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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문' 칠성문

일간경기 승인 2016.06.19 16:58 


‘행복의 문' 칠성문을 나들지 못하는 사내에겐 딸을 줄 수 없다!



연광정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고쳐지은 누정이다. 여기에는 ‘천하제일강산’에 대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연광정은 경치가 아름다워 관서8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연광정에 걸려있는 ‘천하제일강산’이라는 형판과 관련하여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평양에는 단군릉과 동명왕릉, 연광정 뿐 아니라 평양성과 대동문, 보통문, 칠성문, 부벽루, 을밀대, 최승대 등 평양성의 유적과 대성산의 안학궁과 대성산성의 유적들, 영명사를 비롯한 사찰 유적들이 있다. 


이 역사유적들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사람들의 견결한 애국정신, 임진왜란시기 평양사람들의 애국투쟁과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그중 ‘행복의 문 칠성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칠성문은 옛날 평양성의 북문으로서 보통문과 함께 의주방면으로 통하는 성문이었다. ‘칠성문’이라는 이름은 북쪽을 가리키는 북두칠성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칠성문에는 고구려사람들의 용맹과 상무적 기풍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평양에는 돌범이라는 총각과 시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웃에 살면서 어릴때부터 서로 위해주며 다정하게 자랐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들은 나이찬 총각, 처녀가 되었다. 


돌범이 어머니는 시내 아버지에게 혼례를 치러 주자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내 아버지는 한마디로 잘라버렸다. 그것은 칠성문을 나들지 못한 녀석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칠성문을 나들지 못했다’는 말은 무술을 닦지 못한 사람이거나 변방을 지키는 국경경비에 한번도 나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돌범이는 이 말을 듣고 당장 무술을 닦으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홀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어 망설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괴로운 마음을 헤아려 자기 걱정은 말고 어서 떠나서 소원을 성취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돌범이는 3년을 기한으로 약속하고 떠났다.


어느덧 3년이 되어 돌범이는 무술에 능한 장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에 외적이 침입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고향마을에서 온 마을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가 그처럼 잊지 못해하는 시내가 3년 동안을 기다리다가 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시집을 갔다고 하였다.


돌범이는 6년 만에 늠름한 장수가 되어 큰 공을 세우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향마을이 가까워 올수록 그의 마음은 혼자서 고생하고 계실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니 괴로워졌다.


그런데 그가 집대문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아들을 반겨 맞으며 소리를 쳤다. “아가야 왔다. 어서 나오너라” 어머니의 반가운 소리에 다급히 나오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는데 그는 시내였다. 시내 아버지는 돌범이가 전쟁터로 나갔다는 기별을 듣고 딸더러 혼자 지내는 돌범이 어머니를 모시게 하고 시집을 갔다는 소문을 돌렸던 것이다.


장수가 되어 돌아온 돌범이를 본 시내 아버지는 ‘우리 장수사위’라고 대견히 여기며 자랑하였다. 그를 맞이한 마을의 이웃들도 제일처럼 기뻐하며 그들의 혼인잔치를 크게 차려주었다. 평양성 사람들은 돌범이와 시내의 행복은 칠성문을 드나들었기에 꽃핀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칠성문을 ‘행복의 문’이라고 불러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무술을 배우기 위하여 칠성문으로 드나드는 젊은이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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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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