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19497


'디지털성범죄' 석방한 판사의 의미심장한 한마디

[시끌법정 ④] 심각한 피해 주는 불법 촬영... 솜방망이도 철퇴도 아닌 '합당한 처벌' 필요

20.03.25 08:44 l 최종 업데이트 20.03.25 08:44 l 소중한(extremes88)


'당신의 재판'이 진행될 수도 있는 법정 안팎의 내밀한 모습을 '시끌법정'에서 보여드립니다. [편집자말]


 불법촬영중인 피의자

▲  불법촬영중인 피의자 ⓒ 경기남부청

 

철퇴, 그리고 솜방망이.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극단의 단어들입니다. 엄한 처벌에 대해선 "철퇴를 가했다"는,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으면 "솜방망이 처벌"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철퇴가 곧 '사이다'처럼 느껴질 순 있겠지만, 엄벌주의가 답이 아니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철퇴 대신 솜방망이를 들라고도 할 순 없겠죠. 철퇴도, 솜방망이도 뭔가 찜찜한 건 사실입니다.


지난 기사에서 불법 촬영 문제를 다루며, 법원의 유·무죄 판단에 대해 지적한 바 있습니다(관련기사 : '자살까지 할 필요 있냐'는 댓글에 피해자 아빠의 답변). 하지만 제가 더 문제 삼고 싶은 건 양형(유죄로 판단할 경우 형벌의 정도를 정하는 것)입니다. 철퇴와 솜방망이 이야기를 꺼낸 건 이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2개월 동안 직접 방청하거나 취재한 9건의 불법 촬영 재판에서 7명에게 벌금 또는 집행유예가 내려졌습니다.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피고인들도 상당수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초범은 벌금, 재범은 집행유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법 조항에 비해 처벌이 약했습니다.


벌금, 집행유예, 약식기소

 

 지난 20년 불법촬영 범죄의 연령 및 처벌 현황.

ⓒ 법무부 "2020 성범죄백서"

 

통계를 봐볼까요. 법무부가 발행한 '2020 성범죄백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불법 촬영으로 재판을 받은 9317명 중 5268명에게 벌금형(약 57%)이, 2822명에게 집행유예(약 30%)가 내려졌습니다. 징역형은 763건(약 8%)에 불과했죠.


지난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된 한 불법 촬영 2심 재판이 떠오릅니다.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피고인은 2심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또 범행을 저질러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1심 선고 후 항소심이 계속되는 와중에 다시 범행을 저질렀고 촬영한 신체 부위, 밀착성, 횟수 등에 비춰볼 때 죄질이 아주 무겁다"라고 말하면서도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판사 : 재판부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정신과 치료 단단히 받도록 하고, 피고인 이거 외엔 다른 전력은 없죠?

피고인 : 네


판사 : 이번에 뼈저리게 느껴서 다시는 법원에 이런 일로 오지 않길 바랍니다.

피고인 : 네, 감사합니다. 

     

사실 법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검찰 통계 역시 많은 걸 이야기해줍니다. 법무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에 6827건의 불법 촬영 사건이 검찰에 접수됐는데 그중 기소된 건 2310건에 불과했습니다. 1/3 수준이죠.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순 있지만, 다른 범죄에 비해 기소율이 낮은 건 사실입니다.


그나마 기소된 2310건에서 603건(약 26%)은 약식기소로 처리됐습니다. 2018년엔 2280건 중 749건(약 33%)에, 2017년엔 2291건 중 885건(약 39%)에 약식기소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죄의 위계?

 

 불법촬영물 생산 뿐만 아니라 '소비'도 범죄임을 알리는 참가자들

▲  불법촬영물 생산 뿐만 아니라 "소비"도 범죄임을 알리는 캠페인. ⓒ 권혜리

 

'디지털 성폭력'이란 표현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불법 촬영도 엄연한 성폭력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디지털 성폭력을 전통적 의미의 신체접촉에 의한 성폭력보다 하위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난 기사에서 다룬 한 재판의 사례처럼, 불법 촬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까지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을 우위에 놓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사안에 따라 신체접촉에 의한 성폭력보다 디지털 성폭력의 피해 정도가 더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판사들 역시 법에 명시된 형량(법정형)에 따라 죄의 위계를 정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강간이나 강제추행은 불법 촬영보다 법정형이 더 높기 때문에, 판사들이 '강간이나 강제추행보다 불법 촬영 형량이 더 높아도 될까'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거죠. 그래서 보수적으로 벌금형이나 집행유예 판결이 많이 나오는 겁니다.

     

이전에 다뤘던 보이스피싱 범죄의 경우 법원에서 매우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관련기사 : 죄명도 후덜덜한 '범죄단체' 재판, 제가 가봤습니다). 그 이유는 선량한 다수에게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범죄를 대등하게 놓고 비교할 순 없지만, 불법 촬영도 보이스피싱 못지않게 선량한 다수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범죄입니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경제적 피해를 통해 인간을 무너뜨린다면, 불법 촬영은 존엄성 및 인격 훼손을 통해 인간을 무너뜨립니다. 최근 그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오랜 시간 겪어 왔습니다. 이들의 고통은 쉽사리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가해자 처벌은 그 고통을 지워 나가기 위한 선결조건입니다. 


단순히 엄벌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처벌 강화가 범죄를 제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강조하고 싶은 건 엄벌주의가 아닌 '합당한 처벌'입니다. 철퇴는 바라지도 않으니 솜방망이는 거둬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편 '불법 촬영물을 소지·시청한 사람까지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현행법상 아동·청소년 음란물을 소지·시청한 사람 외엔 처벌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피해자의 고통은 촬영·유포뿐만 아니라 소지·시청에서 폭발적으로 가중됩니다. 소지·시청이 줄어들면 촬영·유포도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득일지, 독일지

 

 서울중앙지방법원 로비.

▲  서울중앙지방법원 로비. ⓒ 소중한

 

지난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법정에선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치마 속을 약 500건이나 촬영한 피고인이 선고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구속돼 재판을 받던 20대 피고인은 수의를 입은 채 초조한 표정으로 판사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죠. 판사는 "몰카의 사회적 폐해를 생각해 보면 죄질이 좋지 않다. 촬영 횟수나 기간을 보면 실제로 굉장히 심하다"며 피고인을 다그쳤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만 피고인이 잘못을 인정하고 있고 초범인 점, 성도착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던 점, 일부 피해자가 합의해 처벌을 원치 않은 점, 피고인이 아직 학생이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은 점"을 열거하며 "피고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치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결국 피고인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석방을 앞둔 피고인도, 방청석의 가족도 눈물을 흘리더군요. 불법 촬영을 저지른 피고인은 대체로 젊기 때문에 이처럼 대부분 방청석에 부모가 와 있습니다(20·30대가 66%, 법무부 '2020 성범죄백서').


반면 피해자는 대체로 법정에 없습니다. 피해자가 재판에 나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피해자가 공공의 영역에 나서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적극 목소리를 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해 보면, 피고인에게 내려진 형의 차이가 꽤 납니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피고인과 그 부모의 눈물을 보며, 법정에선 보지 못했던 피해자의 눈물도 함께 상상해 봅니다. 위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사는 이 같은 말도 남겼습니다.


"이것이 피고인에게 좋은 건지, 독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끌법정③] '자살할 필요 있냐'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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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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