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4556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 세종은 박근혜와 너무 달랐다
[게릴라칼럼] '모든 재난은 내 책임'... 재난을 대하는 고대 군주들의 태도
14.04.26 18:01 l 최종 업데이트 14.04.26 18:01 l 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나라에 재난이 발생하면, 옛날 군주들은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천재(天災)건 인재(人災)건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군주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통치 매뉴얼이자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에 따르면, 군주는 우주만물의 운행을 책임져야 할 존재였다. 그래서 군주는 자기 영토 내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우주 현상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했다.
이런 인식 하에서 <예기> 월령 편은 군주에게 월별 과제를 부과했다. 예컨대, 음력 정월에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화합하고 초목이 싹을 피우므로 농사를 개시하도록 명령하라고 말했고, 음력 2월에는 어린 동식물과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군주는 지상은 물론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존재였다.
'한 명의 백성이라도 살 곳 얻지 못하면 군주의 잘못'
▲ 팽목항 앞에 빼곡한 희생자 명단 세월호 침몰 사고 9일째를 맞은 24일 오후 더딘 수색작업에 격앙된 실종자 가족들이 팽목항을 찾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 "당장 내 자식을 살려내라"고 항의했다.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가 이어진 가족대책본부 천막 옆으로 희생자 명단이 보인다. ⓒ 남소연
이 같은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대화가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의 열명(說命) 편에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은나라 시조인 탕왕의 재상인 이윤(伊尹)은 탕왕에게 '한 명의 백성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군주의 잘못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것은 단 한 명의 백성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는 군주의 책임을 강조한 말이다.
참고로 '한 명의 백성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군주의 잘못이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탕왕의 치세 하에서) 한 명의 지아비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저의 잘못입니다"이다. 여기서 이윤은, 탕왕이 한 명의 백성이라도 보살피지 못하면 이것은 탕왕을 잘못 보좌한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말은 한 명의 백성이라도 성심껏 보살피는 것이 군주의 책임이라는 뜻이므로, 이 글에서는 원문을 '한 명의 백성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군주의 잘못이다'라는 말로 쉽게 옮겼다.
이윤의 충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론 인터뷰를 담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한 대목을 연상케 한다. 2007년 아프간 인질 사태에 대한 느낌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그게 진짜 자기 일 아닌 게 없어요. 그런 게 하나도 없어. 대통령에게는, 제일 골치 아픈 게, 비가 너무 와도 내 일이고, 안 와도 내 일이고…. 그래서 일기예보를 매일 보고 또 보고 그래요. 봐 봤자 별 수 없으면서..."
재난이 발생하면 자신의 책임으로 간주했던 군주들
▲ 군주의 어좌. 사진은 서울 경희궁 숭정전에 있는 어좌의 모습. ⓒ 김종성
물론 고대 군주들이 오로지 휴머니즘 때문에 백성을 끔찍이 위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최대 동기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측면에 있었다. 자연 속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그들을 병사로 동원하자면, 자연환경과 백성들을 잘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동기에서든 그들은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잘 보호하는 것이 군주의 책임이라고 인식했다.
이 같은 정신은 백성들이 재난을 당했을 때 특히 잘 나타났다. 자연적인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재난이 발생하면 군주들은 이것을 일차적으로 자신의 책임으로 간주했다. 자기가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서 하늘이 이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래서 군주들은 가뭄 같은 재난이 발생하면 가뭄 해소나 재해민 구제를 위한 실질적 대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기우제나 사면령 같은 상징적 조치를 통해 재난 구제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천명하고 온 나라의 역량을 재난 구제에 집중시켰다.
군주들이 이것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몇 년 뒤 폭군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리게 될 연산군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연산군 1년 7월 29일자(양력 1495년 8월 18일자)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1495년 2사분기와 3사분기에 가뭄이 들어 밭농사와 논농사가 거의 다 망가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인정하면서 "나는 부덕한 몸으로 대업을 계승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 연산군은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상징적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자신의 식사를 줄이고 음주를 금하고 사면령을 반포하는 것이었다. 사면령을 내린 것은, 군주의 사법권 집행이 부당해서 하늘이 재난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관념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사면의 범위를 축소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일부 중죄인을 제외한 나머지 죄인들을 모두 사면하는 '통 큰 사면'을 단행했다. 이것은 자신의 사법권 집행에 그만큼 문제가 있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이 그렇게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하늘이 가뭄을 내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최고 통치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되면, 정부나 지방 관청에서도 좀더 열성적으로 재난 구제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연산군이 재난을 자기 책임으로 돌린 것은, 국가적 역량을 재난 구제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연산군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소재. 왼쪽이 연산군의 무덤. ⓒ 김종성
이런 모습은 성군의 대명사로 통하는 세종의 통치에서도 발견된다. 세종 재위 당시인 1419년의 상황을 기록한 여러 건의 <세종실록> 기사를 보면, 가뭄 피해가 극심해지자 세종은 금주령을 내리고 일부 사법사건을 재심하고 일부 궁녀들을 방출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건을 재심한 것은, 혹시라도 이전에 잘못 재판한 일이 있지 않나 하는 우려에 기인한 것이었다. 궁녀들을 방출한 것은, 궁에서 처녀들을 붙잡아둔 행위가 음양의 조화를 해치지 않았나 하는 우려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는 판결을 잘못 내리거나 궁녀를 많이 붙잡아두면 하늘이 노한다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을 의식한 조치인 동시에, 사건을 재심하고 궁녀를 방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난으로 인해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1419년에는 상왕인 태종도 국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조치에는 세종뿐만 아니라 태종의 의지도 반영되어 있다. 이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건 세종 같은 성군이건 간에, 재난이 발생하면 군주들이 다들 극도로 조심하며 재난을 해결하는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드라마 <뿌리깊은나무>에 세종 역할로 출연한 한석규의 대사가 최근 인터넷 상에서 회자되며 눈길을 끌고 있다. "내 책임이다! 내가 죽인 것이야! 이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란 자리다!" ⓒ SBS
서양과 국교 거부하면서도 외국인 조난자 구호
재난에 대처하는 군주들의 태도는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을 상대로도 똑같이 발현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조선 해상에서 조난을 당한 일본·중국·대마도·오키나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군주들이 보통 이상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태도는, 조선 해상에 들어온 이양선(서양 선박)에 대해서도 나타났다.
1882년 이전의 조선은 '서양과는 통상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며 서양과의 국교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은 미국·영국 같은 서양 선박이 조선 해상에서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구조해서 귀국의 편의를 봐주곤 했다.
예컨대, 고종 2년 8월 17일자(1865년 10월 6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당시의 실질적 통치자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경상도 해안에 표류한 미국인 3인을 구호하고 식량과 선박까지 제공하면서 귀국의 편의를 봐주었다.
기상조건이 나빴기 때문이거나 선장이 부주의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지만, 대원군과 조선 정부는 그런 것을 탓하지 않고 조난자들을 구조하고 귀국의 편의를 제공하는 데 일차적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그 이전의 모든 통치자들한테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난 태도였다.
이런 태도의 저변에는,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조선 땅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선 군주가 똑같이 구제를 베풀어야 한다는 관념이 깔려 있었다. 우주 전체의 모든 생명체를 보호하는 것이 군주의 임무라는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외국인 조난자에 대해서도 구호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 이양선의 모습. 사진은 일본 해안에 등장한 미군 함선 사라토가호의 모습. ⓒ 위키피디어백과사전 일본어판
옛날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각종 재난이 실제로 군주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을 리는 없다. 신라 첨성대의 존재가 웅변하듯이 옛날 사람들도 천문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또 한국 같은 농경사회는 유목사회나 해양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학적이었다.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자면 과학적인 마인드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오늘날의 우리처럼 각종 재난의 직접적 원인이 군주가 아니라는 점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은 각종 재난을 군주의 책임으로 돌리고, 군주 역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것은 일국의 최고 지존이 재난을 자기 책임으로 통감해야만 재난 예방 및 구호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는 옛날 사람들의 현실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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