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015067

사마천이 말한 고조선 도읍 왕검성은 베이징 인근
[중앙선데이] 입력 2011.02.06 13:09 / 수정 2011.02.06 13:37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④ 중국 역사서와 고조선



도대체 기자(箕子)는 누구인가. 고대로 거스를수록 짙어지는 역사의 안개가 기자 주변엔 유난히 짙다. 기자는 동이족의 은(殷)나라와 연결되고 그가 속한 기족(箕族) 혹은 기국(杞國)은 고결한 기개로 칭송받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죽국으로 연결된다. 짙은 안갯속에서 고죽국은 또 고조선으로도 길이 뻗어 있다. 기자와 함께 걷는 역사의 벼랑은 한 걸음 잘못 디디면 천길 오해로 추락한다. 수천 년 역사에서 기자는 미로를 만들었다.

‘기우(杞憂)’는 ‘기나라[杞國] 사람의 근심’이라는 의미로 열자(列子)에 나오는데 ‘쓸데없는 근심’을 이르는 말이다. 송나라 때의 대표적 운서인 집운(集韻)에 “기(箕)는 고대 나라 이름이고 위굉(衛宏:한대 유명 학자)이 말하기를 기(杞)와 같은 말이다(箕古國名, 衛宏說杞同)”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자는 기국과 관련 있을 것이다.

우선 기자에 대해선 주나라 무왕이 한족인 기자를 한반도의 제후로 봉했다는 ‘기자 동래설’이 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민족의 선각들은 기자(箕子)가 한족(漢族)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한다. 기국은 고대 한민족 국가였다는 것이다. 최남선은 “단군을 태양(개)의 아들(아지)로 ‘개아지’라 불렀는데 이 말이 기자의 중국 발음인 지즈와 비슷하여 혼란을 초래했다. ‘개아지 조선’은 해씨조선(解氏朝鮮)”이라고 했다. 정인보는 “기(箕)는 우리 고유어인 검(儉)자를 한자로 나타낸 것으로 최고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이니 단군왕검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안재홍은 ‘큰(한)’은 ‘크다’는 뜻이고, ‘지(치)’의 뜻은 수장·대인인데, 순 우리 고유어인 ‘크치(대수장)’를 한자로 잘못 번역한 것이 기자라고 하였다.

기족=동이족으로 보는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 청 말의 저명 사가 왕셴탕(王獻唐)은 “염제 신농씨는 동이의 한 갈래인데 산둥 지역이 기원지”라고 했다. 사기에는 염제 신농씨가 은보다 훨씬 앞선 3황5제 시대의 인물로 그의 후계 치우가 구려족(동이)의 임금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토대로 중국 동북사범대의 리더산(李德山) 교수는 “기족의 원주지는 산둥으로 이 지역의 기현(箕縣), 기옥산(箕屋山), 기산(淇山), 기령(箕嶺) 등의 지명은 기족에서 따온 것이고 기족과 은 왕조는 친족 관계로 동이 계통”이라고 한다. 나아가 “기자가 타민족인 주(周) 왕조에 반발, 일부 기족을 이끌고 고죽국(孤竹國)으로 갔다”고 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기록으로 사기의 “은(殷)나라는 오랑캐[夷]의 나라(殷曰夷周曰華)”, 또 후한서의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 115卷)” 등을 들 수 있다.
춘추좌씨전에 주나라 초기에 ‘기국(箕國)’이라는 제후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갑골문에도 ‘기(其)’가 흔히 보이므로 은나라 때에도 기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도 진(晋)나라에 기씨(箕氏)라는 고대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기국은 동이족의 일파로 현재의 산둥에서 차오양(朝陽)에 이르는 곳을 터전으로 삼은 고대 국가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은나라와 한민족의 선민족인 동이족, 기자와 은나라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은나라=기자=동이족=한민족’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계를 다르게 설명하는 기록들이 있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들은 기자가 대동강까지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사서를 들이댄다. 상서대전 사기(송미자세가)의 기록(중앙SUNDAY 1월 30~31일자)과 한서의 “은(殷)나라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양잠·베짜기 등의 기술을 가르치니 낙랑조선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漢書 地理志 燕)는 등의 기록이다. 주나라가 중국 고대국가이므로 중국인 기자(주 무왕의 신하)가 한반도로 와서 통치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논어나 고대 역사기록인 죽서기년(竹書紀年:BC 4세기경) 같은 고서들이 기자는 인정해도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외면한다.

혼란을 수서(隋書)가 부채질했다. 수서에는 “주나라는 기자가 일족 사람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아예 인정을 베풀어 고죽(孤竹) 땅을 그에게 봉하였다”라는 기록과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했다(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於箕子. 隋書裵矩傳)”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앞의 기록은 우선 수서(636)와 기자조선(BC 11세기 ?) 간의 시간적 거리가 최소 1600년으로 너무 멀어 신빙성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또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현재의 상구현)에 있다”는 사기색은(사기의 주석서)의 기록과 모순돼 신뢰할 수 없다. 오히려 주나라의 영향력이 산둥 지역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고구려의 옛땅 고죽에 주나라가 기자를 보내 제후로 봉했다’는 부분은 ‘기자 조선동래설’의 근거로 제시되지만 여기에도 치명적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고죽은 여러 사서에서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베이징 동남부~차오양(朝陽)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고죽성은 노룡현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孤竹城在盧龍縣南十二里, 사기정의(史記正義)), “요서 영지현(令支縣)에 고죽성이 있다.”(한서(漢書) 지리지), “유주(幽州)는 상(은)나라 때는 고죽국으로 산해관(山海關) 동쪽 90리, 발해 연안에서 20리 떨어진 곳”(요동지(遼東志) 지리지), “유성현(柳城縣)은 원래 상나라 고죽국”(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 등이다.

한서에 나오는 영지현은 “유수는 (무열수이며) … 새외를 따라서 동남을 지나 영지현 북쪽을 지난다”라는 수경주 기록(濡水)과 “란하는 과거 무열수였다”라는 열하지의 기록(卷69 熱河) 등을 토대로 보면, 고죽은 롼허(<7064>河) 하류 지역으로 비정되는데 이는 사기정의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결국 동이족 일파이자 은나라 후예인 기국(箕國)이 현재의 산둥에서 차오양에 이르는 곳을 터전으로 삼은 고대 국가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주나라가 기족의 제후를 임명한 곳은 고죽이지 한반도의 기자조선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자의 조선동래설’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기자조선의 위치를 한반도로 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권람의 응제시주(應製詩註:1462)에는 “기자가 건국했던 지역은 청주(靑州:현재 산둥)”라고 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1778)에 “주의 초기에 단군의 세대가 쇠하고 기자가 다시 그 땅에 봉해졌으니 요동 전 지역이 모두 기자의 강역이었다”(東史綱目 遼東郡考)라 하여 기자조선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전역에 걸치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고 있다.

기자조선으로 오인되고 있는 기국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과의 관계 때문이다. 사기에는 “(고조선이) 왕검(王險)으로 도읍을 삼았다”면서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縣也, 卷115)”고 한다. 또 왕검을 험독이라고도 기록했다. 창려를 현재 창려(昌黎:현재 베이징 동부해안)로 보면, 왕검성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란 말이 된다. 그러면 고조선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번성한 나라가 된다. 고조선의 영역과 기족의 영역이 많은 부분에서 서로 겹치는 것이다. 따라서 기국이 고조선의 선민족임은 분명해 보인다. 기국을 연결 고리로 해 은나라와 고조선이 역사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진서(晉書)가 ‘험독이 선비족의 모용씨의 주요 거점’이라고 한 것도 고조선과의 관계에서 중요하다. 진서에는 선비의 모용외(慕容<5EC6>)가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진 후 모용황(慕容<769D>)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卷109). 그런데 청나라의 대표적 고증학자인 고염무는 일지록에서 “(336년) 모용황은 창려 동쪽으로 나아가 거의 300여 리를 지나 유수(<6E1D>水)의 하류 역림구(歷林口)에 이르렀다”고 했다(日知錄 卷31 昌黎). 험독=창려라는 것이다. 수경주도 같다고 보고 있다(水經注<6E1D>水).

따라서 산둥 반도에서 차오양에 이르는 지역이 은나라 후예인 기족의 영역이었다가 뒤에 고조선 중심지가 되고 고조선 멸망 후 고구려의 원주지이면서 동시에 모용씨(동호 후예, 요의 선민족)의 터전으로 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동이족의 역사가 은→기국→고조선·숙신→동호·선비·부여→전연(모용씨)·북위·고구려→요(거란)·고려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조선 역사가 후대에 큰 혼란을 남긴 이유는 동이의 국가들이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해 남긴 기록이 없고 사기의 조선 관련 기록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사기는 고조선에 관해 가장 기록을 많이 하지만 다른 이민족과는 달리 민족과 국호의 기원, 제도에 관한 내용은 없고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투쟁만 상세히 묘사한다. 고조선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위만 이전의 고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다른 경로를 통해 추적할 수밖에 없다. 기족이나 숙신(肅愼)에 대한 연구도 그 하나의 예다.

1973년 3월 랴오닝(遼寧)성 카쭤(喀左)현 구산(孤山)에서 한 농부가 은대의 청동 항아리, 술그릇, 솥 등을 발견했는데 술 그릇 중 하나에는 고죽(孤竹), 솥에는 기후(箕侯)라고 여겨지는 글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기후(箕侯)=기자(箕子)이며 이는 기자조선의 산 증거’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그러나 ‘기후=기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도 없다. 유물 출토지와 기자묘가 적어도 700㎞ 이상 떨어져 있다. 고대에 그 정도 거리는 ‘상호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또 기후는 기족의 수장이라는 의미로 수십 명 이상 있을 수 있지만 기자는 주나라 무왕 때의 특정 인물이므로 ‘기후=기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예컨대 기자가 조선 태조 이성계라면, 기후는 조선 왕이라는 말이다.

교통이 불편했던 고대에 기후의 나라(기국)를 기자조선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산둥~랴오둥 지역은 고대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기족·기후 등의 개념과 조선·숙신(주로 이 지역에 나타나는 민족명) 등이 뒤섞여 기자조선이라는 관념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은나라 청동 유물 출토지와 고죽국의 위치가 근접해 있어 일부 사가가 ‘기후=기자’로 오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후=기자’를 증명한다기보다 은나라 후예들인 기족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것으로 족할 듯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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