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7&total_id=4996500

최남선 “기자조선설은 중국 이민족 동화 정책의 산물”
[중앙선데이] 입력 2011.01.30 12:17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③ 기자조선의 진실


1 평양 인근 평천리에 있는 기자정전기적지비(箕子井田紀蹟之碑)의 탁본. 비의 글은 ‘평양은 3000년 전 은나라에서 온 기자가 세운 옛 도읍…’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전혀 증명되지 않는 내용이다. 오른쪽의 초서는 비석 앞면 끝자인 지비(之碑)라는 한자의 탁본이다.

역사 공간에서 단군과 기자는 복잡하게 얽힌다. 13세기에 급부상한 단군신화는 떠오른 속력만큼 빠르게 가라앉는다. 그 자리를 기자(箕子)와 기자조선이 차고앉는다. 기자는 유학으로 무장된 조선 위정자에게 정신적 절대자로 군림하며 단군에 수백 년간 설움을 안겼다. 기자는 ‘조선 성리학 이데올로기 말살’ 전략을 펴는 일제 때문에 무너졌지만 해방 뒤 유학자 사회에 의해 복권돼 절대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국조’라는 단군에 천 년 가까이 싸움을 거는 기자는 누구인가.
한나라 초기의 '상서대전(尙書大傳) 기록을 보자.

“주나라 무왕은 은(殷)을 정벌한 후에 기자를 풀어 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치욕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했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를 조선후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의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물어보았다.(“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間鴻範” 尙書大傳 卷2 殷傅)”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지'에는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고)조선후(朝鮮侯)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칭하였다”(“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准 僭號稱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고 나와 있다.

'상서대전'과 '삼국지'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이후의 사서들은 하나같이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해동에 국가가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三國史記'年表)라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기자동래설과 관련해 먼저 살필 것은 은-기자-동이족의 관계다. 은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사서(史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나라로 알려진 은의 실체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사기'에는 “은(殷)나라가 오랑캐의 나라(“殷曰夷周曰華” '史記')로 돼 있다. “(은나라 시조인) 설(契 또는 卨)의 어머니가 목욕하다가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삼켜 설을 낳았다”고 한다('史記''殷本紀'). 은나라 스스로 “하늘이 검은 새를 보내 은나라를 낳게 하였다(“天命玄鳥降而生商” '詩經'商頌')”는 신화를 널리 보급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화는 만주족의 시조신화와 일치한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은나라가 부여와 습속이 거의 같아서 흰색을 숭상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군대를 일으킬 때 점을 쳤고 부여는 은나라 역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은나라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만주로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후한서'도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 '後漢書'115卷)”고 했다. 은나라는 동이족의 국가이며, 은의 신하 기자가 만든 ‘기자조선’ 역시 동이족의 나라라 할 수 있다.그런데 그런 은나라 신하였다는 기자는 누구인가. BC 2세기 사마천의 '사기(史記''송미자세가는 “공자는 은나라의 3현인으로 미자(微子)와 기자, 비간(比干)을 지목했다. 세 사람 모두 은나라 주(紂)왕의 친척이라고 했다”고 기록한다.

결국 은나라는 동이의 나라, 기자는 동이족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나라는 한민족의 나라, 기자도 한민족의 선조라는 결론으로 급격히 치닫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치 않다. 우선 기자에 대한 사료를 신뢰할 수 없다. 사서들 가운데 AD 1세기에 나온 '한서(漢書)' 이전의 기록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다. 역사가 체계적으로 제대로 기록된 것은 한나라 이후이기 때문이다. '상서대전'은 BC 2세기에 편찬됐다. ‘기자동래의 사실(史實)’은 이보다 800~1000년(?) 전의 사건이다. '상서대전'은 흔히 '서경(書經)'이라 하는데 이미 소실된 것을 한 문제(文帝)가 신하를 복생(伏生)에게 보내어 복생이 구술(口述)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기'조차도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많다. '사기'조선전'에도 기자 동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고고학적인 문제도 있다. 기자와 관련된 유물 또는 유적으로 주장되는 것들은 주로 산동반도 대릉하(大凌河) 인근에 나타난다. 1973년 대릉하에선 기후(箕侯)의 명문(銘文)이라고 주장되는 청동 예기가 출토된다. 이 ‘기후’를 ‘기자’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기자묘와 유물 출토지가 수백㎞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그렇게 단정하기는 무리다. 인정한다 해도 이 예기는 ‘기자가 기껏 산동이나 대릉하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일 뿐이다.

‘기후=기자’이며 기자는 곧 (고)조선 왕이라면 이는 오히려 고조선의 일부 영역(기자 조선)이 현재의 산동반도나 베이징 인근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한서다. “현도군과 낙랑군은 한 무제 때 설치하였다. 대개 조선·예맥·구려 등의 야만적인 오랑캐들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주석에 “여기서 조선은 주나라 기자를 왕에 봉한 곳과는 다르다”고 했다했다.(“玄菟·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 … 師古曰史記云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與此不同.” 漢書 卷 28下)이는 기자가 왕을 한 곳과 현재의 한반도는 무관함을 시사한다.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주나라의 기자가 한반도까지 가서 제후를 하기에는 너무 멀다. 당시 주의 세력은 요동까지도 미치지 못했다. 고대국가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유목민족도 아닌 BC 11세기께(?) 주나라가 수천㎞ 떨어진 한반도까지 미칠 힘은 없다. 그처럼 허구적이기 때문에 기자동래설은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한국사의 근간이 되는 삼국시대엔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문제는 고려 중기다. 북방민족적 건강성이 사라지고 문신 위주의 중화주의적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기자는 날개를 폈다. 기자동래설은 부동의 사실(史實)로 용인되어 고려 숙종 7년 기자사당을 세우고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1102).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는 “기자로 인하여 우리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이는 김부식의 생각만이 아닌 그 시대 지배층들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고려 말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이 잠시 부각되더니 조선에 이르러선 기자 숭배의 열풍이 불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國號') 라고 썼다.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친한족적(親漢族的)·모화적(慕華的)이었다.

단군의 몰락은 중화민족주의 유학인 성리학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 '조선경국전'을 필두로 15세기의 '동국통감''삼국사절요''응제시주''동국세년가' 등을 거쳐, 16세기 후반 '기자지(箕子志: 윤두수)'가 편찬됐다. 조선 중기 대표 석학 율곡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했다.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칭송을 받는 송시열은 “오로지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라고 하였다. 이 글은 2004년 고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글이다. 송시열의 주장은 ‘중국의 속국인 기자조선이 한반도 역사의 출발’이라는 현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의 주장과 일치한다.

1756년(영조 32년)엔 기자묘가 있다는 평양과 한양, 전국 각 도에 기자묘를 세워 기자를 영원히 숭배하자는 상소가 등장하기도 했다.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같은 일부 가문은 기자의 후손으로 인정됐다.단군은 찬밥이 됐다. 조선 태종 때 단군은 국가 제사의 반열에 잠시 올랐지만(1412) 기자보다는 서열이 낮았다. '삼국사절요(1476)'에서는 “단군이 조선을 개국했지만 기자가 오기 전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했다. 아예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동국통감(1484)'은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신라 등을 높이고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낮췄다.

소위 기자 정통설에 대한 비판이 조선시대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자 관련 기록 가운데 한반도와 무관한 기록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중국에만 기자묘가 세 군데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라고 따졌다. 조선을 만들었다는 사람의 묘가 어떻게 중국 하남성에 있느냐는 원초적 질문이지만 ‘기자 광풍’은 이런 의문을 쓸어버렸다.

극심한 ‘중화 사대주의’에 대해 만주족 국가인 청의 태조 아이신조뤄 누루하치는 “중국과 조선, 이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太祖' 卷13, 14)”고 개탄했다.

한족(漢族)은 주변 민족들의 선조를 한족화(漢族化)하기를 즐기는데 기자도 그 예다. 한족은 흉노의 시조 순유는 하나라 걸왕의 후손, 서융은 하나라 말기 이주민, 선비는 유웅의 후손, 왜는 오나라 태백의 후손 등이라고 했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한족은 항상 주변 종족의 선조와 한족 조보(祖譜)를 연계시켜 종조화(宗祖化)한다”고 했다.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기자가 한반도로 와 왕을 한 어떤 역사적 증거도 없다. 작은 먼지 같은 소문에 정치적 뼈와 살이 붙어서 점점 자라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천 년 이상 유학자들의 머리에 뿌리 박히고 그들의 지배와 억압을 받는 한국 민중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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