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045


광주항쟁 곳곳에 등장한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①-1] 들것 나눠든 체크무늬 셔츠, 그는 누구일까?

20.05.12 07:12 l 최종 업데이트 20.05.12 07:17 l 글: 소중한(extremes88) 사진: 이희훈(lhh)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한다.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말]


▲  보안사 5.18 사진첩에 실려 있는 사진. 한 외국인이 광주시민들과 들것을 나눠든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해당 사진은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던 광주 동구 금남로의 무등빌딩에서 찍힌 것이었다. ⓒ 이희훈

 

▲  보안사의 5.18 사진첩에 실려 있는 사진. 한 외국인이 광주시민들과 들것을 나눠든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 나경택 제공

 

시작은 위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외국인 남성이 한국인 4명과 들것을 나르는 모습. 그의 축 처진 오른 어깨는 들것의 무게를 짐작게 했다.


해당 사진은 지난해 11월 처음 공개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사진첩 중 '증거물사진 393-1980-9' 40쪽에 담겨 있었다. 여러 권의 사진첩엔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이 가득했다. 당시 보안사는 '광주사태의 증거물'로 이 사진들을 모았지만, 도도했던 40년 세월은 그것을 5.18민주화운동을 증명하는 '역사'로 만들었다.

  

이 외국인은 어쩌다 이 사진에 담기게 됐을까? 그것도 직접 들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 그리고 영화 <택시운전사>의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처럼, 그동안 널리 알려진 5.18 속 외국인은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렸다. 위 사진 속 외국인은 그들과 또 다른 방식으로 항쟁의 중심에 서 있는 듯했다. 체크무늬 셔츠의 증인,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곳, 무등(無等)

 

▲  5.18민주화운동의 핵심 장소인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국가등록문화재 제16호로 2002년 지정 되었다. 은행나무 또한 4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이희훈

 

지난 4월 28일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뜨거웠던 항쟁을 지켜본 도청 울타리 안의 은행나무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옮기니 5.18을 상징하는 너른 분수대가 우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분수대 너머엔 최근 복원된 시계탑이, 그 너머엔 수많은 탄흔을 품은 전일빌딩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날엔 인근 지산동에 있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전두환의 재판을 봤다. 40년 전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군대는 사진 속 들것에 실린 이를 비롯해 수많은 시민을 무참히 살상했다. 법원에 들어서던 노년의 전두환은 책임과 반성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가 4월 27일 오후 전남 광주지방법원에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치고 부인 이순자씨와 경호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 이희훈

 

전일빌딩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사진 속 장소가 정확히 어딘지 알고 싶었다. 사실 해당 사진은 보안사가 찍은 게 아니다. 당시 나경택 <전남매일> 기자가 찍은 사진을 보안사가 압수한 것이었다. 다행히 필름까진 빼앗기지 않아, 이후 이 사진과 함께 여러 5.18 당시 사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4월 28일 통화한 나 기자는 해당 사진을 "전일빌딩에서 찍었고 (사진 속 장소는 당시) 관광호텔 쪽"이라며 "전일빌딩 5층에 친구가 일하던 '대한교육보험' 사무실이 있어서 그곳에 양해를 구하고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이라고 말했다. 사진 속 건물엔 "재산세 수납 중", "한국은행 국고수납 대리점"이란 글귀가 붙어 있었다. 출입문에 새겨진 익숙하지 않은 마크도 눈에 띄었다.

 

▲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 ⓒ 이희훈

 

검색을 거듭해보니 당시 제일은행의 마크였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엄지 모양의 제일은행 마크보다 훨씬 이전의 마크다. 옛 전남도청을 등지고 전일빌딩에서 두 블록 정도 이동하면 가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 기록관)가 나오고,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엔 지금도 SC제일은행이 있다. 1990년대 새로 올린 건물이긴 하지만, 바로 옆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과 함께 5.18 현장의 한복판이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전일빌딩과는 좀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따져봐도 전일빌딩에서 잡은 앵글이라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당시 관광호텔 자리와도 거리가 있었다. 갸웃거리며 사진을 손에 든 채 건물 앞을 서성이는데 한 남성이 "여기가 아니고 저기예요"라며 옛 전남도청 방향을 가리켰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성은 사진 속 장소를 잘 아는 듯했다.


남성은 자신을 "제일은행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1990년에 입사해 5.18 당시엔 광주에 없었다"라면서도 "선배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속 건물 또한 광주 지역 언론을 통해 본 기억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건물에도 제일은행이 있었고, (사진 속 장소인) 저쪽에도 출장소 비슷한 제일은행이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이 지점장은 직접 발걸음을 옮겨 사진 속 장소를 정확히 찍어줬다. 역시 1990년대 새로 지어졌지만, 계속해서 무등빌딩이란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었다. 광주시민들에게 친숙한 삼복서점(현 알라딘 중고서점)이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지하 1층에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나 기자가 이야기했듯, 새 건물이 올라가기 전엔 관광호텔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에 담긴 건물 1층 모퉁이 부분은 한창 리모델링 공사 중이었다. 길 건너 전일빌딩으로 이동해 다시 무등빌딩을 바라봤다. 40년 전 나 기자의 시선을 상상해봤다. 공사 차량의 분주한 움직임과 드르륵 울려 퍼지는 소음 너머로 사진 속 장면이 겹쳐졌다. 광주를 품은 산처럼 '무등(無等, 등급과 차별이 없음)'이란 이름이 붙은 그 건물 앞을, 한 외국인과 여러 광주시민이 들것을 나눠 쥔 채 지나고 있었다.


들것

     

▲  외국인이 들것을 든 모습이 담긴 사진의 장소는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금남로의 무등빌딩이었다. 새로 올려진 건물은 여전히 무등빌딩의 이름을 갖고 있다. ⓒ 이희훈

  

▲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등빌딩 앞의 모습.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이희훈, 나경택

 

나 기자는 "5월 19일 혹은 20일에 찍은 사진 같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집단 발포 후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한 계엄군이 5월 21일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으니, 사진은 그보다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이 한창이었던 시점이었다. 나 기자는 "사진도 몰래 찍어야 했다"며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가방도 못 메고 점퍼 속에다가 카메라 두 대 숨겨갖고 전일빌딩에 숨듯이 들어가 있었죠. 그 사진 찍을 때도 기억이 나요. 들것에 있는 냥반은 곤봉으로 세게 맞아븐 거 같습디다. 얼마나 구타를 당해브렀는지 눈알이 막 빠질 듯 그래요."


나 기자는 이 사진을 비롯해 자신이 찍은 여러 사진이 보안사 사진첩에 들어간 이유도 설명했다.


"6월 2일부터 신문을 다시 낼 수 있다 그래요. 근디 사진을 못 싣잖아요. 소설가 문순태 그 분이 그때 <전남매일> 편집부국장이었는디, 독일에 좀 있어갖고 외신기자들을 좀 압디다. 그래서 내가 '(항쟁 기간에 찍은) 사진들 외신에 줍시다'라고 해서 독일에선가 보도가 좀 된 모양이에요. 근께 6월 3일인가 찦차가 집으로 찾아 왔습디다. 그때 내가 방림동 살 땐디, 505보안대 소속 중령이 사복을 입고 왔어요. 오후 10시 쯤 됐응께 우리 애기 엄마도 얼마나 무서웠겄어요. (그 사람이) 위에 보고해야 한다고 사진을 주라 근께 (신문사로 가서) 인화해갖고 줬죠."

 

▲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것을 든 외국인의 모습이 담긴 또 다른 사진. ⓒ 나경택 제공

 

나 기자는 해당 사진의 전후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을 더 보내왔다. 들것을 든 이들은 최루탄 때문인지 소매로 연신 코를 막고 있었다. 방독면 가방을 멘 채 곤봉과 최루탄 발사기를 든 군인 사이를 위태롭게 지나기도 했다. 군인들은 윗옷이 벗겨진 들것 위 부상자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 기자는 사진 속 외국인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정확히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상당히 젊었어요. 젊은 외국인이 저런 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게 참말로 대단허죠. 우린 알잖아요. 당시에 얼마나 엄혹했는지. 그때는 양림동에 있던 선교사들이라고만 생각했제 다른 생각은 못했어요."


그런데 나 기자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진 속 흰색 상의를 입은 남성이 당시 광주CBS 보도국 차장이었던 노병유 기자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노병유 차장한테 물어본께 '내가 맞다' 그래요. 흰색 상의가 의사 가운이었대요. 기자다본께 센스가 있었는지, 의사 가운을 빌려다가 입으믄 계엄군들도 크게 뭐라 못할 거라 생각한 거죠."


하얀 가운

   

▲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것을 든 외국인의 모습이 담긴 또 다른 사진. ⓒ 나경택 제공

 

지난 4일 노 기자와 연락이 닿았다. 5.18 직후 신군부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된 그는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사진 속 외국인에 대한 묘사도 구체적이었으며 그를 "평화봉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였다. 단원들은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파견 국가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이 제도에 담겨 있었다. 한국엔 1966~1981년 평화봉사단이 들어와 있었다. 주한미대사였던 캐슬린 스티븐스 한미경제연구소장이 1975~1977년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때 당시 CBS광주방송이 가톨릭센터에 있었단 말입니다. 내가 취재를 마치고 들어오던 차에 금남로 쪽에서 막 최루탄이 쏟아지고 그래요. '병원으로 가야겄다'는 생각에 얼른 피한다고 들어간 곳이 '박윤식 외과'였어요. 아이고, 하도 눈물이 쏟아져서 원장실로 가본께 원장이 평화봉사단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평화봉사단은 입술 있는 데가 터져서 피를 흘리고 있드만요. 근디 옆에 중환자가 누워있어요. 곤봉으로 머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의식불명이에요. 머리가 깨져서 붕대로 감싸 놨고요. 딱 봐도 위중해요. 원장이 '우리 병원에선 안 돼요, 언능 대학병원으로 안 가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해서 그 평화봉사단이랑 같이 들것을 들고 전남대병원으로 갈라고 했죠. 그때 내가 원장한테 '당신 가운 좀 벗어주쇼' 부탁했어요. 전쟁 중에도 의사 가운 입은 사람은 안 쏘잖아요. 그랬더니 원장이 옷걸이에 걸려 있던 새 가운을 줍디다."


당시 금남로 인근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이 마냥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노 기자가 의사 가운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곳곳에 계엄군이 배치돼 시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노 기자는 그 외국인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둘이 들것을 들고 가는디 무거워서 못 들겄어요. 그때 제일성결교회 자리에 새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거든요? 거기 공사장에 시민들 몇 사람이 피해있더라고요. 내가 '이것 좀 같이 들자'고 한께 몇 사람이 용기 있게 나옵디다. (외국인은 비교적 안전하니) 그 평화봉사단을 앞에 세우고, 나는 의사 행세를 하믄서 분수대 근처까지 갔어요. 앰뷸런스가 있드만요. 환자는 태워주고 나는 못 태워준다 해서 택시를 잡아다 뒤따라갔죠. 병원에 도착했는디 접수가 안 돼요. 이 사람이 의식불명이라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다 책임진다 하고 내 이름 노병유로 접수를 했어요."


노 기자는 "당시 환자를 후송하는 데 정신을 쏟고 있어서 그 외국인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면서도 당시 그에게 느꼈던 감정을 상세히 떠올렸다.


"겁에 질려버린 것처럼 보였는디도 정말 성실히 움직이드만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으로 보였을 정도로. (박윤식 외과 원장실에서) '평화봉사단 저 사람도 저라고 움직이는데 내가 가만있어서 쓰겄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께 나도 의사 가운이라도 빌려 볼 용기를 낸 거죠."


평화봉사단

  

▲  평화봉사단 자료집에 담겨 있는 팀 원버그. 광주에서 근무하던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나경택·노병유 기자와 연락이 닿기 전, 이미 사진 속 외국인의 신원을 지목했던 이를 만날 수 있었다. 5.18 당시 전남대 학생이었던 최용주씨는 정년퇴직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 자격으로 해외 기록물을 발굴·분석해왔다. 평화봉사단 또한 그의 주된 연구대상이었다. 그는 5월부터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최 과장은 사진 속 인물을 "1980년 5월 당시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광주에 와 있던 팀 원버그(Tim Warnberg)"라고 설명했다. 평화봉사단 소속이란 점은 노 기자의 당시 기억과도 맞아 떨어진다.


1954년 11월 3일에 태어나 미네소타대학에서 화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팀은 전남대병원에 배치돼 근무 중이었다. 한국 이름은 자신의 성 '원버그'와 비슷하게 지은 '원덕기'였다.

  

5.18 이전부터 팀을 알고 지냈다는 사람을 지난 4월 28일 광주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61년생인 이흥철씨는 충장로우체국 옆 '타박네 음악감상실'에서 DJ로 일하다가 팀을 처음 만났고, 그와 함께 5.18을 마주했다. 그가 일하던 음악감상실은 사진 속 무등빌딩과도 지척 거리였다.


이씨는 "나는 그를 팀이라고 불렀고, 팀은 나를 리(Lee)라고 불렀다. 팀은 밥 딜런(Bob Dylan)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자주 신청했었다"라고 떠올렸다.

 

▲  이흥철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고 당시 같은 위치에 섰다. 당시 제일은행이 있던 건물은 허물고 무등빌딩이 새롭게 지어졌다. ⓒ 이희훈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http://omn.kr/1nj2u


덧붙이는 글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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