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rus-vladivostok.mofa.go.kr/webmodule/htsboard/template/read/korboardread.jsp?typeID=15&boardid=2416&seqno=629143

연해주 연해주 중북부지역 발해유적
노보고르데예프카 성터

연해주의 발해 유적에서 이방인들이 활동하였던 흔적이 발견 되었다. 그것이 바로 노보고르데예프카 (Novogordeevka) 성터와 그 주변의 유적이다.

이 성터는 빠르띠잔스크 구역과 북쪽으로 인접해 있는 아누치노(Anuchno) 구역의 작은 야산에 있으며, 아누치노 마을로부터는 북동쪽으로 5km 떨어져 있다. 북쪽 가까이에는 아르쎄니예프까(Arsen'evka) 강이 흐르고 있는데, 북쪽으로 흘러 우수리강으로 들어간다. 성터가 있는 곳은 강 옆의 평지에 솟아 있는 해발 78m의 끄루글라야(Kruglaia) 산으로서, 성벽은 북쪽의 완만한 경사면을 두르고 있다.

성벽은 그렇게 높지 않은데 2m 정도의 높이다. 내부의 크기는 동서 너비 190m, 남북 길이 230m이고, 전체 면적은 3.25 헥타르이다. 안에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24개의 계단식 지형(테라스)을 만들어 그 위에 집들을 지었다. 계단 하나의 너비는 5~15m이다. 헬기에서 바라보면 지금도 계단식 지형이 눈에 뚜렷이 들어온다. 성 주위에는 당시에 사용되던 도로와 해자 자리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성은 8세기에서 10세기까지 발해인들이 사용하였고, 12세기에서 13세기 초에 와서 여진인들이 다시 사용하였다. 강 건너 맞은편에 있는 산에도 스끄라예프까(Sklaevka) 성터가 있는데, 금나라 때에 사용되었던 곳이다.

지난 1965년에 노보고르데예프까 성터를 발굴하였을 때에 흥미 있는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흙으로 구운 거푸집, 도가니, 주물용 국자, 쇳물 찌꺼기, 송풍관, 반쪽만 남은 은팔찌, 청동 가락지, 철제 화살촉, 갑옷 조각 등이 발견되었는데, 도가니에는 청동이 늘어 붙어있다. 이 물건들은 주민들이 여러 종류의 장식물들을 주조하는 데에 종사하였던 사실을 보여 준다. 발해 시대에 커다란 수공업 중심지였음을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이 유물은 현재 블라디보스톡 역사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는데, 도가니는 크기가 손가락 정도로 아주 작았지만, 쇳물을 따를 수 있도록 아가리가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있다.

연해주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아주 적어서, 과연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였는지 여부가 논쟁이 될 정도이다. 블라디보스톡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세형동검과 동경 일괄 유물은 현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흘러들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것들 중에는 청동기를 모방한 제품이 상당수 눈에 뜨였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현지에 청동이 희귀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사정은 발해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청동은 주로 세공품용으로만 사용되었고 그에 따라 도가니도 작게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더 흥미 있는  것은 성 밖에서 발견된 주거지들이다. 발해사 연구자인 셰메니첸꼬가 지난 72~74년 사이에 북쪽으로 약 4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성 밖에 형성되었던 마을 흔적들을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도 경제활동과 관련된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런데 유물 중에는 일반적인 발해 유물과 성격이 다른 것이 있었다. 도기 위에 새겨진 문양만 보더라도 이것은 1세기경 중앙아시아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샤프꾸노프는 이곳에 소그드인들이 집단 거류지를 형성하면서 청동 주조업, 조기 제조업, 농업, 무역 등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소그드인들이란 원래 중앙아시아의 소그디아나 지방에 살던 주민이다. 이들은 동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중국의 수도를 포함하여 아시아의 여러 중요 도시까지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멀리 동쪽 끝에 있는 발해의 수공업 도시에까지 와서 집단부락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로 보아 8~10세기 초에 해당된다.

한편, 남부 시베리아에서 위구르(Uighur)족이 흉기하면서 이들을 흡수하여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중국사에서는 이들을 회흘 또는 회골로 표기하고 있다. 샤프꾸노프는 이 위구르족이 세운 나라가 840년에 예니세이 지방의 끼르끼즈인들에 의해 멸망당하자, 상당수의 피난민들이 발해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것은 연해주의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물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연구소에 진열되어 있는 허리띠 꾸미개들 중에 그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이러한 것은 발해의 변방이었던 연해주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었나 보고 있다.

그러나 샤프꾸노프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연구소에서 그의 견해를 물어보니 9세기 후반 이후에 중앙아시아 문화가 발해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840년을 기준으로 발해 문화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있다. 한국의 한 역사학자는 만주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국 측의 유적발굴은 대개 고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장차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면 그러한 요소들이 충분히 발견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자에게는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여긴다.

그의 생각으로는 중국 측에서 발해 문화에 나타난 당나라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듯이, 러시아 측에서 중앙아시아나 남부 시베리아적인 요소를 지나차게 강조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아마 주인이 없는 듯한 발해사를 자기 측에 유리하게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요인은 상호 자료 교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발해사를 연구하고 있는 남,북한을 위시하여 중국, 러시아 학자들이 서로 상대방의 고고 자료까지 망라하면서 연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여긴다. 결국 발해사 연구를 위해서는 앞으로 국제적인 교류가 필수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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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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