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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사 - 2. 태산과 같이 
2011/04/12 08:28:47  눈시BB


합포 해전은 마산이냐(일단 통설) 진해냐로 설이 나뉜다고 합니다. 진해라면 경야한 걸로 표시된 남포 근처가 되겠죠. 그나저나 직선으로 죽죽 긋다가 곡선으로 하니 힘드네요. 이 글이나 앞으로의 글들에 "일본 수군 병력"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무조건 워포그에서 나온 말들 베꼈다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5월 5일 당포에 도착한 시점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적의 소굴로
 
앞서 5월 2일, 남해로 나아간 전라좌수군은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남해현의 미조항, 상주포, 곡포, 평산포가 텅 비어 있던 거죠. 이미 이 보고를 접했지만 직접 보니 황당했을 겁니다. 결국 창고를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가져가기에는 어렵고 적이 쓰지 못 하게 함이었죠. 

후에 기효근 등이 돌아왔을 때는 초토화된 상태였고, 김성일의 장계에도 이들이 돌아온 후 어렵게 버텼다고 합니다. 이는 후에 기효근 등이 이순신을 욕 하는 구실이 되죠. 이 시기는 적이 한강을 막 넘고 한성에 도달한 때로 이미 점령한 경상우도 일대에는 60~80명 정도의 적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적은 없었습니다.

자기 말로는 싸우러 나갔다고 하지만... 글쎄요.

5월 5일, 당포 앞바다로 나갔지만 원균은 오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모르니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죠. 빨리 당포 앞으로 나오라는 통보를 한 뒤 하루를 보냈죠. 

6일 원균은 나타납니다. 다음 날 한산도 쪽에서 나타나죠. 단 한 척만을 타고 말이죠. 적이 얼마나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묻는 동안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한 척에 타고 나타납니다. 위에 불태운 남해 포구를 맡은 장수들이었죠. 한편 사량만호 이여념,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각기 협선(연락용 배)을 타고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 옥포만호 이윤룡 등이 두 척에 나눠 타고 도착했습니다. 판옥선 네 척, 협선 두 척의 참 대단한 함대였죠. 이렇게 연합 함대는 탄생합니다.

전라좌수영 병력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이었습니다. 포작선은 보자기배로 불리는데 고기잡이 배였습니다.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싹싹 긁어모아서 간 거죠. 그 이후의 해전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판옥선 28척의 함대가 모였습니다. 목표는 가덕도. 부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앞으로 계속 언급될 겁니다. 가덕도가 역사에 나오는 건 거의 이 때 뿐인데 400년 후에 화제의 중심에 오르게 될 지 누가 알았을까요.

6일에 거제도 남단을 돌아 동쪽 송미포에서 하루를 지샙니다. 견내량을 통과하다간 적의 눈에 띄일 것이니 그걸 피하려 한 것이죠. 조선 수군은 심심하면 이 길로 갔지만 일본군은 단 한 번도 이 곳을 이용하지 못 했습니다. 그 정도로 해전에 약했던 거죠. 

다음 날, 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장소는 옥포였죠.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 신기전을 쏘아 알렸고, 이순신은 전군에 명을 내립니다.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고 신중하기를 태산과 같이 하라.

아마 옛 말 중 하나를 인용한 것일 건데 못 찾겠군요. 


2. 옥포 해전
 
당시 옥포에서 약탈하고 있던 적은 도도 다카도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맞다면 수군 총대장이 약탈이나 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게 되겠죠. 그야말로 바다에서 적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느낌이 강합니다. 낮 12시 쯤이었습니다.

임진장초에 실린 이순신의 장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적도들은 그 포구에 들어가 분탕하여 연기가 온산을 가렸는데, 우리의 군선을 돌아보고는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급하게 노를 저어 중앙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으로만 배를 몰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6척은 선봉으로 달려 나오므로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한결같이 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배안에 있는 관리와 군사들도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분발하여 죽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이 때 적은 뛰쳐나온 6척을 제외하면 육지로 달아나기 바빴으며, 26척을 깨뜨리고 불태웠다고 했습니다. 이 중 경상우수영에서 깨뜨린 적은 5척이구요.

긴장되었던 첫 전투는 이렇게 화려한 승전으로 장식되었죠. 이후 거제도에 상륙해서 적을 섬멸하려 했으나 포위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포기하고 영등포로 가서 정박할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죠. 왜 대선 5척이 멀지 않은 바다에서 지나간다는 보고가 왔거든요. 이렇게 웅천의 합포 앞바다까지 전진합니다. 오후 4시쯤 마찬가지로 5척을 깨뜨리고 남포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8일에는 [진해 땅 고리량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들고 출진, 각 해변을 샅샅이 수색하면서 전진해서 고성 적진포에 도착, 적을 격파했습니다. 이 수가 또 13척이었죠. 

이 전투 후 가덕도로 다시 전진하려고 했으나 지형이 영 좋지 않고 이억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각을 결정합니다. 이 결정을 내릴 때 왕이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죠.

[상감께서 관서로 피난가셨다는 기별을 듣게 되어 놀랍고 통분함이 망극하여 오내(五內)가 찢어지는 듯 하고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종일 토록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습니다.]

임진장초에 기록돼 있는 내용입니다. 다음 날인 9일 정오에 본영에 도착한 후 "배들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고 명을 내린 후 해산합니다. 진격만큼이나 빠른 퇴각이었죠. 이렇게 1차 출동은 끝이 납니다.


3. 일본군 병력
 
일본 수군의 자세한 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키 요시타카 - 1500
도도 다카도라 - 2000  
와키자카 야스하루 - 1500
가토 요시아키 - 1000
구와야마 마사하루 -1000
구루시마 미치후사 - 700
도쿠이 미치토시 - 700
스가이 에몬쇼우 - 250 
호리우치 요지요사 - 850
스기와카 덴사부로 - 650 

이렇게 해서 총 병력은 9450명입니다. 보시면 에게? 하실 겁니다. 가장 많은 도도 다카도라만 해도 이천 명은 순수 전투병력이고 격군 등 비전투병력을 뺐다고 해도 한 척에 40명씩만 태워도 50척밖에 안 나오죠. 그나마 저것도 쥐어짠 병력입니다. 임란 당시 도도 다카도라의 영지는 2만석 정도로, 1만석 당 보통 250명 정도 뽑는 게 평균이라고 하는데 이를 따지면 가능한 병력은 500명, -_-;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경우 3만석이고 구키 요시타카는 3만 5천석.

참고로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동원한 병력은 990명입니다. 

이렇게 당시 수군으로 편성된 다이묘들의 규모로 생각하면 이후의 해전 규모가 성립이 안 됩니다. 당장 다카도라만 해도 옥포해전에서 26척이 불 탔으니 전 함선의 절반 이상이 당했다고 봐도 될 정도니까요. (병력은 도망갔다니 그러려니 합시다.) 그나마 2차 출동까지 가면 말이 되지만 3차의 한산도로 가면 정말 말이 안 되네요. 

이런 점에서 김경진님은 이 수군들은 모두 수송선 호위, 길잡이 용으로만 해당된 병력이고 옥포 해전조차도 싸운 병력의 다수는 육군이었을 거라고 주장하시더군요. 흐음... 따져보면 처음 돌격해 온 6척만 수군이었을까요? -_-a 아무튼 도도 다카도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 그가 직접 참가했는지 같은 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 여기서 만난 적들은 모두 조선 수군을 보자 도망가기 바빴다는 겁니다. 

이런 통설 (임란 해전에는 일본 수군만 참전했다) 은 일본인들이 이순신의 공을 낮추는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아마 계속하게 될 듯 하네요. 특히 3차 출동에서요. 


4. 후일담

1) 연명장계 사건
 
수정실록에 따르면 이 때 원균이 "장계를 같이 쓰자"고 했는데 이순신은 "천천히 하자"고 해 놓고 혼자 장계를 올렸고, 그 때문에 원균이 열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 원균옹호론의 중추로 이순신 역시 공을 탐했다는 게 주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기 전에 송우혜 교수가 강력하게 반박하죠. 당시 장계를 보내는 시스템은 조정에 올리면서 주변 지휘관들에게 그걸 알리고 복사본을 보내는 식이었습니다. 당장 난중일기만 봐도 "원균의 공문이 오고 그걸 주변에 보냈다"는 식이 많습니다. 혼자 몰래 장계를 보낸다는 게 불가능한 겁니다.
 
임진장초에서나 난중일기에서나 경상우수영 병력이 5척을 깨뜨리고 조선인 1명을 구출했다고 하면서 그 쪽 란을 비워놨습니다. 원균이 이에 반박하려면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애초에 연명장계를 올리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상식에 어긋나니까요.

재밌는 건 임진왜란 중에는 이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분명 이순신을 까기 좋은 내용인데, 정작 나오는 건 "원균이 자기 아들에게 공이 있다고 올리자 이순신이 이걸 깠고, 그 때문에 원균이 열 받았다"는 겁니다. 혼자 몰래 공을 올렸다는 건 정유재란 전에 나오는 얘기죠.

한편 이 장계에서 "오직 우수사 원 균은 단 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신의 여러장수들이 사로잡은 왜선을 활을 쏘면서 빼앗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사부와 격군2명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참 잘 하는 짓입니다. 그런 한편 거제현령 김준민이 거제도 근처에서 싸우는데도 원균이 불러도 안 온다고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전 글에 적었듯 김준민이 원균에게 많이 실망한 모양입니다.

2) 전과
 
이 때 왜선에 실린 물건을 창고에 넣으니 다섯 칸을 채우고도 남았고, 쌀 300석은 격군과 사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철갑, 총통 등의 물건과 수급 하나를 조정에 올려 보내죠. 확실한 승전의 증거였습니다. 이 때 순천 대장선의 사부 이선지가 왼쪽 팔에 화살을 맞은 것 말고는 아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저 원균이 팀킬한 거 말고는요.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전이었습니다.

한편 순천대장 유섭이 구한 조선인 소녀를 심문했는데 아버지가 다대포 수군이었다고 합니다. 왜란이 닥치자 숨어 있다가 붙잡히고 오빠랑도 떨어졌고, 자신은 배 밑창에 갇혔다고 하죠. 그러면서 옥포해전에서 이긴 적들의 이동 경로를 말해 줍니다.

30여척 김해 -> 상륙 후 놀다가 6일에 율포 -> 7일에 옥포
이런 식이었죠. 당시 일본군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보여주는 것 중 하나겠네요.

임진장초와 난중일기에는 적 규모가 30척이었다고 적었습니다. 후에 이충무공전서에서는 50척으로 적혀 있죠. (원균행장록은 100척 ^_^) 김경진님은 일본 기록에는 피해가 50척이라고 하셨는데 이거 생각하면 오히려 어이가 없죠. 당한 일본 기록보다 장계 올린 전과가 더 적은 겁니다. 

세 차례의 해전에서 얻은 총 전과는 총 42척 격파였습니다. 자세한 건 해당 장계를 재밌게 읽어 주세요.

3) 다시 바다로
 
이렇게 옥포 해전으로 대표되는 1차 출동은 경상도 해안을 무인지경으로 돌아다니던 일본군에게 벼락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거제도 남해안을 돌아가면서 적이 알지 못 하게 했고, 단 이틀 동안 곳곳을 헤집으며 쓸어버린 후 썰물처럼 빠져 버린 겁니다. 그야말로 인간 재해, 쓰나미나 다름 없었죠. (이 말 때문에 임진왜란 편 나중에 쓸까 했는데 솔직히 다른 걸로 대입할 게 없네요. 계속 쓰겠습니다.) 

이 때는 선조가 막 도망간 상황으로 일본은 해전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못 한 상황이었습니다. 1차 출동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본군은 선조의 도망으로 보급을 제대로 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경상우도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산포 근처까지 왔다 간 조선 수군을 막을 궁리도 해야 했죠. 초전은 끝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해전이 시작됩니다.

한편 이순신은 (그냥 최대한 이순신이라고 하려고 하는데 ~은 붙일 때마다 두근두근하네요 - -) 적이 육로로 올 때나 상륙을 할 때를 위한 걱정을 시작합니다. 수군에는 말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수군에서 말을 훈련시켜서 써도 될까 하는 의견을 장계에 첨부해서 보냅니다. 

그는 이번 출동 중에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대체로 보아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분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에 돌진하면서 함께 대첩할 것을 기약하였는데, 무릇 앞뒤 해전에서 40여 척을 불태우고 부술 즈음에,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다만 둘뿐이다 . 섬멸하고 싶은대로 다 못하여 더 한층 통분했지만, 접전할 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듯하며, 우리 배를 보고 미처 도망치지 못하면 으레 기스락을 따라 고기두름 엮는 듯이 줄지어 행선하다가,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뭍으로 도망했다.그런데도 이번에 섬멸하지 못하여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고 탄식했다."

한 번쯤 곱씹어 보며 이번 편을 끝내겠습니다.


아무튼 위인전 수준으로 썼을 거에 엄청난 자료를 투척해주신 나이트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거의 베끼기 수준이지만 그래도 고민 많이 해 보겠습니다. 덕분에 각 다이묘들 석고 계산까지 해 봤네요. 그리고... 저런 허접한 일본 수군에 도망간 이가 있었으니... -_- 에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 하나 더. 카서스님이 얘기하셨던 교수님 분들은 한국사 전공이신가요? 저도 복학하면 기회 닿을 때 한 번 말씀드려 봐야겠네요. 이상하게 서양사 교수님과만 연이 닿아서 생각을 못 해봤네요. 복전자의 한계겠지만요. 다음편은 거북선과 조선 수군 vs 일본 수군에 대해 나름 고찰해 보면서 2차 출동을 다뤄보겠습니다. 좀 길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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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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