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10095400376


[취재파일] 아시아나항공에 드리운 '금호그룹'의 검은 그림자

한세현 기자 입력 2020.05.10. 09:54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그러나 인간이 지금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신의 그림자가 떠도는 동굴들은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독일 철학자 니체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HDC현대산업개발(이하 HDC현산)의 아시아나항공 인수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니체의 일갈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신'처럼 존재하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이하 금호그룹)은 죽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아시아나항공 앞날에 어둡게 드리운 거 같았습니다.



● "HDC현산, 아시아나항공 인수 포기할 가능성 커졌다."

 

그 어둠의 그림자가 더 짙어진 것은 지난달 29일이었습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무기한 연기한 것입니다. 벌써 3번째입니다. 주식 취득 시점도 구체적으로 못 박지 않았습니다. 당장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포기할 수 있다."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정말 포기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럴 가능성도 상당히 커졌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상급 보안 속에 진행되는 기업 인수합병 특성상 취재가 쉽지는 않았지만, 취재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인수 강행'→'인수 포기'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미룬 공식적인 이유는 '기업결함심사 미승인'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이 취항하는 6개국에서 기업결합심사를 마쳐야 하는데, 러시아에서 아직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장은 의구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미국과 중국 등 이미 5개국의 승인이 나온 상황이어서 인수 의지가 있다면 굳이 주식 취득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항공업계에 정통한 한 애널리스트는 "HDC현산이 앞서 두 번 연기할 때는, 연기는 하지만 인수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런 취지의 사인을 시장에 전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라고 전했습니다. 또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의 대출금 상환 연장, 금리 인하 등 인수조건을 바꿔달라고 채권단에게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인수를 포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밝힌 것으로 본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수를 포기할 수 있다."라는 분석입니다.

 

정부 부처 관련 업무를 보는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도 "코로나19로 도산 위기에 처한 항공사들까지 나오며 값이 엄청나게 내려갔다. 집을 10억에 사겠다며 계약금을 1억 원을 줬는데, 집값이 5억으로 절반 떨어졌다고 하자. 계약금 1억 원을 날리더라도 계약을 포기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다. 아마 HDC현산은 그런 기분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 아시아나항공 인수, 왜 안갯속으로 빠졌을까?

 

1. 근본적인 원인은 시장 상황이 극적으로 악화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일본 불매운동'에 이어,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의 국경이 사실상 막혀버렸습니다. 항공업계 전체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는 수준이 된 것입니다. 지난해 11월 HDC 현산이 밝힌 구매 가격은 2조 5천억 원. 만약 코로나19 사태가 조금 더 일찍 터졌더라도 이 가격이 언급됐을까요? 단언컨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2. 문제는 외부변수만이 아닙니다. 아시아나항공 내부에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구조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엉망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빚으로 기록되지는 않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채무가 될 가능성이 큰 '우발채무'가 예상보다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치 암환자를 수술하려고 개복해보니 암세포가 훨씬 더 광범위하게 악성으로 퍼져 있던 셈입니다. 인수과정에 나섰던 HDC 현산 실무자들이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3. 마지막으로 HDC현산 내부 사정도 문제입니다. 5천억 원을 보태며 재무적 투자자로 인수에 함께 나섰던 미래에셋금융그룹이 자금난에 빠진 것입니다. 미래에셋은 최근 주가 하락과 해외 부동산 투자 과정에서 코로나19 영향을 받으며 고전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미래에셋은 미국 내 15개 고급 호텔과 휴양지를 7조 원에 사들이기로 한 계약을 최근 해지했습니다. 여러 사항이 있겠지만, 코로나19로 호텔업 시장이 심각하게 나빠지며 인수대금 조달을 위한 투자자 모집이 어려워진 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전해졌습니다. HDC현산과 미래에셋이 호텔과 항공사 동시 인수를 추진한 것은 두 업종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호텔업 인수를 포기한 상황에서 항공사가 매력적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 "한화그룹도 이행보증금을 절반가량 돌려받았다."

 

아시아나항공 인수 작업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전했습니다. "과거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포기한 적이 있다. 그때 9년 동안 법정 소송을 벌여 이행보증금 3,150억 원 가운데 절반 이상(1,951억 원)을 돌려받았다. 이것이 시사하는 점은 매우 크다.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포기해도 계약금 2천5백억 원을 전부 다 날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HDC현산은 인수를 포기하면 계약금 가운데 얼마 돌려받을 수 있을 수 있을지 등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 들여다보니 아시아나항공의 재무상태가 매우 심각하다.", "코로나라는 불가항력인 변수로 시장 상황이 너무 나빠졌다." 등 돈을 일부라도 돌려받을 여러 논리를 준비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증권사도 "지난해와 매우 달라진 상황에서 아시아나항공 인수 여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가지 제고를 위한 현명한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권고했습니다. 한마디로 HDC현산 입장에서 보자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재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입니다. 산업의 토대가 되는 국가 기간사업을 내버려 둘 수 없는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입니다.

 

● "끝까지 알차게 털어먹는다."

 

이처럼 인수작업이 '시계 제로'로 빠진 상황에서, 모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이하 금호그룹)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사실상 멍하니 손을 놓고 있습니다. 대한항공의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한진그룹이 유상증자와 토지 매각 등 1조 5천억 원 규모의 자구안을 검토 중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런 점도 HDC현산의 고민을 더 깊게 합니다.

 

HDC현산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의 지난해 6월 재무상황을 보고 인수를 결정한 것인데, 지난해 4분기 부채가 3조 원 가까이 증가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수천억 원의 손실이 예상되는데 직원 무급휴직 외 그룹 차원의 다른 자구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에서 금호그룹은 아시아나항공에서 상표사용계약금 120억 원까지 받아갔습니다. "그룹 차원의 자구 의지가 없다.", "끝까지 알차게도 잘 털어먹는다.", "강제 휴직시켜서 남긴 돈은 그룹에 상표사용료로 주고 나니 끝났다." 등의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 "빚을 갚을 여력조차 없다."…금호그룹의 추락

 

이 같은 비판을 금호그룹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뀌는 것도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금호그룹도 당장 제 코가 석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을 포함해 아시아나IDT, 에어부산 등 7개 계열사를 통째로 넘기며, 한때 재계 7위였던 금호그룹은 60위권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사들이 제때 팔리지 않으며 자금난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애초 금호그룹은 아시아나항공 구주 매각 대금 3천2백억 원을 그룹 재건에 보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수가 늦어지며 대금을 손에 쥐지 못했습니다. 지난 달 말 만기였던 산업은행 차입금 1천3백억 원은 갚지도 못했습니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돈을 빌린 처지에 할 말이 없다. 채권단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라고 한숨 쉬며 말했습니다.

 

만기가 도래한 이 차입금은 산은 등 채권단이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추진하며 금호고속에 지원했던 것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이 안 팔릴까 봐 금호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금호고속에 단기 대출해준 것입니다. 금호그룹의 지배구조가 '박삼구 회장→금호고속→금호산업→아시아나항공'으로 이어지기에, 금호고속이 차입금을 갚지 못해 금호산업에 대한 지배력을 잃으면 아시아나항공 매각 계획 전체가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빌린 돈을 결론적으로 금호그룹은 제때 갚는 데 실패했습니다. 실패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책임은 결국 최고경영자인 박삼구 회장에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박 회장과 관련된 다양한 논란들.'기내식 대란', '승무원 미투', 전업주부이던 딸을 임원으로 꽂아 넣은 것 등을 보면, 어쩌면 이 같은 실패는 필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실상 쫓겨난다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등 각 계열사에서 총 64억 8천400만 원을 받아 챙겼습니다.)

 

● 오늘보다 내일이 더 암울한 금호그룹

 

참여연대 등 외부의 비판에도 산은이 만기를 다시 연장해줬습니다. 항공이라는 국가 기간산업을 대책 없이 쓰러트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덕에 금호그룹은 당장 급한 불을 끄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재정난은 여전합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금호고속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은 고작 219억 원에 불과합니다. 목포터미널, 대전터미널 등의 자산 또한 채권 담보로 잡혀 있습니다. 유동화 가능한 자산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사태로 금호고속의 여객은 감소했습니다. 지난 2월 이용객은 112만 5천 명으로 전년 216만 명보다 절반가량 줄어들었습니다. 3월 이후로는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유일한 희망은 건설 계열사 금호산업인데 이마저도 코로나19로 건설경기도 좋지 않아 낙관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아시아나항공을 어떻게든 팔아야 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호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거란 분석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금호그룹에 아시아나항공은 지원할 대상이 아닌 빨리 팔아치워야 할 대상인 셈입니다.



● "우리는 그의 그림자 역시 정복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금호산업 특히 박삼구 회장 입장에서는 보면 이 기사가 그렇게 불행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아시아나항공 인수 과정을 줄곧 지켜보며 과연 금호그룹이 항공이라는 국가 기간사업을 경영할 자격이 있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국가 기간산업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금호그룹과 박삼구 회장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들려온 박삼구 회장의 거액의 퇴직금 수령 소식은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박 회장에게 아시아나항공은 '책임질 대상'이 아닌 '단순한 돈벌이의 대상'은 아니었나, 이런 의구심마저 듭니다. '난기류’에 빠진 아시아나항공 매각은 그런 면에서는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이 지금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신의 그림자가 떠도는 동굴들은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우리는 그의 그림자 역시 정복해야만 한다."

 

오늘 우리는 국가 기간산업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를 과연 제대로 정복하고 있을까요? 국민과 역사는 엄중하게 묻고 있습니다.     


한세현 기자vetm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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