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47126
조작된 사실로 죽임까지... 배우 권재희 부친의 억울한 사연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조작 간첩으로 사형 당한 '젊은 경제학자' 권재혁
20.06.07 20:32 l 최종 업데이트 20.06.08 09:26 l 김성수(wadans)
▲ 권재혁 선생 가족, 가운데가 딸 권재희 ⓒ 진실위 자료
배우 권재희의 부친 권재혁은 1925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7월부터 1961년 11월까지 미국 몬태나주립대, 조지타운대, 오리건대 등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인재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권재혁은 건국대학교,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대부분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해산된 상황에서 1962년 '민주사회동지회'가 합법적으로 만들어져 당시 좌우익을 망라한 다양한 인사들이 모여 세미나 등 공부 모임을 했다. 1963년 9월경 민주사회동지회에서 미국경제현황 및 후진국개발문제에 대한 세미나 주제발표를 하다가 이일재 등을 알게 되었다.
이일재는 해방 후 노동운동을 해오다가 1958년 어용적인 대한노총을 개혁하고자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만들었다. 1960년 4·19 시기 이일재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예비 검속되어 불법감금 되기도 했다. 권재혁, 이일재, 이강복 등 13명은 4·19 시기 민주적 노동운동을 지향했던 학우들로서 비정기적으로 모여서 시국담을 나누던 사이였다.
1967년 박정희는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3선 개헌을 위해서 박정희는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2/3 의석을 획득해야 했다. 1960년대 후반은 1965년 6월 한일협정 체결을 통한 한일국교 정상화, 한미일 협력체제 구축, 베트남파병으로 인한 냉전적·반공의식이 확대 강화되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7월 동백림사건 등 대규모 조작간첩사건을 발표한다. 이어서 박정희는 한국사회 내 반공적 위기의식 강화에 따른 파시즘적 통치체제의 제도적 공고화를 급속하게 추진한다.
이런 냉전시대 흐름 속에서 1968년 7월 30일부터 8월 12일 사이 중앙정보부(아래 중정)는 어느 날 갑자기 권재혁, 이일재, 이강복 등 진보적 지식인 13명을 '남조선해방전략당' 관련자라며 강제연행해 3일에서 53일간 불법구금하며 가혹한 고문과 조사를 자행한다.
고문조사가 끝난 1968년 8월 24일, 중정은 이른바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사건'(아래 통혁당)을 발표한다. 당시 중정의 발표내용은 통혁당이 "재일조총련 국내지하조직인 가칭 '남조선해방전략당'(아래 전략당)과도 접선, 막대한 공작금을 지원받아 조총련계인 동해상사와 유사한 위장기업체의 설립을 획책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정은 통혁당의 하부조직으로 권재혁, 이일재, 김병권 등 13명이 1967년 1월 1일 전략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이른바 '주모자'인 권재혁이 1969년 4월 21일 법원에 제출한 항소이유서는 '전략당은 중정의 조작'이라고 적고 있다. 아울러 권재혁은 중정의 발표와는 달리 전혀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고 북한공작금을 받은 사실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제연행되어 불법 구금상태에서 고문
▲ 2011년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판결 직후 이일재 선생 ⓒ 전명혁
이 사건의 피해자 이일재는 지난 2006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 이 사건과 관련한 '사건경위서'를 제출한다. 이일재는 1968년 당시 자신을 비롯한 권재혁, 이형락, 김봉규, 노중선 등 13명이 중정에 강제연행되어 불법 구금상태에서 겪은 고문과 가혹행위에 대해 경위서에 이렇게 적었다.
"조사실에 들어가자마자 두 명의 수사관이 야전침대 참나무 막대기로 허리와 엉덩이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이후 수사관들은 조사내용이 자기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구타를 했고, 사실상 매일 구타를 당했다. 또한 한 달여 조사를 받는 동안 거의 잠을 재우지 않았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지금도 허리와 옆구리가 쑤시고 통증이 있다.
그때 함께 연행된 분들 중… 노중선이 고문으로 팔이 부러진 모습과… 김봉규가 고문으로 겨우 걷는 모습과 본 사건의 주범 격인 권재혁이 머리카락이 뽑히고 온 얼굴에 피멍이 든 모습을 보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수사관에게 '우리들에게 만일 더 이상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하면 죽어버리겠다'고 격노해서 항의하니 양팔에 수갑을 채워서 책상다리에 묶어두고 신문과 조서를 작성했다."
또 권재혁의 아내 이종식은 권재혁이 중정에 연행된 다음 날인 1968년 7월 31일 중정에 연행되어 4~5일간 조사를 받는 중 화장실에 가다가 복도에서 남편을 우연히 만났는데 "(남편) 이마에 혹이 두 개, 세 개 엄청나게 크게 달렸어요. 많이 맞아가지고… 비명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진실위에서 회상했다.
또 권재혁의 동생 권종혁은 "(형 권재혁이 중정) 지하실에서 두들겨 맞고 병신 될 정도였다"고 들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피해자 노중선은 1968년 7월 30일 중정에 구속된 직후, "야전침대 각목으로 내려치는 것을 손목으로 막다가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고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김봉규는 당시 항소이유서에서 "1968년 8월 1일 아침 7시경 본인가에서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연행되어 피고가 한 범행 사실을 말하라고 약 30분 내지 1시간가량 엎드려뻗쳐하고 야전용 침대 몽둥이로 얻어맞은 후 연속 2주야 취조를 받았던 바 병신이 되거나 죽을까 두려워서 본의 아닌 사실을 진술(7통의 진술서와 기타)한 바 항목별로 다음과 같습니다"라고 중정의 고문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전략당'이란 이름도 조사받을 때 처음 들어"
나경일은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당시의 고문 피해를 진술했다.
"중정 수사관들이 처음 저를 보고 물은 말이 '이형락을 아느냐'였는데 저는 이형락씨의 이름을 이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니 수사관들은 이형락은 안다고 하는데 왜 모른다고 하냐면서, 저를 '엎드려뻗쳐'를 시킨 다음 야전침대 각목으로 때리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굵고 단단한 야전침대 각목이 부러졌다. 하도 맞아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고 기절을 하니 수사관들이 물을 부어 깨우고 했다.
그다음 날 헌병들이 들것에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왔다. 저와 이형락씨와 대질을 시켜 제가 이 사람은 이권으로 알고 있다 하니 수사관이 어이없어했다. 이름 두 자 때문에 제가 하루 동안 매타작을 당했던 것이다. 저도 매타작으로 무척 힘이 들었지만 이형락씨 또한 들것에 실려 와서 고개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였고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저를 겨우 쳐다보는데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다음부터 수사관이 본격적인 조서를 작성했는데 저는 순수한 노동운동을 한 것이라고 진술했는데, 이미 그런 내용은 수사관들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미리 정한 내용으로 진술을 강요했으며, 인정할 때까지 계속 가혹하게 조사를 해 나중에 교도소에 가서 한 달 이상 제가 똑바로 눕지를 못할 정도였다.
손바닥과 발바닥을 각목으로 가격하거나 엉덩이를 때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머리, 얼굴, 등, 허벅지 등 가리지 않고 때려 온몸이 회를 뜬 것 같은 상태였다. 수사관들이 때리다가 지치면 헌병을 불러 때리기도 했다. 나중에 교도소에 가니 간수가 똑바로 앉으라고 해 (똑바로 앉지 못하고) 제가 등을 보여주니, 교도소 간수들도 보더니 편하게 있을 수 있게 허락했다."
또 다른 피해자 김병권은 당시 상고이유서에서 "중정에서도 완강히 부인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검사님이 조사할 때도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더니 검사님 말씀이 '너 윗사람이 모두 했다는데 너만 부인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더니 '정말 피고가 모른다면 전략당에 가입한 사실은 없다고 해줄 터이니 그 밖의 일은 아무 걱정 말고 조서를 만들라'고 해서 만든 것입니다"라고 함으로써 검찰의 신문조서가 협박과 회유에 의해 허위진술 되었음을 언급했다.
당시 공판조서기록에 따르면 권재혁은 검사의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의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략당' 조직결성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사실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중앙정보부의 수사관 입회 아래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공포 분위기와 압박감 때문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검사 취조 때도 역시 중앙정보부에서 본인을 취조하던 수사관의 입회 아래였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조서를 토대로 취조하는 검사의 질문에 반박할 수 없는 분위기, 즉 압박된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이 진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략당'이란 이름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을 때 처음 들었습니다."
또한 권재혁은 검사의 "1968년 3월 12일 일본국 동경 소재 오타니 호텔에서 북괴노동당 중앙위원인 천만기를 만나, 이후 노동당 입당원서를 내어 정식으로 입당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천만기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사형까지 집행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조작된 사건을 가지고"
▲ 권재혁 선생 묘지 ⓒ 진실위 자료
위와 같은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고문조사결과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권재혁은 1969년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그해 11월 4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고 그는 1남 2녀를 둔 가장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당시 "중정 지하실에 잡혀 와서야 자신이 '수괴'라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의 이름을 처음 듣고, 죽은 뒤에도 '전략당 사건의 권재혁'이라 불려야 했던 젊은 경제학자에게 술 한 잔이라도 올려야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녕 그것뿐일까?"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한편, 무기형을 선고받은 이일재는 20년 징역을 살았고 1988년 8월 15일 특사로 석방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지난 2011년 1월 14일 그는 전략당 사건에 대한 재심 최종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여가 지난 2012년 3월 24일 그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10년을 선고받은 이강복은 1971년 수감 중 암에 걸려 차디찬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형락은 1978년 만기출소 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고생하다 19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여 년 감옥생활 후 석방된 김병권은 지난 2005년 뇌졸중으로 투병 생활 중 운명했다. 이들은 모두 지난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 저주받은 비극의 희생자들이었다.
진실위는 지난 2009년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권재혁, 이일재, 이강복, 이형락, 노정훈, 김봉규, 박점출, 조현창, 김병권, 오시황, 나경일, 김판홍, 노중선 등 13인을 연행해 사람에 따라 3~53일간 장기간 불법 구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 등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 가입했다는 등의 범죄사실을 조작했다."
진실위에서 당시 이 사건을 조사했던 전명혁 박사는 "아직도 의문 나는 것은 권재혁 선생을 사형까지 집행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조작된 사건을 가지고..." 라며 지난 1일 필자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무죄 확정되던 날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통곡
▲ 2011년 재심 승소 판결 직후 기뻐하는 전력당 사건 유가족 ⓒ 전명혁
진실위 진실규명으로 2년이 지난 2011년 1월 14일 전략당 사건 생존피해자들은 이 건에 대한 재심 최종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여 지난 2014년 5월 16일, 이 사건의 '주모자'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재혁은 사형집행을 당한 지 45년 만에 대법원에서 누명을 벗었다. 이날 대법원 재판부는 무죄판결하며 이렇게 그 이유를 밝혔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권씨 등을 마구 구타하고 폭언이나 협박, 잠을 재우지 않는 등의 가혹행위를 했다. 이 같은 폭행이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한 권씨 등이 공소사실을 자백했다. 중앙정보부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의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돼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 증거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원심은 위법하다. 피고인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인 '전략당'을 구성해 그 수괴의 임무에 종사했다거나 북한노동당 중앙위원으로부터 군사기밀 탐지 지령을 받고 귀국해 군사기밀을 탐지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거나, 공작금으로 일화 40만 엔을 받은 후 적법한 환금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어 가혹한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한 권재혁(1925-1969)의 딸인 배우 권재희는 대법원에서 사후 45년 만에 아버지에게 무죄가 선고되던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대법원에서 아버지 무죄가 확정되던 날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40년 넘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면서 담아둔 응어리가 한꺼번에 풀려 정신이 없었어요. '엄마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요. 저는 워낙 어렸으니 당시엔 내막을 몰랐지만 철저하게 조작된 사건이란 걸 알고 나서 저 또한 너무 힘들었고요."
배우 권재희는 아버지 권재혁이 지난 1969년 간첩죄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불과 7살이었다. 아버지가 사형당한 후 권재희는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까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쉽게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대학 졸업 후 연좌제 때문에 취직도 어려웠다.
그가 배우의 길을 택한 것도 연좌제로 공직의 길이 막힌 상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권재희는 지금도 평생 한으로 남아 있는 것이 부친의 명예가 회복되기 전까지 남의 이목 때문에 부친의 묘소조차 찾아가지 못한 것과 또 부친의 옛 동지들이 부친 추도식을 지내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한동안 그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한홍구 교수와 전명혁 박사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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