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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국내성②·용강

서기 3년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지 다섯 해가 지났는데도 해명태자는 옛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이를 안 황룡국왕(黃龍國-)이 사신을 보내 해명에게 강한 활을 선사했다. 해명은 보라는듯 활을 부러뜨리니 황룡국왕이 부끄러워하였다. 유리왕이 이 말을 듣고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죽여달라고 했다. 황룡국왕이 해명을 만나고 싶다며 사신을 보내자 어떤 이가 해코지할지 알 수 없으니 가지 말라고 간했다. 태자가 황룡국에 당당히 갔는데, 그 당당함에 눌려 감히 해치지 못했다. 서기 9년, 유리왕은 또 사람을 보내 해명이 국내성으로 오지 않고 외교 문제를 일으키는 데 대해 태자로서 그럴 수 있느냐고 꾸짖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한다. 어떤 이가 이는 황룡국의 속임수에 걸리는 게 된다고 말렸으나 해명은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라며 자갈나루(礪津) 동쪽에 창을 꽂고 말을 달려 스스로 창에 찔려 죽었다. 그래서 이곳을 창벌(槍原)이라 불렀다.황룡국은 지금의 평안도 용강(龍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려 때 용강성 또는 군악(軍岳)으로도 불렸다.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조차 의주로 보기도 하였다. 용강이 고구려 옛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 국내성이 좀더 북쪽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옛 서울은 국내성보다 남쪽, 성천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다. ‘황룡국/용강’은 중세 말 ‘미르’(龍)와 고구려말 ‘갑’(岳)으로 보면 ‘미르갑’이었다. 족보들을 보면, 황룡국 왕족은 후조선의 후예인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다. 고구려 해명태자의 허망한 죽음을 충효 관점이 아닌 단군조선 후예와 기자조선 후예 사이의 자존심 대결로 보는 해석도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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