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46448

중국을 몰아낸 힘
<서울 경기 역사기행 21> 양주 대모산성(大母山城)
06.07.17 16:16 l 최종 업데이트 06.07.17 16:16 l 노시경(prolsk)

의정부북부역에서 내렸다. 속이 출출해서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역 앞에서 금촌행 32번 버스를 탔다. 기사 아저씨에게 양주시 어둔동에 내리고 싶다고 했더니, 어둔동에 가려면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지도를 꺼내들고 대모산(213m)에서 가까운 오산삼거리에서 내리기로 했다.

대모산(해발 212m) 건너편에는 암봉이 인상적인 불곡산(佛谷山)이 자리하고 있다. 대모산은 금촌과 개성 방면에서 의정부를 지나 한강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모산 입구의 세심정(洗心亭)에서 마음을 씻고 산을 오르려고 하였으나, 한 가족이 이 정자를 차지하고 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정자를 그냥 지나쳐, 양주 8경 가운데 '산성낙조(山城落照)'로 유명한 대모산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모산성 찾아가는 길이 나온 지도가 없기에 나는 나의 방향감각만을 믿고 산을 올랐다. 정자에서 이어지는 계곡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바위 밑을 흐르고 있고, 계곡 위에 쓰러진 나무 위에는 이끼가 잔뜩 끼여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산길은 잡초에 묻힌 곳이 많다. 나의 바지에도 잡초의 가시가 걸려서 산길을 오르는 것이 간단치만은 않다.

산을 오르면서 계속 산성 성벽의 자취를 살폈다. 산 능선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파 놓은 참호가 길게 이어져 있다. 이 참호 주변에 성벽이 있는지 둘러보았으나, 성벽의 흔적은 없다. 참호아래쪽 넓은 공터에도 가 보았으나, 돌무더기 약간만 보일 뿐 성벽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 넓은 공터는 물건을 저장할 때 쓰였던 저장공이 발견된 곳이었다.

땅을 파 저장공을 만드는 것은 한성백제인들의 특기였다. 대모산성 북문 터 북쪽에 자리 잡은 이 넓은 대지의 저장구덩이에서는 많은 한성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 한성백제의 저장공 주변에는 항상 한성백제의 토성이 있기 마련이다. 신라인들이 이 대모산성에 석성을 쌓기 전에 이미 이곳에는 백제가 흙으로 쌓은 성벽인 토루나 목책 등의 방어시설이 확인되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성을 탈취당한 5세기 중엽까지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 양주 대모산성 성벽 ⓒ 노시경

돌로 쌓은 성벽은 역시 산 능선이 갑자기 솟아오른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었다. 한 곳에 모여 있는 돌무더기가 성벽 자리인줄 알고 사진을 찍다가 위를 올려보니 험준한 산허리 위에 천 4백년의 세월을 견뎌온 성벽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약 100여m 정도는 성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성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길도 없는 곳을 따라 가려니, 발을 딛기가 어려울 정도로 위험하다.

성벽은 산 능선의 땅을 잘 다진 후에 잘 다듬어진 석재로 계속 단을 만들어 들여쌓기로 쌓아올렸고, 경사진 성벽 바깥쪽의 기단은 더욱 보강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5m 정도 되어 보인다. 이러한 성벽은 삼국시대부터 이용된 성벽 쌓기 방식이며, 내 눈 앞에 나타난 성벽의 양식은 신라가 한강의 패자가 된 6세기 중엽 이후의 것이다. 성벽의 3분의2 가량은 성벽이 5단 이상 확인되거나 땅 속에 묻혀 성곽 흔적을 갖고 있으나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타원형의 성벽 둘레는 약 1.4㎞여서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거리이나, 성벽 아래 숲이 너무 우거져서 더 이상 성벽을 따라 전진할 수가 없다. 

다행히 성벽의 중간에 뚫린 길이 있는데, 그 길은 과거에 대모산성의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북문이었다. 대모산성에는 모두 4개의 문터가 남아 있다. 많은 유물이 발견된 이 곳의 북문 터에는 성벽의 일정 높이에서부터 문이 시작되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懸門)이 걸려 있었다. 대모산성에 남은 문터에는 모두 현문이 걸려 있었다. 성문이 땅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 이러한 다락문 형태의 성문은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일이 많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성곽에서 많이 보이는데 특히 신라의 성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이다.

양주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대모산성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산성이다. 당시에는 어떤 성이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에 의하면, 대모산성이 자리한 경기도의 양주목이 고구려 때에는 매성군(買省郡)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경기도 양주군에 위치한 이 대모산성은 신라가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반도통일을 완수한 계기가 된 매초성(買肖城)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개성 방면에서 한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대모산성 앞의 교통로도 대모산성이 매초성으로 추정되는 이유이다.

매초성은 연천의 대전리산성(大田里山城)과 전곡리토성(全谷里土城)으로도 추정되고 있지만, 당나라 20만 대군이 주둔하던 곳이었으므로, 매초성은 한 개의 성이라기보다는 현재의 3번 국도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개의 산성과 넓은 평야지대를 포함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모산성을 포함하여 양주 근처에 산재한 여러 산성 중 어느 성이 매초성의 지휘본부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양주 대모산성의 성벽 ⓒ 노시경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는 결정적인 계기는 675년에 이 매초성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거둔 대승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문무왕(文武王) 14년 9월 29일에 이근행(李謹行)이 이십만의 대병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와서 진을 치므로,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여 전마 3만 3백 8십 필을 획득하고, 기타 병기를 획득한 것도 이에 상등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 대모산성의 전나무숲 ⓒ 노시경

나는 매초성의 다락문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무너진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 안에는 산의 정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넓은 분지 지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모산성은 산 정상에 자리 잡은 분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었다. 그리고 그 분지 안에는 곧게 솟은 전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성 안에는 우물이 다섯 곳이나 있었다고 하니, 당시 넓은 성 내부는 장기간 주둔하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었으리라. 현재의 성안 정경은 정녕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운 정경이다.

내가 들어온 외성 안의 평지에 원래는 내성이 있었다고 하나, 그 흔적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성 안 분지에는 특별히 편평한 곳이 여러 곳 있고, 이 곳의 가장자리를 유심히 보면 건물의 주춧돌임이 분명한 원형의 돌들이 흩어져 있다. 대모산성에서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이 발견된 곳은 13곳에 이른다.

1980년대 초에 진행된 발굴조사 때에는 이 곳 군창(軍倉) 터에서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던 수백 점의 토기 기와 조각과 건물부재, 기둥구멍이 발굴되었다. 기와 조각에는 '덕부사(德部舍)', '덕부(德部)', '관(官)', '국(國)', '부(富)', '대부운사(大浮雲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 곳에 자리 잡은 관청 이름이 덕부사(德部舍)였고, 사찰의 이름이 대부운사(大浮雲寺)였을 것이다.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에서 발견된 건축부재는 방호벽이었던 건물 벽체의 아랫부분이었을 것이다. 제사 유구에서는 토제마와 청동마가 소량씩 출토되었는데, 영험하고 신적으로 생각되던 말을 가지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산성의 안녕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고 재앙을 막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터에서는 기마병들이 사용하던 마구류, 군수물자를 운반하는데 사용한 수레 부품, 대도(大刀), 화살촉과 같은 무기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산성을 신라시대 군인들이 이용하던 곳임을 알려준다. 이곳의 신라인들은 누구를 막고 있었을까?

양주 대모산성은 신라가 한강 이북에서 고구려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을 당시에 석재로 튼튼하게 쌓여졌던 성이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패망시킨 후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영토는 신라 땅으로 한다는 협정을 당나라와 맺었었다. 그러나 당은 백제와 고구려 옛 땅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신라까지도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의 문무왕은 670년(문무왕 10년)부터 백제의 옛 땅과 대동강 이남에서 당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672년(문무왕 12년)에 현재의 남한산성 등 많은 성을 쌓아 당나라와의 전투에 치밀히 대비하였다. 드디어 신라군과 당나라 군대는 대동강 이남과 한강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호로하(瓠瀘河: 임진강)와 고양의 행주산성 인근에서 신라와 당나라는 9차례나 부딪쳤고, 신라는 당나라, 말갈, 거란이 연합한 군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신라는 이 곳 매초성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무찌른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고,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영토를 신라 땅으로 귀속시킨다.


▲ 무너진 성벽 ⓒ 노시경 

나는 남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성벽 사이의 공간을 서성이다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대모산성 남쪽 성벽의 석재는 이가 빠지듯이 성벽의 틈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1400년을 잘 버텨온 성벽이 아쉽게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1300년 전에 당나라 군대는 정말 이 곳에 주둔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 대모산성 안에서는 당시 지구상 최강의 군대였던 당나라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고, 신라군들은 이 남문 밖에서 성을 오르려고 필사의 결전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고비마다 나타나서 무력을 행사하던 중국 군대는 이 대모산성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신라군에 의하여 처참히 무너진다.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전투용 말만 3만 필을 넘게 획득했으니, 이 전투는 한반도 한민족의 역사를 결정짓는 전투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역사적 사실이 단 2~3 줄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만이 짧을 뿐이고, 신라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전투는 결국 한민족이 중국을 몰아낸 힘이 되어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라군들은 자신들이 쌓았던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신라가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 간 전장에서 닦인 전투력과 함께 자신들이 사는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지, 그리고 이 땅의 사정을 잘 아는 유리함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들어왔던 북문을 찾아 성 밖으로 나가려다가 성 안에서 약간 혼란을 겪었다. 숲이 우거져 있고, 무너진 성문의 모습이 북문과 아주 비슷한 성문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성문터로 내려오다 보니 길 없는 길을 만들어 내려오게 되었다. 나는 길이 약간 어긋났다고 생각했으나, 내려와 보니 내가 북문을 향해 올라간 세심정이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곳의 지리를 몰랐던 당나라 군대도 나 같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현지 사정을 잘 안다는 것은 축구나 전투에서 홈팀이 유리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인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네이버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do에도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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