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436
(‘만주의 삼부’ 끝, 다음 호부터는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다’가 시작됩니다)
삼부 통합은 멀고 만주사변은 가까웠다
만주의 삼부(三府) ⑨일제 탄압과 내부 분열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63호 | 20120325 입력
재만 한인들이 일제 관헌과 중국 관헌 양쪽으로부터 핍박당한 것처럼 한국 독립운동 세력도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이라는 두 개의 적과 동시에 싸워야 했다. 이런 분열 상태를 끝내고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결집하자는 주장이 민족유일당운동과 삼부통합운동이었다.
북만주 산시(山市)에 있는 김좌진의 옛집. 김좌진은 신민부 군정파로서 삼부통합운동에 참가했다. [사진가 권태균]
만주 이주 한인들, 즉 한교(韓僑)들은 중국과 일본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부평초 신세였다. 한교들의 사실상 정부였던 삼부(三府)는 1925년의 미쓰야(三矢)협정 이후 크게 위축되었다.
항일 언론인 이상협(李相協)이 발행하던 중외일보 1927년 11월 29일자는 만주 한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억압받는 실태를 보도했다. 길림성 성장(省長)이 조선 농민의 이주를 일절 금지시키고 이미 이주한 농민들도 중국에 입적(入籍)하지 않았으면 1년 이상 경작지를 빌려주지 말라는 밀명(密命)을 내렸다는 보도였다. 여기에 만주 회덕(懷德)현 조선 농민들이 중국 관민에게 수탈당한 사례가 전해지자 국내에 반중 감정이 들끓었다. 회덕현 소오가자(小五家子)의 180여 호 조선인 마을의 삼성(三成)소학교를 중국 관헌이 강제로 폐쇄시켰으며, 중국인들이 도전공사(稻田公司)라는 ‘협잡간판’ 아래 한교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옥토와 농작물을 빼앗았지만 중국 당국은 되레 중국인들만 비호했다는 보도였다.
이런 소식을 접한 국내 민중은 그 분노를 국내의 화교(華僑)에게 돌렸다. 1927년 12월 7일 전라도 익산에서 화교 배척 운동이 일어나 곧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중국 국민당 광주(廣州)지부 기관지인 광주민국일보(廣州民國日報)는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갖고 다양한 각도로 보도했다.
산시역(驛). 하얼빈을 중심으로 소·만 국경의 만주리와 대련·여순까지 연결하는 길이 2400㎞에 달하는 중동선(中東線)의 주요 축이었다.
이 신문 1927년 12월 23일자는 “만주지역에서 중국 관헌이 한교(韓僑)들을 학대했으니 그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한인들이 화교들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다. 호남에는 만주 이주 친인척들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로이터 통신은 한국 전역으로 확산된 화교 배척 운동 때문에 동삼성(東三省·만주)으로 피난한 화교가 3000여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광주민국일보 취재진이 상해에서 활약하던 안창호(安昌浩)를 찾아가 해결책을 물었다. 그러자 안창호는 ‘한교들은 중국인들이 버려둔 계곡과 황무지를 개간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이익을 주지 절대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만주 관헌들이 시도 때도 없이 한인을 능멸하고 모욕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군인들에게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안창호는 “정의부·신민부·참의부 등은 만주 반일파의 중심 기관이며, 한교 지도층은 참고 견딜 것을 바라고 있다”면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서는 중·한 두 민족의 긴밀한 협조와 연계가 절실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광주민국일보 1928년 1월 9일).
화교 배척 운동으로 여러 명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조선중화총상회(朝鮮中華總商會)와 인천중화총상회 등은 “지금까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교포는 없다”면서 “사태가 점차 진정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조선인 지도층이 여러 차례 찾아와 유감의 뜻을 전하고 정중히 사과했는데 이들의 진중한 태도로 보아 사태 재발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고도 전했다(광주민국일보 1928년 1월 27일).
중국 국민당이 상해에서 발행하던 중앙일보(中央日報) 1928년 6월 30일자는 ‘동삼성, 한국 교민의 민족운동’이란 제목으로 한교 배척 운동 이후 재만 독립운동계의 동향을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손문(孫文)의 장남 손과(孫科)가 동사장(董事長·이사장), 국민당 중앙선전부장 정유분(丁惟汾)이 사장이었는데 “일체의 언론은 본당(本黨·국민당)의 주의와 정책에 근거한다”는 신문이었다.
중앙일보는 위 보도에서 “1928년 6월 만주 거주 한교가 180만 명에 달하는데 ‘한교구축문제강구회(韓僑驅逐問題講究會)’ 등이 결성되어 한교 구축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교 구축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은 중국 국적으로 입적(入籍)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1928년 4월 19일 만주 각 단체·지역의 대표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해 ‘21일 일단 휴회’한 것처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중앙일보가 “최근 각 당파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정의부·참의부·신민부·청년당·노동당·남만청년동맹회·흥사단 및 한국 경내의 사상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단일당통일회의를 열기로 했다”고 보도한 것처럼 이런 문제들이 재만(在滿)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논의를 부추기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해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과 만주의 삼부를 통합하자는 삼부통합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26년 7월 임정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洪震)이 “전 민족을 망라하는 공고한 당체(黨體)를 조직하자”고 주장한 것처럼 상해 임정도 그 전부터 통합운동을 지지했다. 안창호는 1926년 8~9월께 북경에서 임정 창조파로서 임정을 부인해오던 사회주의자 원세훈(元世勳)을 만나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했다. 이어 1927년에는 만주를 방문해 만주에서 우선 민족유일당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28년 1월에는 홍진과 정원(鄭遠)이 만주로 와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촉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김동삼(金東三)과 김원식(金元植)은 갖은 고생 끝에 1928년 4월 북만주의 신민부 본부를 찾아 김좌진 등 신민부 지도자들에게 “광복의 제일요(第一要)는 혈전(血戰)인 바 혈전의 숭고한 사명 앞에는 각 단(團)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라면서 ‘삼단체(참의부·정의부·신민부) 군부(軍部)의 합작’을 역설했다.
이 무렵 신민부에서 활동했던 이강훈이 “우리 일행이 (안도현에) 도착했을 때 정의부에서도 사람이 와서 지방 조직을 서두르고 있었다”라고 회고한 것처럼 같은 독립운동 단체끼리 경쟁하는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도 통합을 해야 했다.
드디어 1928년 5월 12일부터 길림성 화전현에서 정의부 외 18개 재만 단체 대표자 39명이 민족유일당 건설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크게 단체본위(團體本位) 조직론과 개인본위(個人本位) 조직론으로 나뉘었다. 단체본위 조직론은 기존 단체들이 연합하는 방식으로 민족유일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인본위 조직론은 각 단체를 그대로 인정하면 또다시 당파와 파벌이 난립할 것이므로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개인본위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주장이다.
두 노선이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단체본위 조직론자들은 전민족유일당협의회(全民族唯一<515A>協議會·이하 협의회)를 결성했고, 개인본위 조직론자들도 전민족유일당촉성회(全民族唯一<515A>促成會·이하 촉성회)를 결성해 각각 통합에 나섰다.
협의회 측은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대표 세 명씩 모여 1928년 9월 길림 신안둔(新安屯)에서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도 역시 통합 방식에 이견이 있었다. 세력이 가장 컸던 정의부는 단체본위 통합론을 제기했다. 반면 참의부와 신민부는 ‘삼부 완전 해체’와 함께 ‘전만일반(全滿一般)의 대당주비(大<515A>籌備)를 실행하자’고 주장해 기존의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운 민족유일당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참의부와 신민부는 이때 한교 배척 문제의 해결책으로 “이주민의 귀화를 장려하고 특수한 자치권(自治權)을 획득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에 입적해 중국법의 보호를 받되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때도 각 세력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신민부의 경우 김좌진 등이 주도하는 군정파(軍政派)와 최호(崔灝) 등이 주도하는 민정파(民政派)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각 부(府)의 내부 분열 문제도 한몫했다.
결국 1928년 12월 길림에서 신민부 군정부를 중심으로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퇴파, 그리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했다. 혁신의회는 회장 김동삼, 중앙집행위원장 김원식, 군사위원장 황학수(黃學秀), 군사위원 지청천, 민정위원장 김승학(金承學) 등을 선임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산하에 3개 분회(分會)를 설치했다. 제1분회는 참의부, 제2분회는 정의부, 제3분회는 신민부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혁신의회에 가담하지 않은 정의부 주류파와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비주류 계열 등은 1929년 3월 정의부 주재로 길림에서 통합 회의를 개최하고 4월 1일 새로운 통합 단체인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했다. 이로써 만주는 혁신의회와 국민부라는 두 개의 통합 조직이 분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독립운동 세력들이 노선이나 주도권을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었다.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이 이미 체포된 데 이어 통합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혁신의회 회장 김동삼도 하얼빈에서 체포되었고, 참의부 대표 김승학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될 정도로 중국과 일본의 탄압이 극심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가 만주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이 다가오고 있었다.
(‘만주의 삼부’ 끝, 다음 호부터는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다’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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