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directory/item.do?levelId=cr_001_0030_0020
* 사진이 하나씩 밀려 있어 바로잡았습니다. 맨 위의 사진은 "또 하나의 시점,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사진의 위치가 내용과 맞지 않아 위치를 조정했습니다.
고구려 성벽 축조 방식은 우선 지면을 다듬고, 큰 성돌을 이용하여 기단을 튼튼히 한 다음 일반 성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지면을 다듬는 과정에서도 큰 바위가 있는 곳에는 바위를 성돌에 맞물리게끔 약간만 다듬은 다음 성벽을 쌓음으로써 견고함을 유지하였다(사진 4).
[사진 9] 성벽 축조 구간 (후성산산성)
성문은 적에게 첫 번째 공격 대상이 되는 만큼, 일차적으로 성문 주위의 성벽은 높고 견고하게 구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 성곽의 성문은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일반적인 평문과 사다리를 놓고 들어갈 수 있는 현문, 전령들이나 또는 비상시에 사용하는 산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작은 문인 암문, 밖에서 성문임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어긋나게 축조한 어긋문, 그리고 성문 바깥쪽에 별도의 옹성을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성문 주위로는 방어력을 높일 수 있도록 치 등이 설치된다.
어긋문은 국내성의 서벽 남쪽 성문의 경우(사진 11)가 대표적인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좌측의 서남벽과 우측의 기초만 남아있는 서북벽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하나의 성벽이 어긋난 11 자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 성벽 사이에 보이는 시설이 문과 관련된 시설로,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성벽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1차적인 방어 효과가 있으며, 두 번째로 가까이 접근 하더라도 어긋문의 경우에는 노출된 성문을 공격하는 상황과는 달리 일정 수의 적들만이 성벽을 돌아 들어가 좁은 통로에서 성문을 공격해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어 2차적인 방어효과를 누릴 수 있다.
[사진 12] 성가퀴의 흔적 (성산산성)
돌구멍의 흔적 (후성산산성)
* 사진이 하나씩 밀려 있어 바로잡았습니다. 맨 위의 사진은 "또 하나의 시점,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사진의 위치가 내용과 맞지 않아 위치를 조정했습니다.
사진을 통해 본 고구려 성곽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성들이 존재한다. 고구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340여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에 의해 일부 훼손된 것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고구려 성들은 여전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많은 고구려 성들이 도성都城을 중심으로한 고구려의 영토 방어에 최적화된 입지 조건을 가진 곳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온존하게 보존될 수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구려 산성들의 경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삼국시대 이후의 많은 석성石城들이 고구려 축성築城 기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당시 고구려인들의 높은 기술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위성 사진과 항공사진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중요 유적들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본 논고도 전시의 목적에 맞게 하늘에서 바라본 고구려 유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겠지만, 평지에 축조된 발해의 성들과는 달리 고구려의 산성의 경우 수목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인공위성 사진이나 항공사진을 통해 성의 윤곽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높은 하늘이 아니라 요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산성을 찾아가 카메라에 담아온 여러 모습들을 통해 고구려 성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다만, 지면 관계상 도록에 없는 사진들로 이해를 돕고자 하니, 본문에 나오는 여러 성곽 관련 내용들은 도록 내의 사진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1. 고구려 성곽 개관 [註 011]
고구려의 성은 역사 기록에 따르면 홀본에 고구려를 건국하면서부터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가 얼마나 이른 시기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성을 축조하였는지에 대해서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고구려의 첫 도읍인 환인지역에 위치한 오녀산성(흘승골성)의 경우,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전기와 중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고고학 자료들의 양이 많지 않아 오녀산성의 초축 시기는 정확히 알기 어렵고, 다만 고구려 이른 시기에 축조되어 중기까지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사실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벽을 절개하여 그 기초 부분에 포함된 여러 자료들을 가지고 판단하여야만 한다. 성은 고분과는 달리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생활 유적이기 때문에, 발굴을 통해 드러난 자료들의 경우 성이 폐기되는 시점의 유물이나 현상들이 중심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성이 축조된 시점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한편, 고구려 성곽은 우선 거주 주체 및 기능에 따라 왕이 평상시에 거주하는 궁성(宮城)과 궁성을 포함한 수도에 위치한 도성(都城), 그리고 지역 주민들을 보호하고 통치하기 위한 군사적 ·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읍성(邑城)(또는 치소성), 일정한 방어선을 연결하여 길게 축조된 장성(長城), 그리고 교통로상의 협곡을 가로 지르며 축조된 관애(關隘)(또는 차단성)와 교통의 요충지에 방어를 위해 축조된 소규모의 군사 요새인 보루(堡壘)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궁성과 도성은 고구려의 홀본, 국내, 평양 세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읍성(치소성)은 도성을 제외한 나머지 많은 고구려 산성들이 해당되는데, 이는 고구려 산성의 경우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여 적을 막는 방어의 수단뿐만 아니라 그 일대를 통치하 는 행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장성은 그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영류왕 때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관애로는 집안의 북구관애, 압록강 유역의 칠개정자관애 등이 있다. 그리고 보루로는 한강 유역의 아차산보루군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성은 위치한 입지에 따라 평지성(平地城)과 산성(山城), 평산성(平山城)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성들은 평 지성과 평산성은 그 예가 드물고 대부분 산성이다. 평지성은 환인 하고성자 토성, 집안의 국내성, 평양의 안학궁 등 도성에 위치한 성들이 대표적이며,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에 성 외곽으로 해자를 두르는 경우가 많고 방어용 산성이 별도로 존재한다. 평산성으로는 평양의 평양성(장안성)을 들 수 있다.
한편, 산성은 입지한 방식에 따라, 테뫼식(山頂式)산성, 포곡식(包谷式)산성, 복합식(複合式)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테뫼식산성은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싼 형식으로,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지형 여건상 물자원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성 내부에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남한에 위치한 고구려 보루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포곡식산성은 계곡을 포함하고 있어서 규모가 테뫼식보다 훨씬 크며, 성 내부에는 물 자원이 풍부하고 공간이 넓어 장기간 주둔하면서 방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중국에 위치한 대형 고구려 산성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집안의 환도산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음으로 성곽을 축조하는 재료에 따라 토성(土城), 석성(石城),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목책성(木柵城)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토성은 대부분 평지에 축조되는 것이 보통인데, 고구려는 환인의 하고성자토성을 예로 들 수 있다. 석성은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산성의 경우에 많이 확인되며, 많은 고구려의 산성들이 해당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요양의 백암성이나 장하의 성산산성 등을 들 수 있다. 토석혼축성의 경우에는 개모성으로 추정되는 심양의 탑산산성이나 무순의 고이산성 등이 있다. 그리고 목책성은 남한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들이나 임진강 유역의 호루고루에서 석축 이전에 목책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어서 고구려에 목책성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개주 건안성의 경우 일부 구간은 석축을, 또 다른 구간은 토석혼축 및 토축 등 다양한 축성 재료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처럼 많은 고구려 성곽의 경우 주변의 자연 환경과 상황에 맞게 쌓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하나의 성곽에도 여러 축성 방식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2. 고구려 성곽의 축성 방식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구려의 성곽에는 다양한 축성 방식이 존재한다.
우선 토벽의 경우 판축(版築) 기법이 대표적인데, 판축은 우선 단위 구간별로 목재를 대고 안쪽으로 흙을 부어 발로 밟아 다진 다음 다시 흙을 붓고 다지는 방식으로 반복하여 쌓는 방식을 말한다. 흙이 여러 번 다져지게 되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단단해져서 장기간 버틸 수 있다. 사진 1의 토성벽을 보면, 세로로 갈라지는 구간은 판축 당시 목재를 대었던 작업 구간의 흔적이고, 가로로 여러 겹 쌓여있는 것이 여러 번 흙을 다져 판축한 작업한 결과물이다.
[사진 1] 성벽의 판축흔적 (건안성)
[사진 2] 내탁식 성벽 (득리사산성)
고구려 산성의 대부분은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석축 성벽은 우선 그 쌓는 방식에 따라 내탁식(内托式)과 협축식(夾築式)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내탁식은 보통 경사면을 정리하여 석축을 쌓고 그 안쪽을 흙과 돌로 채워 넣는 방식을 말하는데(사진 2), 대부분의 고구려 산성이 주로 내탁식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으나, 지형에 따라 일부 구간은 협축식으로 쌓기도 한다. 협축식은 내면과 외면 모두 돌로 쌓은 방식을 말하며, 백암성의 성벽이 대표적이다(사진 3).
[사진 3] 협축식 성벽 (백암성)
고구려 성벽 축조 방식은 우선 지면을 다듬고, 큰 성돌을 이용하여 기단을 튼튼히 한 다음 일반 성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지면을 다듬는 과정에서도 큰 바위가 있는 곳에는 바위를 성돌에 맞물리게끔 약간만 다듬은 다음 성벽을 쌓음으로써 견고함을 유지하였다(사진 4).
[사진 4] 성돌을 놓기 위해 다듬은 바위 (위패산성)
[사진 5] 들여쌓기 (백암성)
또한 성벽의 기초 부분에는 성돌을 쌓을 때 한 단마다 약간씩 안으로 들여쌓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성벽이 높이 올라가더라도 무거운 하중을 받칠 수 있게끔 하였다(사진 5). 이러한 들여쌓기 방식은 특히 치(雉)에 잘 드러나는데, 백암성의 경우 고구려 때 축조된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느낄 수 있는 치와 명나라 때 보수된 직선적인 치는 이러한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밖에도 성산산성의 장대의 둥그런 기단 역시 고구려인들의 돌을 다루는 높은 기술 수준과 미적인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고구려 성벽은 바깥쪽에서 보면 외면을 잘 다듬은 돌들로 가지런히 쌓여 있음을볼 수 있다. 도록에 소개되어 있는 환인의 고검지산성의 동벽면을 보면 성벽을 쌓을 때 우선 아랫줄에 성돌을 2개를 놓으면 그 윗줄에는 성돌 1개를 사이에 놓는 방식으로 전체가 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돌을 쌓으면 치와 맞물리는 경우에도 체성벽과 치의 성돌이 서로 엇갈려 물리기 때문에 매우 견고해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사진 6] 쐐기형 성돌 (성산산성)
[사진 7] 성돌이 서로 맞물리는 모습 (성산산성)
[사진 8] 겉면 성돌 일부가 떨어져 나간 모습 (성산산성)
겉쌓기에 쓰이는 성돌은 쐐기형이나 장방형의 평면 형태로 치석되어 있는데, 특히 쐐기형 성돌이 많이 사용된다(사진 6). 성벽을 겉에서 보면 잘 다듬어진 장방형 형태의 성돌만 보이지만, 실상 안쪽으로는 겉쌓기에 쓰이는 쐐기형 성돌의 형태에 맞도록 안쪽에 채워 넣는 성돌을 앞부분은 얇고 전체적으로는 길쭉하게 치석하여 서로 맞물려서 힘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고구려 성벽 축조 방식의 큰 특징이다(사진 7). 이렇게 맞물린 성벽은 만약 겉면 성돌의 일부가 빠져 나간다고 하더라도 안쪽 성돌은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에(사진 8), 성벽 자체는 적의 공격이나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고구려 성벽들은 정연하게 잘 쌓기 때문에 발견하기 어렵지만, 일부 급하게 쌓은 산성의 경우에서는 성벽 축조 구간 단위들을 확인할 수 있다. 후성산산성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사진 9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에 성벽이 서로 만나는 흔적들이 관찰되고 있다. 각 축조 구간의 간격은 각 성마다 다르겠으나, 사진에 보이는 구간의 간격은 2.3m이다.
[사진 9] 성벽 축조 구간 (후성산산성)
3. 고구려의 성곽 시설
고구려가 수 · 당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방어력을 보여준 것은 앞서 다룬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축성기술 외에도 교통로의 주요 요지에 위치한 고구려 성곽의 입지나 평지가 아닌 산성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방어한 전략 및 전술, 그리고 고구려 성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방어 시설 즉 성곽 시설들에 기인한 것이다. 고구려의 성곽 시설은 견고한 성벽, 다양한 종류의 성문 및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시설, 다각적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치, 몸을 숨길 수 있는 성가퀴, 배수를 위한 수구 및 배수로 물과 관련된 저수 시설, 전투 상황을 보면서 지휘할 수 있는 지휘소인 장대 및 각종 건물지 그리고 평지성의 경우에는 방어용 해자 등을 들 수 있다.
성문은 적에게 첫 번째 공격 대상이 되는 만큼, 일차적으로 성문 주위의 성벽은 높고 견고하게 구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 성곽의 성문은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일반적인 평문과 사다리를 놓고 들어갈 수 있는 현문, 전령들이나 또는 비상시에 사용하는 산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작은 문인 암문, 밖에서 성문임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어긋나게 축조한 어긋문, 그리고 성문 바깥쪽에 별도의 옹성을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성문 주위로는 방어력을 높일 수 있도록 치 등이 설치된다.
[사진 10] 현문터 (위패산성)
평문은 일반적인 성문의 형태로 도록 내에 소개되어 있는 위패산성의 서문을 참조하기 바라며, 현문은 위패산성의 서북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진 10). 사진 10의 좌측 편평하고 길쭉한 부분이 문지이고 좌측 상단에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문기둥을 세워 여닫을 수 있도록 방형의 홈이 만들어져 있다. 문지 아래쪽으로는 급경사 지역으로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며, 문의 아래쪽으로도 석축이 있어 사다리 등을 이용하지 않으면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사다리를 통해 접근하는 방식은 성문은 아니지만 남한의 한강유역에 위치한 용마산 2보루의 2호 건물지를 출입하는 문에도 고구려 시대의 나무 사다리가 불에 탄 채로 발견된 예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
[사진 11] 어긋문터(국내성)
어긋문은 국내성의 서벽 남쪽 성문의 경우(사진 11)가 대표적인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좌측의 서남벽과 우측의 기초만 남아있는 서북벽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하나의 성벽이 어긋난 11 자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 성벽 사이에 보이는 시설이 문과 관련된 시설로,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성벽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1차적인 방어 효과가 있으며, 두 번째로 가까이 접근 하더라도 어긋문의 경우에는 노출된 성문을 공격하는 상황과는 달리 일정 수의 적들만이 성벽을 돌아 들어가 좁은 통로에서 성문을 공격해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어 2차적인 방어효과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고구려 성에는 다양한 옹성甕城이 설치되는데, 주로 반원형이 사용되며 이 외에도 장방형, 지그재그식 등의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옹성으로는 위패산성 북문에 설치된 옹성이나 득리사산성 서문에 설치된 옹성을 들 수 있다(사진 2). 옹성 역시 적들이 일정한 병력만이 접근하여 성문을 공략해야만 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모든 고구려 성에서 확인되는 방어 시설인 치(雉)는 보통 적들을 관측하기 쉬운 곳이나 또는 추가 방어의 필요가 있는 곳에 주로 설치하게 된다. 보통의 성벽이 적과 마주보고 전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형태의 치는 성벽을 공격하는 적에게 측면 공격을 지원해줄 수 있어서 효과적인 방어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최근 남한의 용마산 2보루나 아차산 4보루에서는 치와 유사한 2중, 3중으로 된 방어 시설들이 확인된 바가 있다. 이러한 방어 목적 외에 성벽에는 전망이 좋은 곳에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망대가 설치되기도 한다.
[사진 12] 성가퀴의 흔적 (성산산성)
그리고 성벽에는 치와 같은 구조물 외에도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성가퀴(女墙)가 있다. 성가퀴는 성벽의 가장 상면에 설치되는 시설로 대부분은 파괴되었지만, 고검지산성이나 성산산성 등에서 일부가 남아있다. 사진 12에서 보면, 성벽의 가장 상면 우측에 남아있는 구조물이 성가퀴이다. 중국에서는 성가퀴 안쪽으로 성벽 가장 상면 또는 성벽 안쪽으로 일정 공간을 장수들이 말을 달리던 곳이라는 의미로, 마도(馬道)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고구려 성벽의 상면에서는 돌구멍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확인되기도 하지만 한두개만 확인되는 경우도 있어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다만 성벽 바깥쪽 면에 인접해 있는 관계로, 성가퀴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해볼 뿐이다. 후성산산성의 경우 방형으로 짜여진 돌구멍의 크기는 대략 35 × 35 × 35cm이며, 돌구멍간의 간격은 약 1.8m이다. 이러한 돌구멍은 남한의 당포성 성벽의 상면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돌구멍의 흔적 (후성산산성)
이 밖에도 성벽 내지 성문에는 계곡물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성벽이나 성문 아래쪽에 배수를 위한 수구(환도산성 참조)가 따로 마련되어 있기도 하고, 남한의 아차산 보루군에서 확인된 것처럼 성 내부에도 배수로가 갖춰져 있다. 배수 시설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으면 큰 비가 내렸을 때 성벽을 포함한 산성의 여러 시설물들이 파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이를 위한 대책들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성의 경우 마실 수 있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요동 지역의 대형 산성의 경우 계곡을 끼고 있어서 샘이나 물을 담아두는 대형 저수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으며, 남한 지역의 작은 보루의 경우에도 빗물 등을 담아둘 수 있도록 암반을 파고 뻘을 채워 넣은 다음 통나무 등으로 마감한 소규모 저수시설 등을 갖추었다.
한편, 성 내부에는 지형이 가장 높은 곳에 전투 상황을 보며 지휘할 수 있는 장대가 설치되며, 이러한 지휘소는 정문 근처에 마련되기도 한다. 성 내부에는 각종 건물지들이 축조되었는데, 관청이나 지휘관 숙소 등은 기와집이었다. 보통의 건물은 아랫부분은 석축으로 기초를 만들고 윗부분은 점토와 벗짚 등을 섞은 벽체를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는 온돌(쪽구들)을 설치하여 취사 및 보온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고구려 온돌은 지금과 같이 방바닥 전체를 구들장으로 데우는 방식이 아니라 쪽구들로 온기만 쬘 수 있는 난방 방식이었다. 남한의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들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아궁이 주변에는 철솥 등을 올려 조리할 수 있는 장치들이 되어 있었고, 온돌은 판석재를 세워 기본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는 크고 넓적한 뚜껑돌들을 올린 다음, 전체를 진흙 등으로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돌의 끝부분은 건물 바깥으로 뺀 다음 토기로 만든 연통을 씌워 연기가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상으로 고구려 성곽의 유형 및 성곽 시설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보다 많은 자료를 준비하여 고구려 성곽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으나, 필자의 능력과 시간적인 한계를 핑계로 삼아본다. 본 논고가 고구려 성곽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라도 보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마치도록 한다.
[註 011] 성곽城郭은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보통 흙이나 돌 또는 나무 등을 이용하여 구축한 방어시설로, 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내성內城을 의미하는 성城과 외성外城을 의미하는 곽郭의 통칭이나, 일반적으로 성城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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