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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2"의 부여 관련 내용을 일부 가져왔고 제목의 "5-1"을 뺐습니다

부여국의 종료
연천선사박물관 관장 2012년 05월 17일 (목)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부여국은 역사적 변화에 따라서 서서히 사라졌다. 오늘날 동북아시아에서 ‘부여(扶餘)’라는 명칭은 불사조(不死鳥)로 전해지고 있다. 2천 년 전의 한반도 최초의 도시국가가 사라졌다. 

부여국 전기(前期)의 왕성(王城)은 길림시(吉林市)에 위치했으며, 명칭은 부여(扶餘)로 불려 왔다. 부여국 후기(後期)의 왕성은 농안(農安)에 위치했으나 여전히 부여로 불려졌다. 현 길림시 사평시(四平市)의 일면(一面)의 고성(古城)은 부여성으로 지칭되어 왔다. 현재에 부여 경내(境內)에 부여현(扶餘縣)이 존속되어 있다.

흑룡강성 지지할(齊齊哈賓) 북쪽에 부여(富裕)라는 현(縣) 이름이 존속되어 있다. 오늘날 넌강(嫩江)지류의 하나인 부유알천(富裕賓江)이 있으며 ‘부유알’이라는 명칭은 부여(扶餘)라는 명칭의 지방 사투리이다. 

부여국이 패망한 이후에 원부여국의 북쪽 지역에 두막류국(豆莫類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두막류국의 역사는 중국의 「신당서류귀전(新唐書流鬼傳)」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당대(唐代)에 그쪽 강의 명칭은 넌강(嫩江)과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으로 기록되었다. 이 두막류의 나라는 부여국 최후의 국가로서 부여국이 멸망되기 이전에 수도를 옮겨 세운 나라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비(好太王碑 碑文, 호태왕비 비문)에 따르면 기원 410년에 고구려국의 침공에 의해 64곳의 성(城)과 1천400여 곳의 촌(村)이 공격되었다. 이 내용은 일부분 부여인들이 북쪽의 강을 건너가 두막류국(豆莫類國)을 세웠다. 이 내용은 고구려가 부여국을 공격해 적어도 부여국의 4곳 촌락(村落)이 매일 공격당했으며, 동시에 5일에 1곳의 성(城)이 공격당했다. 

두막류국의 강역, 지리, 경제와 풍속 등이 「위서·두막류전」(魏書·豆莫類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면적은 사방이 2천 리 정도이며, 다섯 가지 곡물을 재배했으며, 이 땅은 원래 예맥(穢貊)지역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즉, 두막류국은 부여국과 모든 것이 일치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두막류국의 구역은 북쪽은 흑룡강과 접하고 남쪽은 물길(勿吉)과 접하고, 서쪽은 실위(室韋)와 접하고, 동쪽은 큰 바다와 접해 있으며, 사방(四方) 5천 리로 기록되었다. 그곳은 금일의 넌강 동쪽, 송화강 북쪽이며, 큰 바다는 일본지역의 바다에 면해 있다. 이곳의 현재 넌강평원의 북부 중심지역이며 삼강평원(三江平原) 일대이다. 경제는 농업위주이며, 말과 소가 주된 가축이었다. 

두막류국은 부여국의 정치제도와 일치했다. 부여국의 후예인 두막류국은 몇백 년 동안 부여국의 원 문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두막류국은 기원 486년에서 기원 724년까지 존속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즉, 존속시기가 약 300년이 된다.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두막류와 물길(勿吉)등 2종 문화가 혼합된 예가 확인되고 있다. 이후에 두막류는 역사책에 보이지 않으며,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겹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국은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천리(千里)에 위치하고,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류(挹類), 서쪽은 선비(鮮碑)와 접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약수(弱水)가 있었다. 지역은 2천 리 크기로 원래 예(穢地)였다. 가구(호구, 戶口)는 약 8만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곳에는 궁실, 창고와 감옥이 있었다. 

나라에는 왕(군왕, 君王)이 있었으며, 관리는 6가축 명칭으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대사(大使)와 대사자(大使者) 등이다. 국가 의복[國衣]은 언제나 흰색옷[白衣]을 입었다. 하얀 헝겊으로 소매가 크고, 도포[袍]도 입고, 바지[衣변庫]도 입고, 가죽신도 신었다. 

현재 중국측 기록에는 기원전 2세기 부여국(扶餘國)이 건립되었으며, 기원 494년에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다. 존속기간은 약 600년으로 동북역사(東北歷史)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고대민족이다. 내가 상기한 바와 같이 부여족(국)으로부터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국가가 탄생되었다.

고구려 제1대 국왕은 부여(扶餘)에서 왔으며, 고구려와 부여는 혈연적으로 연결되었다. 부여는 고구려 주요 족원(族原)의 하나이다.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경 예인(穢人)의 한 무리들이 탁리국(橐離國)을 건립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탁리국 왕자 동명(東明)이 그 내부에 분쟁이 발생하자 일부 무리를 데리고 누루하강(鳥裕爾)유역 남쪽, 송화강과 넌강이 만나는 지점에 부여국(扶餘國)을 건립했다. 
 
부여국의 강역이 대단히 컸다. 현 길림성 농안(農安)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은 도아할강(洮兒河)하류, 동쪽으로는 목단강 유역, 남쪽으로는 휘발하(輝發河)의 북쪽, 그리고 송화강 중하류 사이까지의 영역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부여국은 동이족(東夷族)으로서 가장 큰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은 송료(松遼)평원을 지칭했다. 
 
기본적으로 이 지역에 3개의 부여국이 건립되었다.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와 졸본부여(卒本扶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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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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