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8076
박근혜도 꿈꿨던 탕평, 이 남자에겐 쉬웠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비밀의 문> 첫 번째 이야기
14.09.29 17:53l최종 업데이트 14.09.29 17:53l김종성(qqqkim2000)
▲ <비밀의 문>. ⓒ SBS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도 가장 처절한 부자관계. 그런 부자들 중 하나였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다룬 SBS 드라마 <비밀의 문>이 지난 22일 첫 방송을 탔다. 지난주에 방영된 1, 2회분에서는 집권여당인 노론당과의 협조 및 갈등 관계 속에서 독자 노선을 추진하는 영조의 개인적 고뇌가 꽤 인상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드라마의 주요인물인 영조(한석규 분)는 탕평 정치의 주역이다. 손자인 정조의 시대와 더불어 그의 시대에는, 실질적으로는 노론당이 제1당이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당파들 간의 균형이 실현됐다.
그런데 영조의 탕평에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는 탕평의 주역이지만, 동시에 당쟁의 수혜자였다. 그는 보수 정당인 노론당의 필사적인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노론당은 소론당과 더불어 숙종시대에 등장한 당파다. 양당은 서인당에서 출발했다. 숙종시대에 서인당은 동인당의 분파인 남인당을 축출하고 중앙 정계를 독점했다. 그런 뒤에 노론당과 소론당으로 분열되었다.
노론 지지받던 영조는 왜 탕평을 추구했나
노론당은 숙종의 아들 중에서 이금(훗날의 영조)을 지지했고, 소론당은 이윤(훗날의 경종)을 지지했다. 숙종이 죽은 뒤 이윤이 왕이 되자, 이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자 노론당은 이금을 필사적으로 옹위했다. 노론당은 경종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이복동생인 이금을 후계자로 만들었다.
얼마 안 있어 노론당은 경종에게 2선 후퇴까지 요구했다. 이금에게 대리청정(주상 직무대행)을 맡기고 정치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금을 몰아내려 하는 소론당의 투쟁과 이금을 사수하려 하는 노론당의 투쟁이 격렬해졌다.
이 과정에서 소론당은 후계자 책봉과 대리청정의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이금을 반역의 혐의로까지 몰려고 했다. 이것은 훗날 이금에게 두고두고 정치적 족쇄가 되었다. 그것은 이금의 폐부를 찌르는 정치적 콤플렉스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경종이 서른다섯 살 나이로 급사하고 이금이 왕위에 올랐다.
노론당이 없었다면 영조는 왕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노론당의 신세를 단단히 졌을 뿐만 아니라 노론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영조는, 집권 직후부터 탕평을 추구하다가 집권 4년 이후에는 탕평의 틀을 갖추었다. 그가 노론당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탕평 정치를 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모든 통치자들의 희망사항인 '탕평'
탕평에 대한 영조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답이 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통치자들은 만인의 통치자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특정 당파의 통치자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통치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탕평은 모든 통치자의 희망사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에 통일 대박론을 열심히 외치는 것처럼, 2012년 12월 당선 직후의 한동안은 탕평을 열렬히 외쳤다. 박 대통령까지도 탕평을 외쳤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에 탕평을 원하지 않은 통치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영조가 탕평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만으로는 그 시대 탕평의 비결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 <비밀의 문>의 영조(한석규 연기). ⓒ SBS
대부분의 통치자가 탕평을 동경하지만 결국 성사시키지 못하는 것은, 통치자의 힘이 집권당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치자들은 만인의 통치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집권당은 통치자가 자기들만의 통치자로 남기를 원한다. 따라서 통치자가 집권당을 제압하지 못하는 한 탕평 정치는 실현될 수 없다.
이 점을 볼 때 영조가 탕평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어떤 형태로든 제1당인 노론당을 눌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는 영조는 무슨 수로 그렇게 했을까? 제2당인 소론당이 그를 밀어줬을까?
소론당 일부가 영조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소론당은 영조를 반대했다. 그들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확산시켰다. 이처럼 그 시대의 주요 정당 중 어느 하나도 영조의 우군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조는 무슨 수로 노·소론 양당을 누르고 탕평을 추진한 걸까? 이와 관련하여 숙종·경종·영조시대에 나타난 세 가지 정치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급진적인 정계개편 즉 환국(換局)이 숙종시대에 빈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종시대에는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물게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것은 조선·청나라·일본 3국의 평화로 인해 동아시아 왕권이 전체적으로 강화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숙종이라는 인물이 어려서부터 비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사에서는 군주 권력보다 신하 권력이 대체로 더 강했던 점을 고려하면, 숙종시대의 정치 현상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왕권이 강했던 탓에 숙종시대에는 임금이 당파들을 갖고 노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 전만 해도 임금은 당파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숙종 때는 임금이 당파 간의 싸움을 부추기고 특정 당파에게 정권을 넘겼다가 몇 년 뒤 반대 당파에게 정권을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로 인해 당파 간의 대결이 한층 더 격화되면서 당파들의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파들의 힘은 이전보다 약해졌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숙종시대 후반기부터 탕평의 기운이 무르익다가 숙종의 아들인 영조가 탕평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조의 탕평은 상당부분은 숙종의 유산에 힘입은 것이었다.
자기 살 도려내며 당파 간 균형을 만든 영조
▲ 영조의 초상화.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둘째, 영조의 목표 추구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조는 자신의 정치적 콤플렉스를 과감히 드러내는 방법으로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다. 이 점은 당파들이 탕평에 협조하지 않을 때에 그가 선택한 정국 운영 방식에서 드러난다.
경종 때부터 소론당은 이금(훗날의 영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이금이 후계자가 되고 대리청정을 하는 과정을 반역으로 몰려고 했다. 이금이 왕이 된 뒤에 집권당이 된 노론당은 그 같은 소론당의 행적을 반역으로 몰려고 했다.
이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극심해지면서 탕평이 무산될 위험이 생기자, 영조는 자기편인 노론당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당파 간의 균형을 도모했다. 그는 자신이 후계자가 되고 대리청정을 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이 결여됐다는 소론당의 비판을 수용하고 소론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이것이 집권 3년 뒤에 일어난 정미환국이다. 음력으로는 정미년에, 양력으로는 1727년에 일어난 정계개편이다.
영조가 소론당에게 정권을 내준 것은 그 당시로 봐서는 탕평의 이념에 어긋나지만, 길게 보면 탕평의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 소론당을 압박하는 노론당을 약화시키고 탕평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자기 살을 도려내는 방법으로 당파 간의 균형을 만들었다.
이때 영조는 자기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소론당의 주장을 수용했다. 나중에 가서는 소론당의 주장을 물리쳤지만, 집권 초기에 그는 탕평이란 대의를 위해 일시적으로 자신의 약점까지도 과감히 드러냈다.
18세기 조선이 낳은 특별한 군주
셋째, 영조의 위기 대응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왕이 된 지 4년 만인 1728년에 소론당이 중심이 되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이라 불리는 군사반란이다.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체세력은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됐다고 주장하면서 한양을 향해 창칼을 빼들었다. 초기에 이 반란은 충청·전라·경상도에서 호응을 얻었다. 청주성은 반군에 의해 함락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이 반란은 정권을 전복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이때 영조의 대응 방식이 주목할 만하다. 소론당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여느 임금 같았으면 노론당 중심으로 대책본부를 꾸렸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는 달랐다. 소론당 온건파에게 진압 책임을 맡긴 것이다.
이것은 반란군 진영을 당황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동시에, 반란에 대한 소론당의 참여도를 떨어뜨리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반란군은 진압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노론당뿐만 아니라 소론당 일부도 영조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이것을 발판으로 적대세력을 무력 진압함으로써 영조의 탕평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이처럼 영조의 탕평은 단순히 탕평을 하겠다는 의지만으로 성사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인 숙종의 정치적 유산에 힘입은 측면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조 자신의 과감성에 기인한 측면도 적지 않았다.
영조는 자신의 정치적 콤플렉스를 드러내고 자기편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또 반대편 사람들을 등용해 반대편의 군사반란을 진압하는 방법으로 당파 간의 균형을 추구했다. 이처럼 탕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기 살도 깎아내고 정치적 모험도 감수했다. 그래서 그는 18세기 조선이 낳은 특별한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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