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67707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3)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68557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4)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69418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5)
"5-3 일부와 5-4, 5-5 일부 내용이 비슷한지라 합쳤고 부제를 내용에 따라 붙였습니다."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4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
연천선사박물관 관장 2012년 06월 07일 (목)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대표적 고구려 국왕은 광개토왕(廣開土王) 즉, 호태왕(好太王)이다. 그는 374년에 태어나서 기원 391년 그가 18세 때 국왕이 되어 기원 412년 39세로 사망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를 칭해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崗上 廣開土境 平安 好太王)’으로 고구려 역사상 가장 대표적 국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즉위해 1개월도 안 돼 백제(百濟)를 침범해 십성(十成)을 차지했다. 그는 391년 9월 북쪽의 걸안(契安)을 침범, 남녀 500여 명을 체포했으며, 10월에는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석권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으로 고구려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기원 370년 10월 백제와 고구려 군의 2차 전투에서 백제군 3만 명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백제군의 화살촉에 맞아 얼마 후에 사망했다. 그 후 375년, 376년, 377년과 386년 그리고 390년의 여러 차례 싸움에서 고구려는 성과가 전혀 없었다.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백제의 축국남7성(築國南七城)의 방어조치에 강력한 대응책을 제시했다. 기원 392년 호태왕이 친히 군사를 인솔해 20여 일 동안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고 그 후 2차 공격을 개시했다. 기원 396년, 호태왕이 또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을 공격해 8천여 명을 체포하고, 백제 58城(성)을 차지하고 700여 촌(村)을 차지한 후 백제 왕도(王都)에 진입했다.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나와서 무릎 꿇고 항복했다. 그리고 남녀 1천 인을 헌납하고, 헌겁[세포, 細布]도 1천 필을 헌납하면서 고구려에 복종할 것을 약속했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조선반도를 석권하는 기회가 되었다. 기원 400년에 호태왕은 5만 대군으로 백제와 일본 왜군의 공격을 차단시켰다. 이때 신라의 보호 하에 일본군이 조선반도에 진입했다. 이 지역은 대동강을 넘어 한강(漢江) 북쪽까지 이르렀으며 동시에 백제군은 큰 공격의 피해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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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410년 광개토왕이 북부에서 공격을 시작,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부여를 공격했다. 공격군이 부여성(城) 아래까지 왔다. 부여는 거역할 수 없어 고구려에 항복했다. 그러나 차지한 부여의 성읍(城邑)은 고구려 군대의 철수에 의해 보존시키지 못했다. 

광개토왕의 최대 업적은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거해 동북(東北)지역의 영웅이 됐다. 요동지역은 중국 전국(戰國)시기에 연나라(燕國)에 소속돼 있었다. 요동지역은 광개토왕 이전에 여러 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던 곳이다. 

요동지역은 토양이 매우 비옥한 곳으로 경제와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돼 인구가 조밀하고 자원이 풍부했으며, 중원문화(中原文化)를 흡수하는 곳이며, 동부 소수민족이 분리하게 되는 주된 중심 지역이 됐다. 서한(西漢)초기에 요동지역에 가구가 5만5천975가구가 있었으며 인구는 27만2천539명이 될 정도였다. 고구려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요동지역을 차지하려고 노력했으나 한번도 성공한 예가 없었다. 

군사전략 시각에서 보면, 요동지역은 역대로 ‘영웅백전지[英雄百戰之地]’였다. 예를 들면, 기원 105년에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이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공격해 초기에 약탈6현(掠奪六縣)했지만 중국 동한(東漢) 요동태수 경섭(耿夔)의 반격을 받아 고구려 군이 대패했다. 이 예가 고구려가 요동 최초 공격의 실패였다. 그 이후에 태조왕은 동한(東漢)에 평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태조왕은 10여 년 동안 다시 요동 공격을 준비해 재차 요동지역 현도군(玄菟郡)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으나 한(漢)나라의 강한 반격을 받았다. 

또 한 예로서 기원 121년에 한나라와 부여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큰 손실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의 요동지역 확장계획이 취소됐다. 

기원 404년, 광개토왕은 백제(百濟)를 패배시킨 이후에 연나라[後燕]를 공격할 방침을 세웠다. 즉, 요동지역을 다시 차지할 계획을 세웠다. 연왕 모용황(燕王 慕容 呈+光)이 출병해 2차 반격을 했으나 모두 실패해 요동지역은 고구려의 수중에 장악됐다. 고구려 태조왕이 최초로 요동을 공격하기 시작해 광개토왕이 최후로 요동을 공격해 점거하게 된 시기까지 300년이 지나갔다. 

요동을 수복한 이후에 광개토왕은 다음 방향을 부여(扶餘)로 돌렸다. 비록 고구려 개국의 왕 주몽(朱蒙)이 부여에서 태어났고, 고구려 왕족과 부여는 혈연적 관계가 있었지만 고구려와 부여 사이의 이해관계가 대단히 뚜렷이 제시됐다. 고구려 건국 초기에 부여로부터 기본적인 기초와 강대한 군사적 영향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기원 13년 태자 무혈(太子 無血)이 대군을 거느리고 부여를 공격했다. 또한 중원(中原)왕조와 연합해 부여를 공격했다. 

고구려는 몇 백 년 동안 부여를 압박했다. 결국 부여는 중국 조·위(曹·魏)나라 등의 협조를 받아 고구려를 공격했다. 광개토왕이 즉위 후 부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 410년, 광개토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부여를 공격했다. 부여는 저항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고구려는 부여의 대부분 땅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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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는 19년간 지속되었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왕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고구려의 강역은 점차 발전되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휘강(揮江)과 압록강 중유 일대를 차지했다. 중국 동한(東漢)시기에 그 강역은 부여 남쪽지역까지 이르렀다. 이곳은 현 휘강(徽江) 상류 일대이다. 남쪽으로는 살수(薩水, 현 조선 청천강)에 이르렀다. 서쪽으로는 제2현도군(第二玄 艸밑兎 郡, 현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英陵鎭)), 한대고성(漢代古城) 일대이다. 중국의 위·진(魏·秦) 시기에는 서부지역이 축소되고 남부지역은 확대되었다. 중국 동진(東晋)과 남북조(南北朝) 시기에는 요하(遼河)의 동쪽과 부여의 대부분 지역이 확보되었다. 
 
광개토왕에서 장수왕(長壽王) 말년까지 고구려의 광역은 남쪽으로 아산만(牙山灣)으로부터 오령(烏嶺), 죽령(竹嶺)을 경유해서 평해(平海)와 백제(百濟)를 거쳐 신라(新羅)와 접경지역까지 갔으며, 확대되어 조선 대동강, 제령강(載寧江), 임진강(臨津江), 한강 연안(漢江 沿岸) 등이 모두 고구려 땅이 되었다. 
 
《위서 고구려전 緯書 高句麗傳》에 따르면, “백성은 전위시기보다 3배 이상이며, 지역은 동서 2천리, 남북1천리”로 기록되었다.(민호3배 우전위시, 기지동서2천리, 남북1천리(民戶三倍 于前魏時, 其地東西二千里, 南北一千里)). 즉, 동쪽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해(黃海)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한강(漢江)유역까지 이르며, 북쪽으로는 요하(遼河)의 경계까지 이르러 동북아시아에서 최대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고구려 왕국 건국 초기부터 주위의 많은 민족(民族)과 부족(部族)이 흡수되었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비류부(沸流部), 옥저족(沃沮族, 포괄 북옥저), 주나부(朱那部), 갈사부(曷思部), 양맥부(梁貊部), 개마족(蓋馬族), 구다부(句茶部), 진번족(眞番族), 숙신족(肅愼族) 및 주위 다수의 한족(漢族)이 흡수 되었다. 삼국시기(三國時期)의 기록에 따르면 가구 수는 3만 호[民戶]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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