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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사회책으로 보는『바람의 나라』⑴ - 개마국과 구다국

안녕하십니까? 적곡 마로입니다.『바람의 나라』를 사회책으로 살펴본다니 조금 의아해 하실지 모르나 의외로 상생이 맞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사회책만 마구 인용해서야 곤란하겠지만 뜯어보면 의외로『바람의 나라』에 쓸모가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면 (주) 중앙교육진흥연구소가 발행한 2005년도판 중학교 사회 1학년 책을 근거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지요. 사회교과서에서 말하는대로 북부지방 즉 오늘날의 북한 땅은 제가 올려드린 지도에서도 보이는 개마 고원을 중심으로 높고 험한 산지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북동부가 높고 서부가 낮다고 하지요.
 


개마고원은 의외로『바람의 나라』와 무관한 땅이 아닙니다. 하기야『바람의 나라』본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만 대 부여 전쟁 이후 동명성왕 3공신 처벌 사이의 기간에 무휼은 나름대로 착실히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대무신왕] 9년(서기 26) 겨울 10월에 [무휼]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삼국사기』권14「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9년(서기 26)」

여기서 개마국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체로 그 위치는 백두산 이남의 개마산 일대, 또는 압록강 상류지역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도에 나온 개마고원 일대라는 말이 되겠지요. 
 
구다국은 어디인지 소재가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지도에 나오는 마천령산맥 동쪽 부근이 아닌가 보는 시각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든 무휼이 개마국을 공격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 부여 전쟁에서 고구려는 비록 전투에서는 졌으나 정치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국력이 증가하는 추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개마국에게 유리한 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만 해도 수전 즉 해전에 약했던 고구려의 상황으로 보았을 때 압록강은 천연의 방어벽이었지요. 지도에는 아니 나와 있습니다만 낭림산맥 맨 위 꼭지점 정도에 있는 중강진에서 허천강과 맞닿은 압록강 상류 쪽은 비교적 하폭 즉 강의 폭도 좁고, 유속 곧 물 흐름도 급하지요.
 
육군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휼은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그 열쇄는 다름 아닌 북부지방의 기후에 있습니다. 실제 11월 말부터 4월 초까지는 강물이 얼어붙어서 수상교통이 불가능한 대신 빙상을 도보로 내왕할 수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치안 ·밀 무역 등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지요. 한데 보시다시피 윗글의 11월은 양력이고『삼국사기』에서 나오는 10월, 12월은 당연히 음력입니다. 음력 10월은 대충 환산하면 양력 11월 혹은 12월초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무휼이 치밀한 계획 끝에 개마국을 공격할 시점을 골라 공격했다는 말이 되지요. 
 
여기서『바람의 나라』본문을 다시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바람의 나라』7권 본문(댕기판 111쪽)을 보시면 다음과 같은 (해) 용이의 대사가 나옵니다.
 
'저자의 군대는 작지만 단단하고 치밀하다. 전장의 구릉과 웅덩이와 늪지를 다 외우고 있어.'
 
만약 제 추측이 맞다면 김진 선생님이 의외로 전략과 전술 관계에서조차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휼의 입장이 되어서 무휼과 같은 사고를 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마국왕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압록강 상류가 얼어붙는다는 사실을 몰랐을리는 없겠지만요. 여하간에 개마국왕은 죽음을 당하였고 고구려는 그 힘을 늘렸습니다. 개마고원은 산림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오늘날에조차 북한의 주요 통나무 생산지이니까요. 
 
개마고원으로의 고구려의 진출은 최씨 낙랑국의 입장에서 무척 신경쓰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함흥평야의 (남)옥저국도 사정은 비슷했겠지만요. 최씨 낙랑국의 위치는 여전히 논란거리인데 과거 두계 이병도 식 통설이나 성호 이익 같은 실학자는 평양지역의 낙랑군 = 낙랑국으로 보았습니다만 요즈음은 부정되는 추세입니다. 굳이 새로운 통설이라 한다면 최씨 낙랑국은 서류상으로나마 동한(東漢) 낙랑군 소속으로 편재되어 있으되 내부적으로는『바람의 나라』에 나오듯 전혀 동한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국이며 그 위치가 대략 낭림산 남쪽의 낭림산맥 일대와 묘향산 동쪽 묘향산맥 이남 지역과 언진산맥 이북 사이의 영역을 차지했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하면 낭림산 북쪽의 낭림산맥 일대는? 당연히 고구려가 차지했지요. 개마국 정벌에 따르는 부수적 효과이거니와 이미 낭림산맥 서쪽의 땅도 동명성왕 추모와 유리명왕 유류가 차지한 고로 고구려는 이미 줄여 잡아도 한반도 북부지방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 됩니다. 면적 약 1만 4300㎢, 평균높이 1,340m이며 한반도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 '한국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을 점령한 무휼의 위세가 꽤나 올라갔음을 짐작함은 군더더기가 될 듯합니다.
 
그러나 무기와 집을 만들 수 있는 나무들이 울창한 산맥만 가지고는 고구려 백성들이 먹고 살만한 땅이 여전히 모자란 실정입니다. 비록 만슈리아(만주) 집안 일대 및 용천평야와 안주·박천 평야를 추모 왕(동명성왕)과 유류 왕(유리명왕) 시절에 차지했다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요.
 
그러니 고구려로서는 동한 낙랑군이 차지한 기름진 평양 평야가 꼭 필요했을 것이고 이러한 동한 낙랑군을 압박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최씨 낙랑국을 차지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개마국의 점령은 대 부여 전쟁 이후 다시 시작된 정복 사업의 제1보였던 셈입니다.
 
회원 적곡 마로가 썼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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