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선택한 전쟁, 약자를 배신한 전쟁 - 나당전쟁
고구려사 명장면 136
임기환 2021. 11. 11. 15:03
나당전쟁에 관련한 일련의 연구를 진행한 서영교 교수는 나당전쟁을 다룬 저서에 "약자가 선택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당전쟁이 갖는 핵심의 하나를 잘 드러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서 교수는 서역과 당의 정세를 살피던 신라가 당과의 전쟁 시점을 선택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를 비판하는 견해가 있어서 나당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국제 환경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좀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 발발 시점을 떠나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과정을 연합군으로서 함께하면서 당제국의 거대한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신라가 당을 상대로 '전쟁'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나당전쟁이 "약자가 선택한 전쟁"임은 분명하다.
신라가 당과의 '전쟁'을 선택한 이유 및 고구려 부흥운동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이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에 동맹국인 당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했음을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그 배신을 요새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신라가 당의 이런 '배신'을 미처 모르고 어리숙하게 당했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신라야말로 551년에 백제와 함께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고, 곧이어 동맹국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까지 차지했던 전력이 있었다. 적어도 그때부터 신라는 그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또 이용할 줄도 알고 있었다. 이런 과거 경험을 떠나서도, 신라는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하는 과정에서 당의 배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군사 행동을 신중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 연재 110회 <황산벌 전투 뒤집어 보기>에서 다룬 바 있으니, 이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당전쟁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의당 신라에 돌아갈 몫을 거부하고 전쟁의 결과물을 독차지한 당의 '배신'에 대해 신라가 자신의 몫을 되찾기 위해 감행한 전쟁이다. 그 신라의 몫이 정당하다는 명분은 <답설인귀서>의 첫머리에 있는 김춘추와 당태종의 밀약이었다. 이 밀약에 대해서는 본 연재 106회 <당태종과 김춘추의 밀약을 공개하다>에서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이 밀약은 백제 영토는 물론 평양 이남 고구려 영토도 신라에 귀속한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에 따라 자신의 몫을 돌려받겠다고 나당전쟁을 '선택'한 신라인의 의지를 고려해 보면 고구려 유민의 '복국'을 신라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평양 이남은 신라의 영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여 한성 고구려국을 지원한 것은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당분간 당군의 남하를 저지해주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가 백제 영토를 다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신라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당군의 군사력에 맞서 고구려 부흥군의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당군을 막아주면 그만큼 신라의 군사력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고, 이들 부흥군이 당군에 격파되면 어차피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존재를 저절로 제거할 수 있으니 신라로서도 그리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이렇게 약자의 운명은 강자의 이해관계에 절대적으로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 또한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672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명, 이근행이 말갈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 이들은 전 해인 671년에 평양에 진주하여 한성 고구려국을 공격했다가 고구려 부흥군에게 격퇴되었다. 그 뒤 이들은 아마도 요동성쯤에서 겨울을 지내고 병력과 군수 물자를 보충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말갈 장수 이근행과 말갈군은 요동성이 아니라 본래의 근거지로 돌아갔다가 다시 합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672년 7월에 평양에 도착하였다면, 요동성을 출발지로 볼 때 대략 6월께에 출진하였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게 군사행동을 시작했는지가 의문이다. 671년에는 안시성의 고구려 저항세력을 진압하다가 9월께에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혹 672년에도 아직 요동 일대에 남아 있던 고구려 부흥세력 때문에 한반도 진군이 늦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8월부터 당군은 본격적으로 고구려 부흥군과 전투를 벌여 먼저 평양에 가까운 한시성과 마읍성을 빼앗고, 재령강 일대에 있는 백수성(白水城) 가까이 진군하였다.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 연합군은 고간,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과 대결하여 적 수천 명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은 후퇴했고 신라군은 석문(石門) 벌판까지 추격하였다. 당군과 말갈군이 석문 벌판에 진영을 벌리자, 신라군 역시 대방 벌판에 군영을 벌리고 대치하였다. 이때 신라군 중 장창당(長槍幢) 부대가 따로 진영을 치고 있다가 당군 3000명을 포로로 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자 다른 신라군 부대들이 각자 공을 세우기 위해 진영을 분산했는데, 미처 새 진영을 갖추기 전에 당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신라본기> 기록을 보면 백수성 전투에서는 고구려군과 연합하였는데, 석문 전투에서는 신라군만 등장한다. 기록의 누락일 수도 있지만, 신라군이 고구려 부흥군을 빼놓고 단독으로 전투를 벌였다고 짐작된다.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전공(戰功)을 탐하는 태도를 보면 이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은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백제 지역에서 당군에 거둔 승리가 신라군을 자만하게 하고, 여기에 백수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당군의 전투력을 낮추어 보고 서로 전공을 경쟁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하니 아마도 석문 전투에서 거두게 될 전공을 고구려 부흥군과 나눌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 사이의 연합에 균열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곧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배신'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뜻한다.
참고로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김유신의 아들 원술 이야기가 바로 이 석문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에서 많은 신라군 장수와 병사가 전사하였고, 원술 역시 장렬하게 전사하고자 하였으나, 측근이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리는 바람에 살아왔다가 부자의 의리가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술에 대해서는 삼국통일 전쟁 당시 신라인의 애국적 관념과 관련해서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다.
석문 전투의 패배는 신라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부랴부랴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 주장성은 오늘날 남한산성에 비정된다. 그리고 9월에는 당 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용서를 구하면서 그동안 전투에서 포로로 잡았던 당과 백제의 장수들과 군사를 돌려보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때부터 신라는 평양 이남 고구려 영토를 확보하려는 뜻을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신라가 당의 웅진도독부를 내쫓고 백제 영토를 차지하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백제 땅은 어떻게든 지켜야 하지만,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마저 차지하려다가 당 정부의 분노를 더 키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당시 전황과 관련해서는 <신라본기>와 중국 측 기록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신라본기> 자료가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 이에 의하면 신라군은 석문 전투 이후 후방으로 물러나 임진강 일대에 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멸망 직전 신라와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대략 임진강 유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라가 평양 이남 땅을 포기했다고 해서 이 지역을 고구려 부흥군에게 넘겨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즉 석문 전투 이후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지원도 점차 접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의 전황이 이러한 동향을 시사하고 있다.
임진강 : 삼국시대에 호로하로 불리웠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673년 9월에 당군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다시 공격해왔다. 이때 신라군과 당군의 전투 지점은 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였다. 호로하는 임진강이고 왕봉하는 행주산성 앞의 한강을 가리킨다. 즉 신라군은 임진강과 한강 하류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당군과 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는 아홉 번 승리를 거두어 2000여 명의 당군 목을 베었고, 다수의 당군이 호로하와 왕봉하에 빠져 죽었다고 <신라본기>는 전한다.
전 해인 672년만 해도 당군과의 전투 지점이 백수성, 석문 등 황해도 재령 일대였는데, 673년에는 호로하와 왕봉하로 크게 남하하였다. 당시 당군은 별다른 전투도 없이 임진강까지 진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투 지점을 통해 신라가 북부 전선을 기존의 신라 영역으로 물러났다고 추정한 것이다.
<신라본기>에는 이후 당군의 군사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그해 겨울에 당군이 고구려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한다. <신라본기>에는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을 고구려 성으로 기록하여 신라 영역과 구분하고 있다. 우잠성은 예성강 유역 황해도 금천군, 대양성은 강원도 회양군, 동자성은 경기 김포시 일대로 비정된다. 이 3성은 당군에 밀린 한성 고구려국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그 거점이 차례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신라군은 호로하와 왕봉하 전선을 지켰을 뿐, 그 북쪽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신라의 지원을 당이 질책하자, 신라는 그 지원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듯하다. 백제 땅을 차지한 신라로서는 더 이상 당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신중함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신라 북부 전선에서 당의 공격을 막아주었던 고구려 부흥 세력 입장에서는 곧 동맹에 대한 '배신'이었다.
약자로서 신라는 당에 배신당했지만, 한성 고구려국이라는 또 다른 약자를 배신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조국(祖國)에 대한 마지막 헌정인 한성 고구려국의 부흥운동은 이렇게 좌절되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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