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42839

논어는 왜 우물 속에 들어갔나
<서울 경기 역사기행 20> 인천 계양산성(桂陽山城)
06.07.01 21:30 l 최종 업데이트 06.07.01 21:30 l 노시경(prolsk)

다시 강남역에서 인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인천 계양구까지 왔다. 계산역 정거장이 계양산에서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계양산이 지척에 있다. 계양산 쪽으로 걷다 보니 부평도호부청사(富平都護府廳舍) 안내 푯말이 있다. 잠시 옛 부평의 유적과 오백 년 된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계양산에 올랐다.


▲ 계양산 등산로 ⓒ 노시경

인천시 계양구에 위치한 계양산은 바다로부터의 높이가 394m로, 인천 부평을 대표하는 가장 높은 산이자 부평의 진산(鎭山)이다. 인천 계양구를 상징하는 꽃이 진달래인데, 계양산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다고 한다. 계양산 입구에 들어서면 계양산 숲 탐방로 지도가 있다. 그 지도의 한 복판에 오늘 내가 오르려는 계양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산 초입에 설치된 계양산 안내판에는 계양산의 역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계양산에 사는 동물과 식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계양산의 나무들이 잘 보존되는 모습들이 보기가 좋다. 계양산성까지는 그리 숨이 차지 않은 등산로다. 계양산성이 계양산 주봉이 아니라 계양산 동쪽 능선의 해발 230m 지점 정상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 인천 계양의 계양산성 ⓒ 노시경

계양산성 성벽 부분을 뚫고 연결된 등산로에 오르니 일순간에 비스듬한 평지 지형이 눈앞에 펼쳐지고 발 아래로 계양구의 아파트들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사방에 막힘이 없고 인천 앞바다의 섬들과 인천시, 서울 강서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백제인들이 이 곳에 산성을 쌓은 연유가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 계양산성은 서해안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옛부터 군사의 요충지대였으리라.

그런데 계양산성은 다른 산성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계양산의 주봉에 올라서면 주봉보다 낮은 곳에 자리한 계양산성 내부가 다 보인다. 백제의 전초 기지이자 한성백제의 관문으로서 계양산의 위치는 탁월하지만, 계양산 주봉이 너무 날카롭고 평지가 없어 성벽을 두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산성은 솟구치듯 오른 능선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있다.


▲ 계양산성 육각정과 성벽 ⓒ 노시경

계양산성 암봉 앞에 자리한 육각정은 주변의 정경과 참 어울리지만, 부실공사 때문인지 내부 출입은 막고 있다. 그래서 계양산성 정상 쪽에 자리한 암봉 위로 올랐다. 따뜻한 햇살 아래 아늑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계양산성 암봉은 참으로 절경이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도는 것을 보며 암봉의 절벽에서 명상에 잠긴다.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식혀준다.


▲ 계양산성의 남벽 ⓒ 노시경

암봉 아래 육각정 아래쪽에 계양산성 성벽이 남아 있다는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육각정 바로 아래쪽의 큰 돌이 많이 남아 있는 등산로 쪽으로 다시 내려가 등산로 왼쪽의 풀숲을 뒤져 보았다. 거기에 있었다. 천육백 년의 무게를 이겨 온 성돌들이 포개지듯 잘 쌓여 있었다. 성벽 내부는 흙으로 경사지게 처리하고, 그 외부에 잘 다듬어진 석재가 약 7m 높이로 쌓여 있었다. 여름의 무성한 나뭇가지와 잎들이 성벽을 가리고 있었다.

비스듬한 성벽 길을 따라 동문지를 향했다. 산성 총길이가 1180m라고 하니, 천천히 걸어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육각정 아래의 성벽 일부를 제외하고,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일제 때부터 조성된 공동묘지의 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다. 묘지 앞에는 성벽에서 뽑아온 것이 분명한 석재들이 묘지를 보호하기 위해 쌓여 있다. 

이 높은 산 위에 공동묘지라! 당시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었더라면 조상의 산성이 자리한 곳에 무덤들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덤은 주인을 모르는 것들이 많다. 일정 기간까지 관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한다는 안내판이 서있다. 인천 계양구가 계양산성의 성벽과 동문, 집수정, 병영 터 등을 복원해 사적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양산성에서 '주부토(主夫吐)'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삼국사기> 잡지에서 이 부평 일대를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오랜 역사 때문에 고산성(古山城)이라고도 불렸던 계양산성은 한성백제 당시의 전초기지였다. 최근에 동문지(東門址) 주변에서 집수정(集水井, 저수조)이 발굴되면서 계양산성은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집수정에서 전형적인 한성백제 토기인 원저단경호(圓低短頸壺, 바닥이 둥글고 목이 짧은 항아리)와 여러 한성백제 유물이 출토되어, 계양산성이 4세기경 한성백제 때 축조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성벽 자리를 파괴하고 들어선 헬기장 자리에서 동문지를 향해 방향을 바꾸니 계양산성 3차 발굴조사 안내문이 있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멀리서 동문터의 사진을 찍으려니 발굴단 관계자가 나를 제지한다. 발굴단 관계자에게 사진을 찍지 않을 테니 발굴 모습을 잠깐만 구경하자고 했다.

집수정(集水井) 상부의 석렬(줄줄이 이은 돌)이 햇볕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집수정은 한성백제 당시인 3, 4세기경에 만들어진 석축우물이다. 계양산성 동쪽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우물은 사각형(남북 길이 5.6m, 동서 길이 6.5m, 깊이 7m)과 원형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축조됐으며, 이 호안 석렬이 집수정을 보호하고 있었다. 동문지 서쪽 능선 위에도 긴 석축이 있는데 이는 1차 저수 시설이고, 여기에서 동쪽으로 약 10m 지점에 2차 저수시설이 있다. 이 저수시설에서 물을 흘려 동쪽 성벽 안에 물을 모이게 만든 곳이 집수정이다. 이 집수정은 저수시설의 물을 정수(靜水)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집수정이 자리한 동문지 위쪽은 현재도 계속 물이 솟아 나오고 있다. 바로 이 집수정 바닥에서 원저단경호와 함께 한성백제의 존재를 알리는 위대한 유물이 발견됐다. 바로 3~4세기 한성백제 때의 5각목간(五角木簡, 먹으로 글을 쓴 오각 나무쪽)이었다. 집수정 아래 습지 지층의 흙이 물과 뒤섞인 후 오랜 시간 밀폐되어 있어서 공기와 균이 천 6백 년 전의 나무 조각에 닿지 못한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실생활에 사용하던 목간은 사서와 같이 사가의 판단이 끼어들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최고로 높은 유물이다. 백제인들은 문장이 기록된 이 휴대용 작은 학습교재를 다발로 엮어서 책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목간을 통해 논어의 교훈적 구절을 익히고, 삶의 본보기로 삼았을 것이다. 이 소나무 목각에는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에 유행한 해서체로 글이 적혀 있다. 

2면에 적힌 묵글씨는 '군자자 사언취사(君子者 斯焉取斯)'이다. 이는 논어(論語) 제5편 공야장(公冶長)의 '자위 자천 군자재 약인 노무군자자 사언취사(子謂 子賤 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공자가 자천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참으로 군자다.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그가 학덕을 어떻게 터득했겠는가?"라고 했다)'의 일부이다. 공자가 제자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자 제자가 이를 사양하면서 말한 내용이다.

목각 3면에는 '불지기인야 적야 하여(不知其仁也 赤也 何如)'라는 묵글씨가 남아 있다. 이는 논어 제8장 태백(泰伯)의 ‘맹무백문 구야 천실지읍 백승지가 가사위지재야 불지기인야 적야 하여(孟武伯問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 맹무백이 "구(求)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는 "구는 천호의 읍이나 백승의 집에서 재상 노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가 인자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라고 했다)의 일부이다. 이는 노나라 대부 맹무백이 공자에게 질문한 내용이다.


▲ 계양산성 정상 ⓒ 노시경

백제의 논어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국내 사서에는 없고, 일본의 역사서인<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년∼384년)에 태어난 왕인박사(王仁博士)는 당시 왜 왕의 초청을 받아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가지고 가서 왜인들의 학문의 기초를 닦아 줬다. 계양산성 목간 유물들은 왕인박사가 활동하던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지식인들의 학문적 소양을 닦던 논어는 위례성인 풍납토성이나 한산에 자리한 몽촌토성뿐 아니라, 백제의 한 지방이었던 계양산성까지 널리 퍼져 있었고, 저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한성 백제 당시 한강, 서해와 가까운 계양산성은 중국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계양산성 우물에서 논어 목간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한성백제 전성기 당시에 이미 한자를 폭넓게 사용했을 뿐 아니라 유교라는 중국의 선진 정신문화가 전래되어 논어가 광범위하게 읽혀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유학자 김부식이 남긴 훌륭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왜 백제의 유교문화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 참으로 이상할 뿐이다. 신라 중심 사관을 가진 김부식이 신국(神國)의 도(道)를 가진 신라에 비해 백제가 고급 유교문화를 영위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을까? 정치적 사건의 언급에 치중한 사서 성격상 유교와 논어에 대한 내용에 중요성을 두지 않은 것인가?

그런데 논어 목간이 왜 이 우물 아래에 빠져 있을까? 휴대용 목간을 허리에 차고 다니던 계양산성의 귀족이 우물에서 물을 마시다가 목간을 우물 바닥에 빠뜨린 게 아닐까? 목간이 여러 개 발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목간을 모두 집단 폐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집수정 주변에서는 한성백제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들이 계속 쏟아졌다고 한다. 문확석(門確石, 문의 기둥을 고정시키는 돌) 2개와 목재 유물, 기와는 이곳에 아마도 누각과 대형의 동문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뚜껑 있는 대접 토기와 항아리 토기들은 이 곳에 살던 백제인들이 이 곳에서 밥을 먹고 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곳에서 발굴된 대합과 길이가 24㎝나 되는 대형 거북이 등껍질, 박(朴)은 이 토기들에 담겨 있던 백제인들의 식량을 알려준다. 특히 거북이는 계양산성에서 이루어진 제사에 올려진 후 식량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산성은 적의 공격에 대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유물 중에는 물론 무기류인 화살촉과 창 끝 등의 유물도 발견됐다. 이 계양산성도 삼국시대 당시에 무수한 전투 기록을 가지고 있을 것이나, 사서에 전하는 바는 없다. 

아니, 계양산성은 그 규모나 위치의 중요성으로 보아 분명 삼국사기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계양산성의 삼국시대 당시의 이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계양산성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 '다빈치 코드' 같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유물들이 계양산성 내부의 흙 속에 묻혀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성백제를 열어젖힌 발굴단원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네이버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do에도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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