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 위키

백제/왕 2013. 7. 14. 11:54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7%BC%EC%B4%88%EA%B3%A0%EC%99%95

근초고왕

백제의 13대 국왕
재위 346년 ~ 375년

근초고왕(近肖古王, ? ~ 375년, 재위: 346년 ~ 375년)은 백제의 제13대 국왕이다. 이름은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1],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2],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속고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왕은 백제가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여 백제의 영토를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고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371년)

생애

남방 진출

근초고왕은 야마토 왕조와 국교를 수립하고 칠지도,칠자경을 보냈다. 백제가 언제부터 야마토 왕조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주 1] 백제와 야마토 왕조의 국교 수립은 서기 366년(신공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주 2]에 이뤄졌다. 근초고왕은 가야의 부족국가 중 하나인 탁순국(위치 미상)에 사신을 파견(364년)하였고, 근초고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366년 3월) 동맹을 맺고, 가야 소국의 하나인 탁순국 국왕을 통해 야마토 왕조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였다. 당시 야마토 왕조는 탁순국에 사신 시마노스구데를 파견하였다가 백제가 왜와 통교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시마노스구데는 근초고왕에게 부하 니하야를 파견하였다. 근초고왕은 니하야를 무척 반갑게 맞이하여 오색의 채견 1필, 각궁의 화살, 그리고 철정(쇠막대기) 40매를 선물로 안겨 돌려보냈으며, 이듬해(367년) 신라 사신 편에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주 3] 등 세 사람을 딸려 보냈다. [3]이들이 함께 왜국에 도착함으로써 백제와 야마토 사이에 최초로 국교가 수립된다. 한편 근초고왕은 신라와의 외교도 중시해 신라에 명마 두 마리를 보냈다(근초고왕 23년, 368년).

고구려와의 전쟁

369년 가을 9월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 구 모로성)에 쳐들어왔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태자인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고구려에 도망쳤다가 마음을 고쳐 돌아온 백제인 사기가 제공한 정보를 통해 고구려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371년에는 태자 근구수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동강에서 물리치고 옛 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또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북위에 개로왕이 보낸 표문에 의하면 이때 태자 근구수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창에 꽃고 효수하였다.(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의 일부까지 차지하여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근초고왕은 이러한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부자 세습 제도를 확립했다.

외교 및 문화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진서(晉書)》에 따르면, 372년 음력 1월과 음력 6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4]한편 《일본서기》에는 태자의 스승이 된 아직기와 왕인 두 사람이 일본에 파견된 것이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왜왕에게 칠지도가 보내진 것도 이 무렵의 일로 오늘날 칠지도의 성격을 두고 한국과 일본은 논쟁중에 있다. 또한 왕실의 존귀함을 알리고 국가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사 고흥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백제 왕실의 역사를 정리한 《서기》를 저술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이 철정 40매를 왜국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일본이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서는 가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백제로부터 철기를 수입했다고 볼 수 있다. [5]

평가

가야 정복 주체(主體)의 정체

근초고왕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서기》에 백제와 왜가 함께 가야를 정복하는 군사행동의 주체가 백제인가 왜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져 왔다. 심지어 이 기록을 과연 믿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도 학자들의 설이 서로 나뉘어 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기록 본문은 다음과 같다.

[四十九年春三月,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ㆍ盖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ㆍ盖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ㆍ南加羅ㆍ喙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爰津, 屠南蠻枕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ㆍ辟中ㆍ布彌ㆍ支半ㆍ古四邑, 自然降服.]
 
49년(369) 봄 3월에 아라다노와케(荒田別), 가고노와케(鹿兒別)를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들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겠습니다. 다시 사백(沙白),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 증원을 청합시다." 그리해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詭)【이 두 사람은 그 성씨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보냈다.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比自○), 남가라(南加羅), 훼국(喙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을 돌아 고해진(高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壁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의 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6]
 
이 기록을 두고 우선 기록 그대로 믿는 쪽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같은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이었고, 이들은 《일본서기》의 기록된 대로 왜가 백제를 앞잡이로 삼아서 가야를 정벌한 뒤 그 땅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두고 100년 가까이 직접통치를 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서기》안에서도 특히나 황국사관에 찌들어있다고 평가받는 진구 황후조 기사에서, 특히 어렵게 정복한 땅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남의 나라에 선뜻 주어버렸다는 어이없기까지 한 기록에 대해 "세상에 이렇게 인심 좋은 국제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한국 학계의 비판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서기》초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 이래 일본 내에서도 이 학설은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지 오래다.

《일본서기》진구 황후조의 기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국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학설을 제기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천관우가 제시한 백제군사령부설이다. 군사령부설의 요체는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조에서 가야 정벌을 행한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어보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원래 백제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사 기관이었는데 그것을 마치 왜의 통제를 받는 기관처럼 《일본서기》가 주체를 바꾸어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비록 이전 학설들과 차별화되지만 식민사학이 만든 고대사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학설로, 백제의 군사령부라고 보는 설에 대해서는 임나일본부의 관리들이 백제인이 아니라 왜인이며, 정작 본국인 백제의 명령을 듣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일본서기》진구 황후조에 기록된 가야 정벌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치환시켜 해석했던 관점에 대해서 조롱과 비판이 많다. 대표적 인물이 한국고대사의 권위자인 홍익대 김태식교수이다.[7] [8]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가야 정벌' 같은 사업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사실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서기》의 초기기록이 조작되었음을 밝혀낸 이래, 일부 학자들은 '가야 정벌'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을 진구 황후의 업적을 미화하기 위해 조작해냈다고 하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일본서기》에 가야 정벌 당시 백제의 장수로 등장하는 목라근자와 그의 아들인 목만치(木滿致)의 관계를 증거로 제시한다.

훗날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밀려날 때, 근개루왕의 아우로서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던 문주왕을 옆에서 호종한 사람으로 《삼국사기》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목만치의 탄생시점에 대해서 《일본서기》응신 천황 25년(414년) 기사에 인용된 《백제기(百濟記)》에, "목만치는 아버지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부인을 얻어서 낳은 아이이다[木滿致者, 時木羅斤資討新羅時, 聚其國婦, 以所生也]."라고 한 기록에서 '신라를 칠 때'라는 시점을 진구 황후 섭정 46년인 서기 369년에 "탁순에 모여서 신라를 깨뜨렸다[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는 것과 같은 사건로 해석할 때 369년에서 한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된 서기 475년까지는 무려 106세나 산 것처럼 해석되어, 두 사람 사이에는 처음부터 기록된 것과 같은 부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 아울러 이러한 점을 볼 때 《일본서기》진구황후조의 기록은 전연 허구의 전설으로서 실제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초고왕과 삼선숙녜의 관계

《일본서기》에는 시조인 진무(神武) 천황이 무오(戊午)년 12월에 야마토(大和)지방에서 말하기를 "일찍이 천신의 아들이 천반선(天磐船)을 타고 고천원(高天原)에서 여기에 내려왔다. 그를 즐옥요속일명(櫛玉 饒速日命 쿠시타마 니기하야히 미코토)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산성국천신(山城國天神)편을 보면 "진기촌(秦忌村 하타 이미키)은 진(神) 요속일명의 후예이다", 라고 되어 있고, "금부수(錦部首)는 진(神) 요속일명의 12세손인 물부목대련(物部目大連)의 후예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속일본기, 일본후기 에 의하면 물부(物部)씨 일족 금부수(錦部首)가 765년 12월에 금부련(錦部連)으로 승격한 다음 삼선숙녜(三善宿禰)라는 성으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우경제번(右京諸蕃)下 백제편에 기록되어 있는 "삼선숙녜"라는 일족이 보면 백제국의 속고대왕(근초고왕)으로부터 나왔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出自百濟國速古大王也) 정리하면, 고천원(高天原)에서 내려온 천신 요속일명(櫛玉 饒速日命 쿠시타마 니기하야히 미코토)는 근초고왕의 후손이며, 파생된 일족이 금부수(錦部首), 삼선숙녜(三善宿禰), 진기촌(秦忌村 하타 이미키) 일족이라는 내용이다. 진(秦, 하타)씨는 한반도(신라 지역) 왔다는 설도 있는데, 그 지역은 대체로 근초고왕이 정복한 강원도 지역이다.

가계

    부왕 : 비류왕
    모후 : 왕후 진씨(王后 眞氏)
        왕후 : 왕후 진씨(王后 眞氏)
            장남 : 근구수왕

관련 작품

드라마《근초고왕》 (2011년~2011년, KBS, 배우:감우성, 전영찬)



주해

[주1]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주2] 《일본서기》진구 황후(神功皇后)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
 
[주3] 막고(莫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조에 나오는 막고해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주석

[1] 「진서」의 열전에는 이른바 「백제전」은 없고, 백제왕 여구의 이름을 볼 수 있는 것은 「진서」권 9·간문제기·함안2년(372년) 정월조 및 6월조이다.
 
[2] 오노 야스마로 (712). 〈中卷-6 應神天皇〉, 《고사기》 “亦百濟國主照古王、...”
 
[3]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백제와 야마토 왕조의 국교 수립은 신공황후 46년(서기 366년)에 이뤄졌다. 당시 야마토 왕조는 탁순국(위치 미상)에 사신 시마노구스데를 파견하였다가 백제가 야마토와 통교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시마노스구데는 근초고왕에게 부하 니하야를 파견하였다. 근초고왕은 니하야를 무척 반갑게 맞이하여 많은 선물을 안겨 돌려보냈으며, 이듬해 신라 사신 편에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등 세 사람을 딸려 보냈다(이 세 사람 중 막고는 『삼국사기』「백제본기」근구수왕 조에 나오는 막고해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4] 晉書/卷009, 簡文皇帝...咸安...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5] 백제사자료석주집 일본편 28쪽,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8년
 
[6] 《일본서기》에 기록된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이라는 구절을 기존의 학설에서는 후미의 '4읍[四邑]'을 의식해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으로 떼어 읽었으나, <살아있는 백제사>의 저자 이도학 교수는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불미국(不彌國)ㆍ지반국(支半國)ㆍ구소국(狗素國)의 음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이 문구는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으로 떼어 읽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7] "~일부는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고 추정한 견해도 있는데, 이는 앞에 서술한 가야문화의 前代 계승적인 경향과 어긋난다. 이러한 추단은 기본적으로 가야사 및 가야의 문화 능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植民史觀 비판 -南韓經營論과 黨派性論을 중심으로-金 泰 植 (홍익대),1997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 토요 강좌 강연 요지
 
[8] "~그런데도 문헌 사료만의 자의적 해석을 통해 왜국이나 백제가 가야를 200여 년간 통치하였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植民史觀 비판 -南韓經營論과 黨派性論을 중심으로-金 泰 植 (홍익대),1997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 토요 강좌 강연 요지


전 대
계왕
제13대 백제 국왕
346년 ~ 375년
후 대
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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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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