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57458
나 때문에 딸이 파혼당할 뻔... 양승태는 이 고통 알까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정영 간첩조작사건
20.07.14 08:25 l 최종 업데이트 20.07.14 08:25 l 김성수(wadans)
▲ 정영씨는 조작 간첩으로 억울하게 15년 간 옥살이를 했다. ⓒ 진실의힘
정영은 1965년 10월 29일 경기도 강화군 미법도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서해 비무장지대에서 조개를 캐던 중 북한군 경비정에 의해 주민들과 함께 나포되었다. 그 후 정영 등은 북한에서 22일간 억류된 후 귀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되어 다시 평소와 다름없이 어업에 종사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982년 2월 8일 갑자기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가 정영, 정진영, 황정임 등 동네주민 10명을 연행해 다시 조사했다. 그러나 무혐의처분하고 이들을 모두 석방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1983년 9월 6일 안기부 인천분실은 한국전쟁 중 월북한 정진구의 동생 정진영과 그의 아내 황정임을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했다. 이어서 9월 13일 정진영의 7촌인 정영도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했다. 이들은 모두 구속영장이 발부되는 그해 10월 20일까지 각각 45일, 38일간 불법구금 된다.
고문 견디다 못해 자살 시도
정영은 당시 인천지방법원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안기부에 강제 연행된 후 38일 동안의 불법구금 중 받은 가혹한 고문조사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수사관들이 수시로 발가벗기고 야전침대 다리로 엉덩이를 구타해 엉덩이가 터져 팬티가 물들도록 피를 흘렸으며, 손바닥과 발바닥이 붓고 진물이 흘러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잠 안 재우고 벌 세우기 등 별의별 고문을 다 당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려고 화장실을 가던 중 경찰관을 뿌리치고 옥상으로 올라가다 붙잡혀 그 이후에는 밥도 수갑을 찬 채 개밥 먹듯이 먹었고 소변도 소변통을 가져다주어 조사실 안에서 해결했다.
정영은 또 지난 2008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1983년 당시 안기부에서 고문 받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수사관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보다 양팔을 벌리고 한 다리를 든 채 조사실 한쪽에 서 있게 한 후 팔이나 다리를 내리거나 하면 때리는 기합이 가장 힘들었다. 참 많이도 맞았다. 침대 받침목으로 마구잡이로 얻어맞았다. 온몸에서 피가 터져서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화장실을 가는 사이 옥상으로 뛰어가 자살을 하려 했지만, 짓이겨진 몸뚱이는 내 뜻을 따라주지 못했다. 모진 매질만 더해졌다.
며칠 뒤 아내마저 끌고 와 고문과 회유로 안기부에서 몇 날 밤을 보냈다.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수사관들에게 '우리 부부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인데, 둘 다 들어와 있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울부짖었다. '제발 집사람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며칠 뒤 아내가 석방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검찰에서 조사받았을 때) '검사는 들어주려나.'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검사는 오히려 내게 '햇빛도 못 보게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법정에서) '판사는 알아주겠지' 했지만 똑같았다. 법정에서 고문에 못 이겨 이런 거라고 악을 썼지만, 경위들에게 질질 끌려나왔다. 국선 변호사들도 '죄를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이미 간첩이 돼 있었다.
정영의 아내 황문자는 1983년 9월 21일 안기부 인천분실에 불법으로 강제 연행되어 8일 동안 조사를 받고 남편의 간청으로 석방되었다. 황문자는 당시 대법원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각목을 무릎 안쪽에 끼우고 꿇어앉게 한 후 손을 들고 있게 했는데 힘들어서 넘어지거나 하면 똑바로 하라고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며 불법구금 중 받은 가혹한 고문에 대해 적었다.
정영의 동생 정강명은 진실위에서 "(당시) 수사관들이 요구한 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주먹으로 뺨을 때렸다. 그러다 귀를 맞았는데 고막이 터져 지금까지 귀가 들리지 않는다"라고 진술했다.
정영의 7촌인 정진영의 아내 황정임은 당시 항소이유서에서 "(수사관들이) '독한 년, XX년, 옷을 벗겨라. 거꾸로 매달아라' 등 욕설을 하는데 그것은 겁이 나지 않았으나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으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라며 안기부 불법구금 중 받은 가혹한 고문에 대해 기술했다.
정영의 친척 정명영은 진실위에서 "내가 조사를 받을 때 옆방에서 수사관이 악쓰는 소리와 뭔가 부딪히는 소리 등이 들려 나도 겁을 먹었다. 아마 함께 연행된 (친척) 정강명과 정정진 둘 중 한 명은 구타를 당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진실위는 위의 여러 고문사실을 확인하고자 1983년 당시 안기부 인천분실 수사관이었던 김아무개, 박아무개 등을 조사하려고 4차례에 걸친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모든 출석을 거부했다.
지난 2007년 국정원 진실위는 국정원 보존 자료와 수사 및 공판기록을 확인하고 이렇게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정영, 정진영, 황정임의 범죄사실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간첩혐의를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인 당사자 및 참고인들의 진술이 수사기관의 필요와 계획에 맞춰 조작, 구성되었다... 검찰 수사기록을 확인한 결과 검사 작성 수사기록이 문답 없이 안기부 진술조서를 그대로 베껴 쓴 것 같은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로 문구 등이 거의 동일하다.
정영 부부의 맏딸은 당시 부모가 안기부에 불법으로 끌려간 뒤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어머니도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죠. 아버지가 간첩 정진구를 만나 공작금을 받고 집에 숨겨주지 않았느냐며 어머니를 괴롭혔습니다.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때리고 다리에 각목을 끼운 채 무릎을 꿇렸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이들을 생각하라, 사인만 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말에 어머니는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억울하면 나중에 판사한테 가서 다 얘기하면 된다'는 수사관들의 말을 철석 같이 믿은 거죠. 마침내 아버지가 유죄 판결을 받자 어머니는 치를 떠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야근을 한다며 집을 나가신 뒤 돌아오지 않았어요. 며칠 뒤엔 어머니도 사라지셨죠. 부모가 사라진 9일 동안 어린 네 남매가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털어놓은 얘기는 놀라웠어요. 아버지가 납북된 적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간첩 사건으로 끌려가기 한 해 전에도 열흘 동안 행방불명이 된 적이 있었죠. 그때 아버지는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초주검이 돼서 돌아왔고 수사관들이 '납북됐을 때 정진구(북한에 있는 친척)를 만나지 않았냐'고 다그쳤답니다. 수사관들이 그때 아버지를 풀어주면서 '1년 뒤에 보자'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게 된 겁니다.
당시 정영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검사는 임내현(1952-2018)이었다.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는 정영 사건 당시 임내현 검사의 행위를 이렇게 평가했다.
임내현은 인천 지검 재직 시절인 1983년 납북어부 (월북자가족) 간첩사건인 정영 사건의 수사 및 기소 검사로서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했다. 사건 피해자 정영 등이 수사기관에서 심각한 고문을 받아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호소했으나 이를 전면 외면했으며 재판 과정에서 법원과 긴밀히 협력해 비공개 재판을 진행하는 등 검사로서의 인권보호 의무는 준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내현 검사는 지난 19대 국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국민의당·바른미래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편 정영의 국선변호인은 억울하다는 정영에게 죄를 인정하고 판사의 자비를 빌라고 강권했다. 그리고 법정에서는 "선처를 바랍니다" 는 한마디로 정영에 대한 변론을 끝냈다. 그리고 인천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 그리고 1984년 9월 25일 대법원의 판결을 거쳐 정영은 무기징역, 정진영과 황정임은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이 각각 확정되었다.
화병으로 쓰러진 어머니
정영의 딸은 아버지가 1984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재판받을 때 아버지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반쯤 넋이 나가셨다. 그걸 보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죄가 없는 게 원망스럽다고 했다. 차라리 정말 간첩질이라도 했더라면 억울함에 정신이 나갈 지경은 안 됐을 거라면서.
아버지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어머니는 화병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셨다.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목재소에 다니던 어머니가 목재소에서 쓰고 버리는 나무껍질을 모아두면 우리 남매는 리어카에 싣고 왔다. 연탄 대신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한겨울 빙판길에서 나무껍질을 가득 실은 리어카는 종종 말썽을 부렸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리어카 손잡이가 위로 치켜지면 그걸 끌어내리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언 손으로 길바닥에 쏟아진 나무껍질을 주워 담는 일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을 힘들게 한 건 아버지였다.
정영 가족, 특히 자녀들의 고통은 그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약혼자와 처음 아버지를 면회하고 돌아오던 그의 맏딸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맏딸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아버지 일로 두 남동생이 맘껏 꿈을 펼치지 못한 것이었다. 정영이 '간첩죄'로 안기부, 교도소, 법원을 들락날락 했을 때 그의 큰아들은 사춘기였고 막내아들은 어린이였다. 정영의 아내가 일을 나가느라 막내아들은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큰아들은 사춘기 때 오래 방황하다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아예 삶의 의욕을 잃었다. 막내아들은 가족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 정영의 일로 울분이 쌓여 술만 마시면 사고를 쳤다. 결국 술 때문에 막내아들의 몸은 망가졌고 성격도 거칠어졌다. 직장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막내아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정영은 15년을 복역하고 지난 1998년 5월 15일 가석방되었다. 정영의 7촌 정진영과 정진영의 아내 황정임은 3년 만기복역 후 출소했다. 정영은 출소했을 때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15년 동안 복역을 했다. 참….아무 잘못도 없이…"
하지만 정영과 그 가족의 고통은 정영이 15년간 복역 후 출소 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정영은 출소 후에도 사랑하는 두 딸의 결혼식장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딸들이 '간첩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또 정영의 둘째 딸은 결혼하기 전 자신이 '간첩죄'로 복역한 것 때문에 파혼당할 뻔 했다.
그러나 정영과 그의 아내 그리고 친척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고 간첩으로 조작한 안기부 수사관들은 보국훈장을 받고 특진했다.
한편 지난 2009년 진실위는 정영 사건을 조사하고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안기부 인천분실은 정영, 정진영, 황정임을 영장 없이 연행해 38~45일 동안 불법 구금해 수사했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검찰에 연행일자를 허위로 보고했다. 그리고 정영 등에게 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해 정영으로부터는 1965년 납북되었을 당시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정진구에게 포섭되어 간첩행위를 했다는 허위자백을, 정진영, 황정임으로부터는 남파된 정진구를 만나 간첩행위를 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어 사건을 조작했다.
위와 같은 진실위 결정을 바탕으로 정영 등은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2010년 7월 8일 서울고법은 간첩혐의로 1984년 무기징역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한 정영의 재심에서 사건 발생 26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정씨는 안기부 수사관에게 불법 연행된 뒤 각종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함으로써 진술에 증거 능력이 없다. 권위주의 통치시대에 위법·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교도소에서 심대한 고통을 입은 정씨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 정씨의 가슴 아픈 과거사로부터의 소중한 교훈을 바탕으로 사법부가 국민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인권의 최후보루 역할을 다 하겠다.
정영은 16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뒤에 형사 재심을 거쳐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는 '피고 대한민국'의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1심과 2심에서 연달아 승소했다.
▲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20.2.21 ⓒ 연합뉴스
피해자 다시한번 울린 양승태 대법원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지난 2014년 4월 18일 박근혜 정권 당시 양승태 대법원 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안기부 조작으로 간첩누명을 썼던 피해자 정영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양승태 대법원은 '재심 무죄판결로부터 6개월 안에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며 정영 등의 청구를 기각했던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다른 과거사 피해자들의 소송에서도 같은 이유로, 같은 판결을 냈다. 그러자 정영 등 피해자들은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이 잘못됐다며 헌재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그리고 지난 2018년 8월 헌법재판관들은 6대 3으로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 조작의혹사건에는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시작점을 '불법행위를 한 날', 즉 6개월로 계산하는 민법을 적용하면 안 된다고 결정했다. 헌재는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과 관련해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은 "관련 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 중대한 인권침해·조작 사건은 "재심 무죄 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라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국가폭력사건에 대해 소멸시효 '6개월'을 내세운 양승태 대법원 판결이 잘못됐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정영 등은 위의 헌재 결정을 근거로 국가배상소송 재심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19년 4월 5일 마침내 서울고법 민사에서 정영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승소했다. 이어서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정영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도 배상청구 소멸시효를, 양승태 대법원의 6개월이 아니라 3년이라고 판결했다.
이 소멸시효 3년 판결은 국가폭력 손해배상 재심의 첫 대법원 판결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하급심 법원에서는 국가폭력 피해사건의 손해배상과 관련해 2013년 양승태 대법원 판례인 6개월 시효를 인정하는 경향이 많다. 우리나라 법원은 언제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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