썼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요서 지역에 또 상(商)나라의 후계 집단으로 추측되는 고죽(孤竹)이라는 세력이 존재했는데, 바로 그들의 존재가 후대에 와서 조선을 개화하려 동쪽에 왔다는 상나라의 현명한 유신(遺臣) 기자(箕子)에 대한 설화로 꾸며졌다.

이처럼 종족적 구조가 복잡한 기원전 4세기의 만주 서남 지방에서 고조선의 위치는 어디쯤이었을까? 만약 고조선 문화의 주된 물질적 요소로 검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됐던 단경(短莖)비파형 동검과 지석묘, 그리고 표주박의 위아래를 조금씩 잘라낸 듯한 형태의 미송리형 토기를 생각한다면 이 모든 요소들이 같이 발견되는 곳은 대체로 요동 지역 정도다. 또 일부 자료에서 요동과 조선이 병렬적으로, 별도의 존재인 것처럼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는 고조선이 그때 요동 지역 전체에 세력을 뻗쳤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다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고조선이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지배자들이 연나라와의 전쟁이나 외교를 펼칠 정도로 주민 동원력을 갖고 있었지만, 이 동원이 아마도 고조선의 지배자에게 공물을 바쳤던 수많은 소국들의 토착적 지배층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고, 바로 이 많은 재지 지배자들의 권위를 요동 지방의 수많은 탁자형 고인돌들이 과시했던 것이다. 즉, ‘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다소 과장된 것이다.

고조선 지배자들이 그 휘하의 여러 소국들을 나름대로 통솔할 만큼 강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동북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철 문화를 자랑했던 연나라에 비해 그들의 힘은 부족하기만 했다. 연나라 소왕(昭王·기원전 311~270) 시절에 진개(秦開)라는 장수가 고조선 등 여러 ‘오랑캐’들을 공략해 약 2천 리의 영토를 빼앗아 요동에 연나라의 군(郡)을 설치했다. 이에 고조선 세력의 중심은 요동에서 오늘날 평양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들이 많이 발굴되는 반면, 평양 일대를 포함한 청천강 이남 지역에서 연나라 돈이 잘 나타나지 않는 대신 기존의 요동식 비파형 동검과 상당히 달라지게 된 한국식 세형(細形) 동검들이 대량으로 출토된다. 즉, 청천강이 연나라 세력들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의 남쪽 경계선이 된 셈이고, 고조선의 영향력은 청천강과 한강 사이의 영역에서 중점적으로 펼쳐졌다.

한반도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한반도 남반부까지 철기 문화를 전파하는 매개체가 된 의미에서는 고조선을 “우리의 최초의 국가”라고 봐도 좋겠는데, 진개의 침략 이후의 시대에 대해 만주 지배 운운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가 편의상 고조선을 국가라고 칭하지만 연나라 계통 망명객 위만(衛滿)의 세력이 기원전 190년대에 정권을 탈취한 뒤에도 조선이 위계질서적 관료제를 정비하거나 지방에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할 만큼 중앙집권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철제 무기를 가진, 그리고 이미 계급사회의 질서에 익숙한 많은 중국 이민자들을 포함한 위만조선의 지배계급이 동옥저와 진번, 임둔 등 여러 지역을 정복했지만, 그 지방의 지배 방식은 아직도 토착 세력을 매개로 하는 간접 지배 정도였다.

그 당시의 산융들도 그랬듯이 위만 시대 조선의 유일하다 싶은 관직 칭호는 상(相)이었는데, 이 상들은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 기반을 가졌던 족장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중앙 권력자의 말을 들었지만 불리할 때는 얼마든지 조선의 왕권을 떠날 수 있었다. 지배 구조가 하도 느슨했기에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 침략군이 조선의 서울인 왕검성을 포위했을 때 상황이 불리하다 싶었던 지방 유력자 이계상 참(尼谿相 參)이 마지막 왕인 우거(右渠)를 쉽게 죽이고 다른 지방 유력자 몇 명과 함께 한나라에 투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조선과 한나라 군대의 전쟁은 ‘민족적 항전’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 청천강~한강 일대의 족장들에게 위만 왕조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과 한나라에 공물을 바치는 것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역사에 대한 반역이자 폭력

무너져가는 대한제국에서 신채호가 “만주까지 지배하는 강력한 우리나라”를 꿈꾸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일제 말기의 ‘만주열(熱)’이 일제의 대륙 침략에 대한 협력과 만주 ‘원주민’에 대한 멸시를 전제로 했다는 점, 오늘날 이 담론이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과 시장에 군침을 흘리는 자본가들의 북방 팽창 의식을 반영한다는 점 등을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고조선을 마치 만주를 영토로 지배했던 거대한 제국으로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흔히 쓰는 말로 ‘역사 왜곡’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진개 침략 이전의 고조선의 역사는 요동, 나아가서 만주 역사의 일부분이긴 해도, ‘영토 지배’ 같은 후대적 발상을 상고사에 투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역이자 폭력일 뿐이다.

참고 문헌

1.<한국고대사연구> "衛氏朝鮮興亡考", 이병도, , 박영사, 1976, 65∼97쪽
2.<단군과 고조선사>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노태돈, 사계절, 2000, 41∼97쪽
3.<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송호정, 푸른역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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